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8화: 불길한 악보와 빈 보조구
제라드 교수는 지하 저장고에서 가져온 금속 조각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탑 문양이 박힌 얇은 조각은 마치 숨을 참는 것처럼 잠잠했다. 그러나 하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가장자리에 남은 검은 가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짧은 저음이 들렸다.
반 박자 뒤늦은 두 번째 음이 벽을 긁었다. 셋째 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멀리서 다음 자리를 고르는 듯한 침묵만 남았다.
“제1중앙 실기실 쪽입니다.”
하진이 말했다.
제라드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쪽 봉인은 내 인장으로만 열 수 있다. 인장 조각 하나와 잔향만으로 학생들을 들일 근거는 부족해.”
“저 배열은 한 곳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진은 조각 위에 손을 뻗지 않은 채 설명했다.
“첫 박자로 가까운 공명석을 찾고 둘째 박자로 마력핵이 비는 순간을 만듭니다. 셋째 박자는 다른 은선으로 넘기는 신호예요. 저장고에서 막았으니 다음 곳이 중앙 실기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엘레나는 검은 나무 지휘봉을 옆구리에 끼웠다. 표정은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푸른 공명석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중앙 실기실에는 합주보다 더 많은 학생용 보조 공명석이 있습니다. 실습 시간 전에 배열이 붙으면 출입한 학생들이 먼저 동조할 겁니다.”
“그럴 가능성만으로 봉인을 풀 수는 없다.”
“그럼 누가 풀었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문가에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는 한 손에는 대피 명단을 쥐고 다른 손에는 손바닥만 한 청동 고리를 들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찾았어. 저장고 보조구 목록에 이게 하나 비어 있었어. 지하 물건이 아니라 제1중앙 실기실 받침대에 쓰는 연결 고리래.”
루카스가 고리를 탁자에 올렸다.
하진은 곧장 그것을 집지 않았다. 고리 안쪽에 눌어붙은 검은 가루가 인장 조각과 똑같이 두 번 떨었다.
짧은 저음. 늦은 둘째 음.
빈 보조구는 누군가가 챙기지 못한 물건이 아니었다. 배열이 들어갈 자리를 일부러 남겨 둔 것이었다.
제라드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앞장선다. 엘레나는 지휘 보조를 맡아라. 로웰은 밖에서 대기한다. 하진과 루카스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라.”
그가 금속 조각을 회수하려 하자 하진이 덧붙였다.
“교수님. 원본 초안은 아직 보관실에 있습니까?”
“검증 봉인 안에 있다.”
“복사본은요?”
제라드의 손이 멈췄다.
“실기실 분석대에 한 부를 남겨 뒀다. 왜 묻지?”
검은 가루가 세 번째로 흔들렸다. 이번에는 탁자 위가 아니라 복도 끝에서 낮은 울림이 답했다.
하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 악보가 다음 표적일 수도 있습니다.”
제1중앙 실기실 앞의 문은 두 겹의 은빛 인장으로 닫혀 있었다. 제라드가 손등을 대자 문양이 하나씩 열렸다. 마지막 인장이 풀리는 소리는 지나치게 길었다.
문틈이 벌어지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바닥의 은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멈춰.”
제라드가 먼저 팔을 뻗어 일행을 막았다. 안쪽은 평소의 실기실과 달랐다. 둥근 연습 구역 한가운데에 여섯 개의 보조 공명석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다섯 받침대에는 푸른 결정이 얹혀 있었고 마지막 하나만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 주변의 은선이 검은 실처럼 꿈틀거렸다.
그 너머 분석대에는 푸른 악보지가 펼쳐져 있었다. 하진의 <월광식 속사 아르페지오 제1초안> 복사본이었다. 빠른 음표 아래에 검은 가루가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가까이 가지 마.” 제라드가 말했다.
그러나 검은 선은 그 말을 기다린 듯 움직였다. 다섯 공명석으로 흩어진 선이 동시에 밝아지더니 출입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가 지휘봉을 세웠다. “문턱에 얇게 막을 칩니다. 안쪽만 보정하세요.”
푸른 빛이 문틀을 가로질렀다. 한 겹뿐인 공명막이었다. 강한 충격을 막는 벽이 아니라 안쪽 소리가 바깥의 마력에 닿지 못하게 하는 얇은 악보선이었다.
그때 에드릭이 문 뒤에서 낮게 말했다.
“저 첫 음형.”
제라드가 돌아보았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들어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에드릭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검은 선이 공명석 사이를 뛰는 모습을 노려봤다.
“첫 박자를 짧게 밀어붙이고 뒤를 비워 둬요. 제 화염 선율의 도입부와 같습니다.”
“네 선율이 만든 잔향은 아니야.” 하진이 말했다.
“알아. 그런데 누군가 그 구조를 떼어 갔어.”
에드릭의 손끝에 작은 불꽃이 떠올랐다. 결투 때의 폭발적인 불길이 아니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한 음짜리 불꽃이었다.
“내가 첫 박자를 고정할 수 있어. 나머지는 네가 해.”
하진은 잠깐 망설였다. 에드릭이 이곳에 남은 이유가 선의인지 명예를 위한 변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박자는 사람의 의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문턱은 넘지 마세요. 첫 음만 짧게 잡아 주세요.”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은 비어 있는 받침대를 바라봤다. 검은 선은 다섯 공명석을 휘감고 있었지만 끝내 그곳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빈 자리의 은선이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석대의 악보를 가리켰다. “저 복사본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저걸 들을 수 있는 길을 만들려고 왔어요.”
“차이가 뭔가?” 제라드가 물었다.
“악보의 힘을 빼앗는 배열이 아니에요. 비어 있는 보조 성부를 먼저 점유하고 가장 반응이 큰 선율에 길을 연결합니다. 제 악보가 빠르게 반응하니까 길 끝으로 고른 겁니다.”
루카스가 청동 고리를 꼭 쥐었다. “그럼 이걸 끼우면 돼?”
“그대로 끼우면 안 돼. 빈 자리를 되돌리면 배열이 그걸 따라갈 거야.”
하진은 악보지 한 장을 꺼냈다. 손끝이 식었다. 원본은 제라드의 봉인 안에 있다. 하지만 복사본에도 자신의 보정 습관과 리듬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검은 박자가 그것을 따라왔다면 다음에는 원본을 찾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
악보를 접어 버리면 된다. 더 이상 이곳에 자기 방식의 길을 남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빈 자리를 찾는 배열은 다른 학생의 마력핵을 고를 뿐이었다.
하진은 종이 위에 두 줄을 새로 그었다. 빠른 아르페지오 아래로 3도와 6도가 교차했다. 공격을 위한 화살이 아니라 비어 있는 음을 서로 붙잡아 두는 보조 성부였다.
“루카스. 고리를 받침대에 걸어. 끝까지 밀어 넣지는 말고 손으로 잡고 있어.”
“알겠어.”
“엘레나 선배는 둘째 박자가 늦어지기 직전에 이 성부를 올려 주세요.”
엘레나는 하진이 적은 두 줄을 한 번 훑었다. “첫 박자는?”
하진은 문가를 봤다.
에드릭이 말없이 불꽃을 세웠다.
“저쪽이 잡아 줄 겁니다.”
제라드는 하진의 손과 악보를 번갈아 보았다. 반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실패하면 즉시 물러난다.”
“네.”
첫 박자가 터졌다.
다섯 개의 공명석이 검은 빛을 뿜었다. 동시에 에드릭의 불꽃이 문턱에서 짧게 꺾였다. 강한 화염이 첫 음을 억누르자 검은 선이 밖으로 뻗지 못하고 받침대 사이로 되감겼다.
루카스가 청동 고리를 빈 받침대에 걸었다. 고리가 떨리며 손바닥을 밀어냈다.
“지금이야!”
둘째 박자가 늦게 내려앉으려 했다.
엘레나의 지휘봉이 움직였다. 하진이 적은 3도가 먼저 울리고 6도가 뒤를 받쳤다. 둘은 비어 있는 받침대 안에서 서로 맞물렸다. 검은 선은 가장 쉬운 빈자리를 향해 뛰어들었지만 그곳에는 이미 두 성부가 얇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진은 마지막 보정 기호를 눌렀다.
빈 자리는 닫히지 않았다. 대신 어느 한 음도 주인이 될 수 없는 작은 고리가 되었다.
검은 선이 그 안에서 한 번 뒤집혔다.
하진의 복사본이 바람도 없는데 들썩였다. 빠른 아르페지오의 음표들이 은빛으로 번졌다. 배열은 그 선율을 붙잡으려 했지만 새로 만든 보조 성부가 먼저 박자를 나누고 있었다.
“흘려 보내지 마.” 하진이 말했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봉 끝이 낮게 원을 그렸다.
에드릭은 불꽃을 더 키우지 않았다. 그는 첫 음을 붙든 채 검은 선이 빠져나갈 틈만 좁혔다.
검은 박자의 셋째 음이 오려 했다.
그러나 갈 길이 없었다.
짧은 저음이 꺼졌다. 늦은 둘째 음이 공중에서 부서졌다. 마지막 음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빈 받침대의 고리 안으로 가라앉았다.
방 안의 공명석들이 하나씩 본래의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루카스가 손을 빼자 청동 고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진은 숨을 고르며 악보지를 접었다. 복사본의 가장자리에는 검은 가루 대신 가느다란 은빛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제라드가 조용히 말했다. “빈 자리를 채운 게 아니군.”
“채우면 다시 뺏깁니다. 서로 나눠 가진 자리로 바꿨어요.”
엘레나가 그의 말을 받아냈다. “지휘에서 한 성부에만 숨을 몰아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에드릭의 불꽃이 사라졌다. 그는 하진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선율을 훔쳐 쓴 놈이 있다면 찾아야겠지.”
제라드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인장 조각을 집어 들었다. 조각의 탑 문양은 더 이상 제1중앙 실기실을 향하지 않았다.
문양 끝에서 아주 가는 은빛 선이 위층을 가리켰다.
“기록 보관탑.”
루카스가 침을 삼켰다. “거긴 교수님들이 보관하는 원본 악보가 있잖아.”
“그래서 더더욱 이 일은 비공개로 처리한다.” 제라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돌면 범인이 먼저 움직일 거다.”
하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지금도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제 초안 복사본까지 찾아왔어요. 기록 보관탑에 원본이 있다면 숨기는 사이에 증거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네가 공개적으로 떠들겠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분석에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실기실의 빛이 잦아들었다. 제라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하진이 접은 악보와 봉인 조각 사이를 오갔다.
“이번만이다. 인장 조각은 내가 공식 증거로 봉인한다. 대신 하진은 내 검증실에서 분석을 돕는다. 엘레나는 지휘과 공명석 목록을 다시 확인해라. 로웰은 네 선율이 유출된 경로를 정리해서 제출한다.”
에드릭은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제라드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하진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불협화음의 발신자를 찾아라]
[진행도: 2/5]
[새 경고: 발신자는 악보를 듣고 있다]
하진은 손안의 복사본을 더 세게 쥐었다.
검은 박자는 멎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방금 전까지 자기 악보의 숨결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