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7화: 검은 박자의 저장고
지하 저장고의 문은 두꺼운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문틈 아래로 새어 나온 검은빛이 바닥의 은선을 더듬었다. 짧고 낮은 음이 한 번 울린 뒤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하진은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손끝을 은선에 댔다. 얼음처럼 차가운 진동이 손가락 끝을 타고 팔목까지 기어올랐다.
“세 번째 박자가 오면 안쪽 공명석이 전부 대답할 겁니다.”
엘레나는 뒤쪽 복도를 돌아봤다. 단원들은 보조구를 풀어 든 채 벽에서 떨어져 있었다. 타악 단원의 손목은 아직도 검은빛을 띠며 가늘게 떨렸다.
“그 전에 기둥과 연결선을 끊으면?”
“선은 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미 맞춰진 마력핵은 남습니다.”
하진은 손을 떼고 타악 단원을 가리켰다.
“저 박자는 마력을 빼앗지 않아요. 같은 박자로 맞춘 다음에 밀어 넣습니다. 지금 돌을 부수면 보조구가 마지막 박자를 대신 받을 수도 있어요.”
엘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판단이 틀리면 내 단원이 다친다.”
“맞습니다.”
하진은 변명하지 않았다. 검은 박자를 억지로 끊는 편이 편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누군가가 어떻게 단원들의 마력핵까지 손을 뻗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부수면 발신자가 남긴 길까지 사라져요.”
잠시 뒤 엘레나는 지휘봉으로 문 옆의 경보석을 눌렀다. 푸른 빛이 복도 천장을 타고 번졌다.
“루카스. 단원 전부를 계단 위까지 데려가. 보조구는 바닥에 놓게 하고 누구도 마력을 밀어 넣지 못하게 해.”
“알겠어.”
루카스는 대답하면서도 하진을 한 번 돌아봤다. 걱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지만 더 묻지 않고 단원들을 이끌었다.
엘레나는 하진 앞으로 나섰다.
“나는 안의 박자를 붙든다. 너는 길을 찾아.”
“선배가 제 박자를 억지로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도 그대로죠.”
“지금도 그걸 확인할 생각이야?”
“이럴 때 어기기 쉬우니까요.”
엘레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휘봉 끝의 푸른 공명석이 한 번 빛났다.
“내가 신호를 주기 전에는 네 악보에 손대지 않는다.”
그 말이 끝나자 문 너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두 번째 음이 늦지 않았다. 수십 개의 공명석이 한꺼번에 대답했다. 잠긴 철판이 안쪽에서 밀려나며 낮게 열렸다.
저장고 안은 선반과 나무 상자로 가득했다. 유리관마다 회색 공명석이 한 개씩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가장 안쪽 상자 하나만 검은 실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주변의 은선은 누군가 칼로 표면을 벗겨 낸 것처럼 거칠었다.
엘레나가 지휘봉을 들어 입구에 푸른 막을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 다만 내 막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마.”
“그 안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필요하면 내가 판단한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장고 바닥의 은선은 제2합주실 기둥에서 내려온 선 하나만이 아니었다. 선반 아래로 뻗은 가는 선들이 서로 얽힌 뒤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실습실마다 쓰는 공명석의 예비선이었다.
상자 앞 봉인에는 지휘과 물품 인장이 아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박자 모양의 홈 세 개가 봉인 아래에 나란히 파여 있었다.
첫 홈은 깊었다. 두 번째 홈은 멀고 얕았다. 세 번째 홈은 비어 있었다.
하진은 숨을 삼켰다.
“이건 단순 오염이 아니에요.”
“설명해.”
“첫 박자로 가까운 공명석을 찾고 둘째 박자를 늦춰 반응할 틈을 만듭니다. 세 번째 박자에는 맞춰진 공명석의 힘을 다음 선으로 보내요.”
하진은 선반 아래의 다섯 갈래 은선을 가리켰다.
“여기서 멈췄다면 제2합주실만 노린 게 아닙니다. 저장고를 통해 다른 실습실까지 훑을 수 있어요.”
문턱 밖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에드릭이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문가에 서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손에는 타악 단원이 떨어뜨린 보조구가 들려 있었다.
“그런 배열이 학생용 저장고에 있을 리가 없다.”
“없어야 정상이지.”
하진은 상자를 살폈다. 봉인 가장자리에는 붉은 가루가 얇게 묻어 있었다. 에드릭이 쓴 화염 계열 잉크와 비슷한 색이었다. 하지만 열기는 없었고 가루의 결도 달랐다.
“네 선율이 쓰였을 가능성은 있어요.”
에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내 화염을 훔쳐 썼다는 뜻인가?”
“화염 자체가 아닙니다. 강한 첫 박자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구조요. 누군가는 그 구조를 검은 박자의 앞부분에 덧씌웠어.”
“나는 이런 걸 만든 적 없어.”
“알아요. 네 악보는 둘째 박자를 이렇게 비워 두지 않으니까.”
하진이 얕은 홈을 가리켰다. 에드릭은 한동안 그 자리를 노려봤다. 반박하려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엘레나는 시선을 상자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남아 있겠다면 출입구를 지켜. 누가 올라오거나 내려오면 바로 알려.”
에드릭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보조구를 문가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때 상자 안의 검은 공명석이 낮게 울었다.
쿵.
엘레나의 공명막이 한 번 크게 밀렸다. 복도 끝에서 타악 단원의 신음이 들렸다.
하진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마력핵 동조율: 46퍼센트]
[경고: 강제 차단 시 보조구 역류 가능]
[오염 배열 다음 박자까지: 12초]
“부수면 안 됩니다.”
“그럼 네 화살로 중심을 뚫어.”
엘레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휘봉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화살은 3.2초가 필요해요. 그 사이에 역류가 먼저 옵니다.”
“다른 방법은?”
하진은 검은 공명석과 복도의 보조구를 번갈아 봤다. 둘은 같은 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 힘으로 끊으면 둘 다 다친다.
하진은 듀엘론에서 에드릭의 화염을 비켜 보냈던 순간을 떠올렸다. 상대의 선율을 꺾지 않았다. 갈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고 그쪽으로 흘렸다.
“첫 박자를 붙잡아 주세요.”
엘레나가 눈썹을 움직였다.
“무슨 뜻이지?”
“제가 둘째 박자를 늦출 겁니다. 선배는 그 사이에 다른 성부를 넣어 주세요.”
“저장고에 성부가 어디 있지?”
하진은 선반을 둘러봤다.
“있어요. 여기 있는 공명석 전부가요.”
엘레나의 시선이 유리관을 훑었다. 그 안의 공명석은 대부분 낮은 등급이었다. 하나로는 검은 공명석에 대항할 수 없다.
그러나 하진이 말한 것은 대항이 아니었다. 하나의 돌에 몰린 박자를 여러 개의 돌로 흘려 보내는 일이었다.
“3도와 6도?”
“네. 힘을 더하는 대신 서로에게 빌려줄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엘레나는 지휘봉을 천천히 들었다.
“내 지휘를 따라올 수 있겠어?”
“선배가 제 빈자리를 믿으면요.”
하진은 바닥에 푸른 악보지를 폈다. 월광식 속사 아르페지오 초안의 가장자리에는 타 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살로 바꾸는 기호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올라가던 음들을 셋으로 나눴다.
첫 음은 상자 왼쪽 선반으로 보냈다. 두 번째 음은 오른쪽 유리관으로 흘렸다. 마지막 음은 타악 단원의 보조구로 향하는 은선 바로 앞에서 멈췄다.
하진이 3도와 6도를 얹을 때마다 종이 위 음표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체내 마력이 없는 손끝에서 대기 에테르가 조금씩 모여들었다.
“되겠어?”
문가의 에드릭이 낮게 물었다.
“안 되면 그때 부수세요.”
“그 선택을 내릴 사람은 나도 아니야.”
에드릭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복도 쪽 보조구를 향한 시선은 아까보다 훨씬 무거웠다.
엘레나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신호에 맞춰.”
첫 박자가 울렸다.
엘레나의 지휘봉 끝에서 푸른 선이 뻗어 검은 공명석을 감쌌다. 그녀는 막으로 눌러 부수지 않았다. 첫 박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 뿐이었다.
검은 공명석은 그 소리를 물었다.
하진은 둘째 박자 위에 지연 기호를 얹었다.
소리가 멎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바로 이어져야 할 음이 반 박자만큼 뒤로 밀렸다. 그 짧은 틈이 저장고 전체에 열렸다.
“왼쪽 선반. 셋째 줄.”
하진의 말에 엘레나의 지휘봉이 가느다란 빛을 세 번 흩뿌렸다.
유리관 안 공명석들이 차례로 울었다. 하나는 너무 약했고 하나는 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하진이 심은 3도와 6도는 검은 박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상자가 혼자 버티던 힘을 선반 위의 돌들에게 나눠 줬다.
타악 단원의 손목에서 검은 떨림이 한 번 크게 솟았다.
“지금입니다.”
엘레나는 지휘봉을 옆으로 휘었다.
푸른 공명막이 갈라진 틈으로 하진의 빈 박자가 들어갔다. 검은 공명석은 두 번째 소리를 낼 자리를 잃고 한 번 헛돌았다.
쿵.
소리는 절반만 울렸다.
하진은 마지막 음을 내렸다. 선반의 공명석들이 함께 낮은 화음을 만들었다. 검은 선은 타악 단원의 보조구에서 떨어져 나와 상자 안으로 되감겼다.
동시에 상자 봉인 한쪽이 갈라졌다.
검은빛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엘레나는 지휘봉을 내리지 않은 채 외쳤다.
“동조가 끊겼는지 확인해!”
복도에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타악부 보조구가 멈췄어. 손목도 이제 안 떨려!”
하진의 시스템 창이 다시 떠올랐다.
[마력핵 동조율: 7퍼센트]
[오염 공명 경로 분산 성공]
[신규 분석 대상 확보]
하진은 금속 조각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아카데미의 탑 문양과 함께 깊고 복잡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엘레나가 그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관리 구역 출입 인장이다.”
“학생 통행패와는 다른 겁니까?”
“보관실과 지하 설비 그리고 중앙 실기실의 봉인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야. 교수나 시설 관리관에게만 발급된다.”
금속 조각의 세 번째 홈 안에는 검은 가루가 남아 있었다. 하진은 그것을 비스듬히 들어 빛에 비췄다. 가루 사이에는 끊어진 은선 한 조각이 박혀 있었다.
“발신자는 상자를 열기만 한 게 아니에요. 탈출할 길도 따로 만들었습니다.”
루카스가 계단 쪽에서 달려왔다. 대피시킨 단원들 명단을 적은 종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진. 이상한 게 있어.”
“무슨 일인데?”
“보조구 하나가 없어. 명단에 있는 단원은 전부 여기 있는데 누군가가 보조구만 들고 간 것 같아.”
바로 그 순간 복도 끝에서 가는 선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엘레나가 몸을 돌렸다.
“누가 있나?”
대답은 없었다. 계단 위로 이어진 복도에는 대피 경보의 푸른 불빛만 흔들렸다.
에드릭이 먼저 달려가 복도 모퉁이를 확인했다. 잠시 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어. 다만 벽 쪽 은선 하나가 새로 잘려 있다.”
하진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저장고의 고른 화음 아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박자가 들렸다.
쿵.
이번에는 저음 하나만 울렸다.
시스템 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숨은 공명 이상 재감지]
[발신 위치: 제1중앙 실기실 방향]
[주의: 동일 배열 신호 1개 이상 잔존]
하진은 지하 천장을 올려다봤다.
제1중앙 실기실은 마력 인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곳까지 닿는 은선을 건드리고 있었다.
엘레나가 금속 조각을 단단히 쥐었다.
“제라드 교수에게 즉시 보고한다. 그리고 중앙 실기실로 간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염된 돌은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