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12화: 첫 번째 오케스트라
다음 날 오전 아카데미 중앙 실습동 게시판 앞은 아침 일찍부터 서성이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넓은 양피지 게시판 한가운데에는 지휘과 수석 엘레나 폰 아르도의 서명이 선명하게 적힌 오케스트라 단원 모집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제국 아카데미 음악제 본선에 참가할 대규모 심포니 협연 오케스트라의 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레나 수석님이 직접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라고?"
"근데 곡을 쓰는 작곡가가 그 낙제생 하진이잖아."
"앳된 소리 마라. 어제 마르쿠스 선배가 그 녀석 자율 연구실을 빼앗으려다 학생회 검수단 앞에서 망신만 당하고 쫓겨났다며."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속삭임 사이로 무거운 구두 소리가 울렸다. 학생회 붉은 뱃지를 단 3학년 학사간부들이 게시판 앞을 둘러싸듯 걸어 나왔다. 중심에 선 마르쿠스 로엔이 비웃음을 띤 채 모집 공고문을 쏘아보았다.
"작곡과 수석의 이름으로 분명히 경고한다."
마르쿠스가 게시판을 향해 턱짓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본도 없는 대기 에테르니 편법이니 하는 이단 악보에 동조하여 아카데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는 학생회 장학금 지원 대상에서 즉시 제외될 것이다. 귀족 파벌 앙상블의 다음 학기 정식 단원 선발에서도 배제될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해라."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실력을 겨루기도전에 아카데미 내 권력을 이용해 연주자들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치사한 공작이었다. 게시판 앞을 서성이던 연주과 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엘레나 폰 아르도의 명성이 높다 한들, 학내 실권을 쥔 귀족 파벌 학생회의 눈밖에 나는 것은 당장 다음 학기 아카데미 생활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복도 기둥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루카스가 입술을 바짝 태우며 주먹을 쥐었다.
"저 치사한 놈들! 실력으로 안 되니까 저렇게 대놓고 치사하게 나오는 거야?!"
옆에 선 엘레나는 검은 나무 지휘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르쿠스 로엔. 수석이라는 자가 저토록 졸렬한 수단까지 쓸 줄은 몰랐군."
"어쩌죠, 엘레나 선배? 지원서 양식이 몇 시간째 한 장도 채워지지 않았어요. 연주과 애들이 전부 몸을 사리고 있다고요."
루카스의 걱정 어린 말에도 하진은 덤덤하게 게시판 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하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체내 마력을 무작정 뿜어대는 데만 익숙한 귀족 수석 연주자들은 내 심포니에 들어와 봤자 악보를 다루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냐, 하진?"
엘레나가 하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압도적인 마력량이 아니에요. 소리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고 정밀한 파동을 얹을 수 있는 연주자죠."
하진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작은 메모지 몇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아카데미 연주과에서 마력량이 적거나 소리가 이질적이라는 이유로 메인 앙상블에서 외면받던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들이 낙제생이라 부르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진짜 오케스트라가 될 겁니다."
오후가 되자 작곡동 별관 3층 자율 연구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머뭇거리는 걸음걸이로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세 명의 학생들이었다.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진 현악과 2학년 이반, 은색 플루트를 꼭 쥐고 있는 목관과 1학년 클로에, 그리고 둔탁한 청동 트롬본을 든 거구의 금관과 학생 에릭이었다.
이들은 모두 아카데미 연주과에서 유명한 문제아 혹은 외톨이들이었다.
이반은 마력 응집력이 떨어져 바이올린 소리가 얇다는 이유로 앙상블에서 쫓겨났고, 클로에는 마력 유도 시 소리가 공중에서 산란되는 기이한 주파수 탓에 조율 불량 판정을 받았다. 에릭은 평민 출신에다 소리가 지나치게 거칠어 귀족 금관 앙상블 지원에서 번번이 낙방한 인물이었다.
"정말…… 저희를 부르신 건가요, 하진 선배님?"
클로에가 불안한 눈빛으로 연구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웅장한 에테르 오르간과 벽면의 청동 파이프들, 그리고 지휘과 수석 엘레나 폰 아르도가 서 있는 모습에 세 사람은 긴장감으로 어깨를 굳혔다.
이반이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쥔 채 씁쓸하게 말했다.
"저희는 마력 수치가 150도 안 되는 낙제생이나 다름없습니다. 학사간부들이 귀족 학생회를 동원해 지원자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건 들었지만 저희 같은 무능한 연주자들로는 대규모 심포니를 구성할 수 없을 텐데요."
하진은 오르간 의자에서 일어나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마력이 부족해서 낙제생이라고 생각합니까?"
하진의 질문에 세 사람은 말을 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반. 당신의 바이올린 소리가 얇은 건 마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억지로 마력을 눌러 담으려다 활의 마찰 진동수가 에테르 주파수와 어긋나 상쇄 간섭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현을 짚는 손가락의 위치를 0.5밀리미터만 수정하면 대기 에테르가 스스로 공명합니다."
하진은 시선을 돌려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클로에. 당신의 플루트 음색이 산란되는 건 불량이 아니라 배음 성분이 남들보다 두 배 이상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이세계 마법 악보의 단선율 문법이 당신의 소리를 담지 못해 폭주했을 뿐이에요. 내 심포니에서 당신의 플루트는 현악기와 금관 사이의 마찰을 완화하는 완벽한 동조 안정제가 됩니다."
하진의 냉철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분석에 클로에의 눈이 커졌다. 평생 교수들과 귀족 학생들에게 '음색 불량'이라는 비난만 들어왔던 그녀였다.
"그리고 에릭. 당신의 트롬본 소리가 거친 건 마력을 폭발적으로 뿜어내는 금관 마법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저음역 에테르를 집속하는 으뜸 파동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오케스트라에서 당신의 금관은 전방 결계의 뼈대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아르페지오 팡파르가 될 겁니다."
세 연주자의 가슴이 뜨겁게 떨리기 시작했다. 남들이 약점이라 치부했던 자신들의 소리가 하진의 입을 통해 완벽한 음악적 역할로 재해석되고 있었다.
"마력으로 눌러버리는 조잡한 마법 음악은 잊으세요."
하진이 책상 위에 놓인 세 장의 악보를 집어 들고 그들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지구의 화성학과 대위법으로 대기 중의 에테르를 일으킬 겁니다. 연주하십시오. 당신들의 진짜 소리를."
엘레나가 연구실 중앙에 서서 검은 나무 지휘봉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하진은 오르간 앞에 앉아 4성부 보정식이 적힌 악보를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이반이 바이올린을 턱에 고정하고 클로에가 플루트에 입술을 대었다. 에릭이 트롬본의 마우스피스를 꼭 쥐었다.
"제1번 심포니 '에테르의 시작', 제1악장 도입부."
엘레나의 맑고 단단한 목소리가 연구실 안을 채웠다.
"지휘봉의 끝을 따라 에테르의 흐름을 느껴라."
스윽-.
지휘봉이 공중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하진의 손가락이 오르간 건반의 C장조 으뜸화음을 가볍게 짚는 것과 동시에 이반의 바이올린 활이 현을 부드럽게 긁어내렸다.
스르륵-!
순간 연구실 내부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반의 바이올린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현악 선율이 하진의 오르간 파동과 얽히며 공중에 투명한 은빛 에테르 수막을 만들어냈다. 마력을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음에도 대기 중의 에테르가 스스로 공명하며 현의 진동을 몇 배로 증폭시켰다.
"어……?!"
이반이 자신의 손끝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공명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손끝에 마력의 반동이나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대기 전체가 바이올린 활의 울림을 따라 스스로 노래하는 듯했다.
이어 클로에의 플루트 선율이 3도 위 상행 아르페지오로 겹쳐 들었다.
피-리리릿-!
청아하고 풍부한 플루트의 배음이 현악의 수막 위로 스며들자 에테르의 공명장이 한층 더 넓고 맑게 확장되었다. 두 연주자의 서로 다른 주파수가 충돌하기는커녕 하진이 설계한 대위법 보정 기호를 따라 완벽한 톱니바퀴처럼 어우러졌다.
"지금이다, 에릭!"
엘레나의 지휘봉이 웅장하게 튕겨 올랐다.
에릭이 트롬본을 향해 숨을 깊게 불어넣었다.
콰아아앙-!
트롬본의 묵직하고 웅장한 저음역 으뜸음이 터져 나오자 공중에 형성되어 있던 은빛 에테르 수막이 순식간에 눈부신 수직 성벽 형태의 대공명 결계로 솟구쳐 올랐다.
오르간, 바이올린, 플루트, 트롬본.
서로 다른 네 개의 악기와 수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4성부 다성부 공명이었다. 마력 적성 제로와 불량생이라 불리던 이들이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압도적인 화성적 미학이 연구실 전체를 지배했다.
하진의 눈앞에 투명한 시스템 창이 돋아났다.
[제1번 심포니 '에테르의 시작' 1악장 앙상블 동조 성공]
[참여 연주자 4성부 다성부 에테르 보정율: 99.8%]
[공명 구조: 저위 공명 결계 및 광역 주파수 집속]
[대기 에테르 자율 유도율: 15.0% -> 17.5% 상승]
"성공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루카스가 벅차오르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연주를 마친 이반과 클로에, 에릭은 떨리는 자신의 손과 악기를 바라보며 참았던 눈시울을 적셨다. 자신들의 소리가 마법이 되어 공기를 찢고 결계를 세웠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봤지?"
하진이 건반에서 손을 떼며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의 소리는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음악이 조잡했을 뿐이지."
같은 시각 작곡동 별관 3층 복도를 지나던 학생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었다.
잠겨 있던 자율 연구실 틈새로 뿜어져 나온 것은 체내 마력을 억지로 쥐어짜는 기분 나쁜 파동이 아니었다. 맑고 웅장하며 온몸의 피를 펄떡이게 만드는 전율의 은빛 울림이었다.
"이 소리는 뭐지?"
"무슨 오케스트라 앙상블이 별관에서 연주를 하는 거야?"
학생들이 연구실 문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복도를 찾아왔던 귀족 학생회 학사간부 마르쿠스 로엔 역시 그 무리 속에 서 있었다.
마르쿠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자율 연구실의 두꺼운 놋쇠 문틈으로 눈부신 은빛 광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놋쇠 문고리가 공명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고, 복도 벽면에 걸린 청동 촛대들이 은은한 완전화음을 일으키며 진동했다.
"말도 안 된다……."
마르쿠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오케스트라 지원자들을 전면 보이콧하여 하진을 고립시켰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지원서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던 아카데미의 낙오자들이 하진의 연구실에 모여 제국 최고의 수석 앙상블조차 내지 못할 압도적인 다성부 공명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달칵.
연구실 문이 열리고 하진과 엘레나, 그리고 악기를 든 세 명의 연주자가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마르쿠스의 시선이 하진 일행에게 쏠렸다.
하진은 하얗게 질린 마르쿠스를 차가운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지원자를 보이콧하면 음악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하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당신들이 쫓아낸 이들이 바로 내 심포니의 주석입니다. 마르쿠스 수석. 제국 음악제 무대에서 당신들의 조잡한 단선율 마법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똑똑히 보여드리죠."
마르쿠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짓씹었지만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방금 전 연구실에서 터져 나온 웅장한 공명이 이미 모든 진실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뒤에 숨어 곡을 쓰던 작곡가의 손끝에서, 아카데미의 버림받은 연주자들이 모여 세계를 뒤흔들 첫 번째 오케스트라의 위대한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