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10화: 정비 인장의 주인
밤 기온이 내려간 관리동 제4기록실의 철문은 차가운 침묵을 내뿜고 있었다.
제라드 교수가 상임위원 인장을 대자 무거운 철제 빗장이 세 번에 걸쳐 풀렸다. 좁은 기록실 안쪽에는 실물 양피지 대장이 든 금속 선반과 에테르 기록석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기록실의 모든 대장은 학사위원회의 인장으로 묶여 있다.”
제라드가 등불을 켜며 말했다. 붉은 불빛이 묵직한 서류함 위로 길게 늘어졌다.
“정비 인장의 발급 기록을 꺾거나 지우는 일은 이 대장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학생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진은 선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공기 중에 배어 있는 오래된 양피지 냄새 사이로 낯익은 냉기가 감돌았다. 듀엘론 무대 아래에서 그리고 지하 저장고와 열람고에서 맡았던 바로 그 잔향이었다.
“글자를 지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진의 말에 제라드가 눈썹을 올렸다.
“지우지 않고 인장을 악용한다는 뜻인가?”
“네. 서류의 이름을 바꾸면 바로 티가 납니다. 하지만 발급 순서 사이에 박자 간격을 비워 두면 이름이 없는 유령 권한이 생깁니다.”
문턱 밖에서 복도를 감시하던 에드릭이 손가락을 굽혔다. 손끝에서 피어난 작은 불꽃이 밤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름이 없는 권한이라니.”
“첫 박자로 대장의 봉인을 뚫고 둘째 박자로 발급 날짜를 늦춥니다. 셋째 박자가 들어올 자리를 비워 두면 인장은 발급되었지만 주인이 기록되지 않은 빈칸이 남습니다.”
하진은 손을 뻗어 정비 인장 대장의 네 번째 권을 가리켰다.
엘레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선반을 훑었다. 지휘봉 끝의 푸른 공명석이 통로 전체를 감싸는 얇은 막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빈칸을 이용해 원본 악보의 봉인까지 은선을 연결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제라드는 제4권을 끌어당겨 탁자 위에 폈다. 양피지 위에는 수십 년 동안 발급된 시설 정비 인장의 번호와 소유자의 서명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먹물은 정갈했고 어디에도 긁어낸 흔적은 없었다.
제라드가 대장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눈으로 보는 서류에는 단 한 줄의 누락도 없다.”
“소리로 들으면 다릅니다.”
하진은 품에서 푸른 악보지 한 장을 꺼냈다. 마력을 주입하지 않은 손가락이 양피지 테두리를 따라 움직였다. 대기 에테르가 종이 위로 모여들며 미세한 진동을 만들었다.
하진이 <평균율 마법 공명 공식>의 기초 보정 기호를 대장 중앙에 살포시 얹었다.
지잉.
정갈하게 적힌 서류 위에서 희미한 은빛 파동이 솟아올랐다. 글씨 자체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4페이지와 5페이지 사이의 여백에서 낮은 음형이 비틀렸다.
짧고 낮은 저음. 반 박자 뒤늦은 두 번째 음.
그리고 세 번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루카스가 침을 삼키며 청동 고리를 꼭 쥐었다.
“진짜로 글자 사이에 소리가 숨어 있어.”
“3년 전 기록이다.”
제라드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집어낸 문양은 긁혀서 지워진 것이 아니라 3년 전 폐기 처리된 고위 연구관의 서명 위에 얇게 겹쳐진 인장이었다.
“폐기된 인장의 서명을 바탕으로 빈 박자를 얹었다. 겉으로는 정상적인 폐기 기록으로 보이지만 에테르 주파수를 흘려 넣으면 정비 인장 권한이 튀어나오도록 설계되어 있군.”
제라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스쳤다. 아카데미의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관리 기록이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누가 이런 공작을 벌였는지 추적할 수 있겠나?”
“발신자는 이 기록이 읽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진의 말이 끝난 순간 대장 중앙의 기록석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쿵!
지하 저장고와 열람고에서 들었던 낯선 박자가 이번에는 기록실 전체를 흔들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검은 박자였다.
기록석 주위의 은선이 검은 가루로 부서지며 대장 표면을 삼키려 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자멸 작동이었다.
“기록이 탄다!”
루카스가 비명을 질렀다.
제라드가 즉시 상임위원 인장을 눌러 마력을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진이 제라드의 팔을 가볍게 막아섰다.
“마력을 밀어 넣으면 오염된 박자가 교수님의 마력핵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럼 이 증거를 그냥 태우라는 말이냐?”
“부수지 않고 흐름을 바꿉니다.”
하진은 에드릭을 돌아봤다.
“첫 박자를 눌러 주세요.”
문가의 에드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이 바닥의 은선을 따라 달려들어 검은 박자의 첫 강박을 꽉 조였다.
“오래 못 잡는다!”
“둘째 박자가 오기 전에 끝냅니다.”
하진은 악보지 위에 <거울 성부>의 교차 선율을 빠르게 그렸다. 1도와 5도 중심의 현지 마법 구조가 아닌 바흐식 대위법과 3도·6도 이중 보조 성부였다.
체내 마력이 없는 하진의 손끝에서 대기 중의 에테르가 악보지 기호를 따라 격렬하게 진동했다. 마력을 억지로 밀어 넣는 방식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화성학적 수치에 끌려온 에테르 파동이 검은 박자의 억센 불협화음을 감쌌다.
엘레나가 지휘봉을 번쩍 들었다.
“성부 분산, 내가 잇는다!”
푸른 공명막이 세 갈래로 갈라지며 하진이 그린 보조 성부를 받쳐 주었다.
검은 박자는 기록석을 파괴하려 강하게 솟구쳤지만 하진이 만든 3도와 6도의 수평 회로에 걸려 강제로 흐름이 분산되었다. 뾰족하던 하강 선율이 평탄한 음선으로 풀어졌다.
마지막 검은 가루가 루카스가 쥔 청동 고리로 흘러 들어가며 스르륵 소멸했다.
기록석이 본래의 투명한 푸른빛을 되찾았다. 양피지 대장 위의 유령 문양은 파괴되지 않고 완벽한 은색 인장 형태로 고정되었다.
하진의 눈앞에 투명한 시스템 알림창이 솟아올랐다.
[불협화음의 발신자를 찾아라]
[진행도: 5/5]
[퀘스트 완료: 아카데미 내 1차 침투 주파수 정화 성공]
[보상: 대기 에테르 자율 유도율 +3.2%, 고위 다성부 해석 권한 해금]
기록실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에드릭은 손끝의 불꽃을 끄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화염 선율이 하진의 정교한 박자 지연 안에서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 교수는 고정된 유령 인장과 하진의 악보를 번갈아 보았다.
“체내 마력이 단 한 점도 섞이지 않았다. 오직 대기 에테르의 화성적 공명만으로 오염된 주파수를 정화했군.”
제라드의 목소리에는 엄숙한 인정이 담겨 있었다.
“하진. 자네의 이론은 더 이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아니다. 대기 에테르 자율 유도식은 실전에서도 공명 정화에서도 완벽한 사실이다.”
제라드는 대장을 조심스럽게 덮고 상임위원 붉은 인장을 겹쳐 봉인했다.
“이 대장과 인장 조각은 학사위원회 최고 기밀 수사 건으로 내가 직접 보관한다. 그리고 자네에 대한 퇴학 처분 철회는 물론 작곡과 전용 자율 연구실 출입 권한을 공식 부여하겠다.”
루카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들었어, 하진? 자율 연구실이래! 퇴학은커녕 이제 아무도 너한테 낙제생이라고 못 불러!”
엘레나 역시 지휘봉을 내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훌륭한 연주였다, 작곡가.”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 기숙사 앞뜰에는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놓인 나무 평상 위에 하진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루카스가 방금 짠 신선한 과일 음료 두 잔을 들고 달려왔다.
“마셔라, 하진! 오늘 아침 기숙사 식당 난리 났어. 에드릭과의 듀엘론 승리 소문도 모자라서 제라드 교수님이 너한테 자율 연구실 열쇠까지 줬다는 소식이 퍼졌거든!”
하진은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과즙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지난 며칠 동안 루프와 퇴학 위기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비로소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구에서 유령 작곡가로 살며 밤샘과 마감에 시달리다 과로사했던 기억. 이곳에 빙의해 마력 제로라는 이유로 멸시받고 퇴학 통지서를 받았던 순간들.
모든 고비가 지나가고 마침내 자기 이름과 자기 악보로 이 아카데미에 바로 섰다.
“너 이제 안 쫓겨나는 거지?”
루카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 안 쫓겨나.”
하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나뭇잎 사이로 햇살을 받으며 누군가 평상 쪽으로 걸어왔다. 검은 나무 지휘봉을 옆구리에 찬 엘레나였다.
“평화로워 보이는군.”
“선배도 음료 한 잔 하시겠습니까?”
루카스가 컵을 들자 엘레나는 손을 저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제라드 교수님께 들었다. 자율 연구실 권한이 정식으로 발급되었다고.”
“덕분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네 악보가 없었다면 지하 저장고도 기록실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엘레나는 평상 옆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이제 낙제생 하진은 없다. 다음 달에 열릴 제국 아카데미 음악제 본선에 나갈 작곡과 대표로 네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
“음악제요?”
“그래. 단독 독주가 아니라 아카데미 전용 오케스트라 전체가 연주하는 대규모 심포니 마법 무대다. 네가 쓴 악보를 내가 지휘하고 싶다.”
엘레나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하진은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의 이름 뒤에 숨어 곡을 쓰던 작곡가가 이제 대륙 최고 아카데미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악보를 쓰게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곡을 쓰죠.”
하진이 응답하자 그의 눈앞에 환한 골드빛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신규 메인 퀘스트: 대륙의 불협화음을 정화하라]
[목표: 제국 음악제 입상 및 대륙 공명망 오염의 근원을 추적하라]
[첫 단계: 아카데미 전용 심포니 협연 악보 완성]
하진은 음료 컵을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 바람이 선율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의 악보는 아카데미를 넘어 세계의 대마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