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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9화

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9화: 잎마름병과 보르도액

새벽 안개가 유리 온실 외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이른 아침이었다.

지하 수로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른 온기 덕분에 온실 내부 토양은 여전히 섭씨 20도의 보송보송한 따스함을 지키고 있었다. 어제 수많은 마법사와 생도들의 환호 속에서 화려하게 개화했던 엘릭서 릴리 꽃들은 은은한 파란 마나 빛을 발산하며 당차게 서 있었다.

로완은 일과에 따라 수분 상태와 지온을 점검하기 위해 흙 바닥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스가 양동이에 미세 관수용 맹수를 담아 뒤따라오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완 님, 어제 학장님과 실비아 부교수님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한겨울에 영초 꽃을 피워낸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제 온실 감독관도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할 겁니다."

"방심하기엔 이르다, 한스. 환경이 따뜻하고 습하다는 건 영초뿐만 아니라 다른 미생물에게도 최적의 조건이라는 뜻이니까."

로완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온실 상단의 수평 환기창 아래쪽에 도달했을 때 로완의 걸음이 딱 멈춰 섰다.

환기창 바로 아래 조성된 시험 재배대 구획. 어제까지만 해도 싱싱한 푸른빛을 자랑하던 엘릭서 릴리 유묘의 잎 가장자리에 이상한 얼룩이 관찰되었다.

"어……? 로완 님, 이게 뭡니까?"

한스가 급히 다가와 촛불을 비추었다.

어린 잎의 표면에 핏빛처럼 붉고 짙은 갈색을 띤 원형 반점들이 징그럽게 돋아나 있었다. 반점이 형성된 부위의 조직은 마치 불에 데인 듯 물러져 있었고 손전등 마력 빛에 비춰보자 검은 곰팡이실 같은 미세한 포자 덩어리가 잎맥을 따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진균성 잎마름병(Blight)이었다.

"냉해나 지력 결핍이 아니야. 외부에서 유입된 감염성 포자가 잎 표면의 기공을 타고 침투한 거다."

로완은 굳은 얼굴로 잎을 살폈다. 잎마름병 포자는 공기 중을 떠다니다가 습도가 높고 온난한 잎 표면에 붙어 발아관을 뻗는다. 그리고 식물의 세포벽을 뚫고 들어가 영양분을 흡즙하며 조직을 썩혀 버린다.

어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온실의 75퍼센트 상대 습도와 훈훈한 지온이 외부에서 투입된 병원균 포자에게는 폭발적인 증식용 온상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로완은 머리를 들어 위쪽 환기창 프레임을 바라보았다. 삼나무 창틀 구석진 틈새에 검은 가루 흔적과 붉은 얼룩 잔여물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자연 발병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올 수 없는 밀도의 감염성 포자 가루가 어젯밤 환기창 틈으로 인위적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온실 안으로 곰팡이 포자를 뿌렸어."

"예? 누, 누가 그런 짓을……!"

한스가 놀라 양동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제국 약초 상단이나 연금술 길드겠지. 한겨울 영초 대량 재배가 성공하면 자신들의 비약 가격 통제권이 무너지니까."

로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전생의 연구원 시절에도 희귀 식물 자원이나 종자 특허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벌어지던 수작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하지만 살아 있는 영초 전체를 몰살시키기 위해 감염성 역병을 뿌리는 짓은 식물학자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바로 그 순간 온실 삼나무 문이 덜컥 열리며 거친 구두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곳이다! 마물 역병의 악취가 이 온실 안에서 풍겨 나오고 있다!"

온실 감독관이 아카데미 시설 마법사 세 명과 긴 화염 지팡이를 든 인부들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이닥쳤다. 감독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로완! 네놈이 만든 이 가짜 온실이 결국 마석의 조화를 부려 악마의 잎마름병을 불러왔구나!"

감독관이 붉은 반점이 퍼진 엘릭서 릴리 상자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원인은 명백하다! 천민 조수가 금단 주술과 오염된 흙을 써서 땅의 정령을 노엽게 한 탓이다! 당장 이 온실 전체에 화염 마석 불길을 뿜어 모조리 태워버려라!"

인부들이 화염 지팡이에 마나를 올리며 온실 중앙으로 다가섰다.

"거기 멈추십시오!"

로완이 단호하게 인부들의 앞을 막아섰다.

"불을 지르는 순간 이 온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전체 약초원이 끝장납니다!"

"뭐라? 궤변을 그만치지 못할까! 역병이 퍼진 화분을 불태우는 것은 연금술 학회의 오래된 수칙이다!"

감독관이 삿대질을 하자 로완이 냉정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당신들이 쓰는 화염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열풍은 온실 내부의 상승 기류를 일으킵니다. 열풍에 떠오른 진균 포자 가루가 환기창 바깥으로 뿜어져 나가 아카데미 전체 후원과 수호 신목 정원으로 사방팔방 날아갈 겁니다! 당신은 역병을 소각하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 전체에 잎마름병을 흩뿌리려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감독관이 당황하여 주춤거릴 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로완 조수의 말이 맞습니다."

펠릭스 시엘버그와 실비아 폰 시엘 부교수가 잇달아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실비아 부교수의 손에는 섬세하게 빛나는 룬 감측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실비아는 환기창 아래쪽에 다가가 룬 도구를 대어본 뒤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 포자 가루는 토양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환기창 틀에 짙은 붉은색 잔여물과 외래 마나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어젯밤 외부에서 약초 마름병 병원균을 룬 병에 담아 환기창 안으로 흘려 넣은 흔적입니다."

"외, 외부의 투입이라고요?"

펠릭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제국 약초 상단 놈들인가! 우리 가문의 유통망 확장을 저지하려고 이런 비열한 수작을 부리다니!"

실비아 부교수가 감독관을 차갑게 노려보며 명령했다.

"감독관은 화염 인부들을 데리고 즉시 물러나세요. 고의적인 감염병 투입 정황이 확인된 이상 학회 규정에 따라 이 구획은 식물학 부교수인 제 관할하에 응급 치료를 진행합니다."

감독관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를 갈았지만 부교수의 권한과 외부 테러 증거 앞에서는 더 이상 소각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온실 밖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붉은 반점은 빠른 속도로 인접한 엘릭서 릴리 잎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교수님, 정화 주술로 잎을 씻어낼 수는 없습니까?"

펠릭스가 초조하게 묻자 실비아 부교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화 주술은 외부에 노출된 독소는 씻어내지만 이미 잎 세포벽 내부로 침투하여 표피 속에 파고든 진균 마나에는 정밀하게 작용하지 못합니다. 과도한 정화 마나를 쏘이면 어린 싹의 도관이 먼저 파괴되어 버립니다."

"정화 주술이나 불길로는 잡을 수 없습니다."

로완이 재배소 구석의 약재 창고로 걸어가며 말했다.

"필요한 건 물리적 격리와 포자의 발아를 막는 보호 살균제입니다."

"보호 살균제?"

실비아 부교수와 펠릭스가 로완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로완은 먼저 가위 끝을 불로 살균한 뒤 감염 반점이 심하게 진행되어 이미 짓무른 잎들을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잘라낸 병반 잎들은 밀봉된 도자기 항아리에 담고 유황 가루를 뿌려 내부에서 완벽히 밀폐시켰다.

"이미 균사가 세포 속 깊이 파고든 조직은 살릴 수 없습니다. 환부를 도려내어 2차 포자 형성을 막아야 합니다."

이어 로완은 창고 선반에서 두 가지 재료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연금술 학부에서 정제 부산물로 버리던 푸른 결정체인 구리 원석 가루였고 다른 하나는 흙의 산도 보정을 위해 가져다 놓았던 흰 석회 가루였다.

"구리 원석 가루와 석회 가루라니…… 그건 금속 독성과 강한 알칼리 성분이 아니냐?"

펠릭스가 눈을 넓혔다.

"구리 이온을 직접 식물에 부으면 세포가 사멸하지만 석회 가루를 적정한 비율로 섞어 수용액을 만들면 독성이 중화되면서 알칼리성 유효 성분이 잔류합니다."

로완이 미세 저울로 구리 가루 1대 석회 가루 1의 비율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미지근한 물에 넣고 저었다.

용액이 섞이자 맑던 물이 영롱하고 우윳빛이 감도는 짙은 파란색 현탁액으로 변해갔다. 전생 식물학에서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검증된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천연 보호 살균제, '보르도액(Bordeaux mixture)'이었다.

"이 구리-석회 현탁액을 잎 표면에 아주 미세하게 살포하면 석회가 잎 표면에 불용성 수막 보호층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안의 미량 구리 이온이 나중에 날아드는 포자의 발아관 성장을 완벽하게 차단하죠. 식물 자체에는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곰팡이 포자만 화학적으로 도륙하는 원리입니다."

로완은 분무용 대지 룬 노즐을 장착한 수동 분무기에 푸른 보르도액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감염 구획 주변의 싱싱한 엘릭서 릴리 잎들과 줄기 전체에 푸른 미세 안개를 균일하게 살포하기 시작했다.

푸른 이슬방울이 잎표면에 살포되자 잎 위에 고여 있던 검은 포자 먼지들이 구리 이온의 화학적 반응을 견디지 못하고 투명하게 분해되어 스러졌다. 석회 성분이 건조되면서 잎 표면에 얇고 영롱한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점심 무렵이 되자 온실 안의 상황은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붉은 반점이 새로운 잎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이미 살포된 구리-석회 보호막 덕분에 포자의 기공 침투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었다. 이미 상처를 잘라내고 보르도액을 맞은 엘릭서 릴리 유묘들은 단단한 푸른빛을 유지하며 다시 건강하게 마나를 뿜기 시작했다.

"놀랍군요……."

실비아 부교수가 룬 감측기로 잎 표면을 살펴본 뒤 탄성을 터뜨렸다.

"포자의 마나 반응이 완전히 사멸했습니다. 강한 정화 주술이나 불길 없이 단지 두 가지 일반 광물 수용액만으로 역병의 발아를 완전히 억제하다니! 이건 마법 학회에 발표되어야 할 위대한 식물 방제 기술입니다!"

펠릭스 역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로완의 어깨를 툭 쳤다.

"로완, 네 덕분에 가문의 명예와 이 귀한 영초들이 살아났다. 환기창에서 수거한 붉은 얼룩 병 잔여물은 내가 시엘버그 상단망을 통해 수도의 거래 장부를 전부 뒤져 배후를 밝혀내겠다."

"감사합니다, 펠릭스 생도님."

로완은 온실의 환기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흙과 온도를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요. 온실 환기창에는 공기를 정화하는 숯 필터와 병충해를 퇴치하는 향기 식물 장벽을 함께 갖춰야 합니다."

외부의 방해 공작은 로완에게 위기였지만 동시에 특허 약초 재배소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로완은 푸른 보르도액 보호막 아래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엘릭서 릴리를 보며 다가올 길드와의 전쟁에 대비해 새로운 생체 방어 시스템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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