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7화: 엘릭서 릴리의 종자 휴면
특허 약초 재배소의 굳은 흙 위로 둔탁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한스가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배수로 바닥에 가라앉은 마른 진흙 덩어리를 퍼냈다. 수로 끝에 쌓여 있던 자갈과 나뭇잎을 걷어내자 마침내 막혀 있던 수로를 따라 맑은 물이 웅덩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배수로 바닥이 드러났어요.”
한스가 밝아진 얼굴로 흙투성이 삽을 들었다.
“배수구만 열렸는데도 땅에서 나던 축축한 오물 냄새가 싹 가셨네요.”
“이제야 겨우 흙이 가빠진 숨을 쉬는 거야.”
로완은 고랑 사이를 걸으며 흙의 감촉을 손 끝으로 살폈다. 표면은 말라붙어 있었지만 한 마디 깊이 아래의 흙은 뭉쳐지지 않고 보송보송하게 부서졌다. 땅 밑으로 공기가 통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때 재배소 입구의 삐걱거리는 울타리 문이 열렸다.
단정한 귀족 실습복을 입은 펠릭스 시엘버그와 그 뒤를 따르는 붉은 로브 차림의 청년이 걸어왔다. 청년의 가슴에는 연금술 학부 수석 조수를 상징하는 은색 플라스크 휘장이 붙어 있었다.
펠릭스의 표정은 평소처럼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붉은 융단이 깔린 조그만 궤를 품에 꽉 안고 있었다.
“로완.”
펠릭스가 묘목장 한가운데 멈춰 서서 가늘게 떤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장님이 네게 독립 재배 결권을 주셨다고 들었다.”
“보시다시피 여전히 배수로나 파고 있습니다만.”
로완이 삽을 흙에 꽂으며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펠릭스의 옆에 선 연금술 조수 마르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폐묘목장의 엉망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펠릭스 생도. 이런 오물 냄새나는 흙구덩이에 모시는 씨앗을 맡기겠다는 겁니까? 이곳의 조수는 연금술 기초 기구조차 만져보지 못한 천민입니다.”
“입 닫아라, 마르크.”
펠릭스가 낮게 날을 세우며 궤를 열었다.
궤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짙은 은빛 씨앗 백 개가 정갈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겉면은 굳은 도자기나 금속 조각처럼 미끈거렸지만 여러 개는 겉껍질이 검게 마르고 매캐한 산폐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엘릭서 릴리의 종자다.”
펠릭스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연금술 학부 졸업 심사용 상급 치료 포션의 핵심 원료지. 이걸 싹터게 만들어 묘목으로 기르는 것이 이번 내 실습 과제다.”
“그런데 싹이 트지 않는군요.”
로완이 씨앗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예년 발아율은 5% 미만입니다.”
마르크가 턱을 쳐들며 끼어들었다.
“최고급 마나 성수를 매일 부어주고 정화 룬 온상실에서 한 달을 묵혀도 백 개 중 겨우 서너 개가 싹을 틔울까 말까 한 신성한 영초다. 그런데 이번 펠릭스 생도의 종자는 시약 제조소에서 온 성수를 부었는데도 사흘 만에 절반이 검게 썩어버렸다.”
펠릭스의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이번 과제마저 낙제하면 가문의 지원금이 끊기고 졸업이 1년 미뤄질 처지였다.
“감독관은 마나 성수가 부족해서 균형이 무너졌다고만 한다. 마력 성수를 더 사 오려면 가문 전답 한 뙈기 가격이 들어가.”
펠릭스가 로완의 눈을 직시했다.
“네가 썬 플라워를 살리고 신목의 뿌리를 읽어낸 것을 보았다. 이 씨앗을 살려낼 수 있겠나?”
로완은 집어 든 씨앗을 코끝에 가져갔다. 마력 성수의 달콤한 향 뒤로 축축하게 부패한 냄새가 짙게 베어 있었다.
“마나를 더 붓는 건 시체에 비단 옷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로완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씨앗들이 죽어가는 건 마나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마르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라고? 마나 성수 없이 영초의 씨앗이 어떻게 발아한단 말이냐!”
“잘못된 질문입니다.”
로완이 작업대 위로 걸어가 작고 날카로운 메스를 집어 들었다.
“질문해야 할 것은 왜 성수를 부을수록 씨앗이 썩느냐입니다.”
로완은 검게 변한 엘릭서 릴리 종자 하나를 작업대 위에 놓고 메스 날로 가볍게 내리쳤다.
깡.
쇳소리에 가까운 투박한 소리가 났다. 메스 끝이 미끄러질 정도로 씨앗의 겉껍질은 단단했다. 로완이 룬 메스 끝에 약간의 힘을 주어 껍질을 절반으로 갈라 보였다.
씨앗의 단면이 드러났다. 겉껍질은 굵은 밀초와 도자기 층처럼 두껍고 딱딱하게 단단해져 있었고 내부의 배는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채 찌그러져 있었다.
“보하십시오.”
로완이 껍질 단면을 가리켰다.
“이 씨앗의 겉껍질은 왁스 층과 딱딱한 종피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습니다. 물과 산소가 안으로 들어갈 구멍이 전혀 없어요.”
“그, 그러니까 마나 성수를 부어서 껍질을 녹여야 하는 것 아닌가!”
마르크가 반박했다.
“녹는 것이 아니라 겉만 썩는 겁니다.”
로완은 말짱해 보이는 다른 은빛 씨앗 하나를 껍질만 살짝 긁어 제시했다.
“야생에서 엘릭서 릴리는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바위산의 추운 겨울과 거친 모래바람을 견뎌냅니다. 그 강한 수면 상태를 물리적 휴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껍질이 물을 흡수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농도 마나 성수에 씨앗을 한 달 동안 빠뜨려 두었습니다.”
로완이 찌그러진 배를 메스 끝으로 짚었다.
“산소가 통하지 않으니 안쪽의 배는 숨을 못 쉬어 질식하고 바깥은 마나 성수의 과도한 농도 때문에 삼투압이 붕괴되어 겉껍질부터 썩어 들어간 겁니다. 씨앗을 살린 게 아니라 수중 고문을 한 셈이죠.”
펠릭스가 입을 벌린 채 단면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종피 내부의 배는 마나 성수를 단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 채 말라죽어 있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펠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휴면을 깨뜨려야 합니다.”
로완이 한스에게 손짓했다.
“한스. 재배소 뒤편에서 가장 굵고 거친 모래와 마른 참숯 가루를 가져와.”
“예!”
한스가 신속하게 묘목장 구석으로 달려갔다. 마르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완을 막아섰다.
“모래와 숯가루라니? 영초의 씨앗은 아카데미 중앙 온상실의 순백 비단 위에서 마나 정화 주술을 받아야 한다!”
“비단 위에서는 씨앗 껍질이 긁히지 않니까요.”
로완이 둔탁한 토기 대야에 굵은 화강암 모래를 쏟아부었다.
그는 펠릭스가 가져온 100개의 종자 중 아직 썩지 않은 80여 개의 씨앗을 모래 대야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모래와 씨앗을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거친 마찰음이 온상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르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신성한 종피에 상처를 내다니! 마나의 균형이 파괴된다!”
“상처를 내야 숨을 핍니다.”
로완이 손을 털고 씨앗 하나를 들어 올렸다.
매끄럽던 은빛 표면에 미세하고 미세한 흠집들이 빽빽하게 긁혀 있었다. 종자 내부의 배에는 손상이 가지 않도록 겉껍질의 왁스 층과 딱딱한 외종피만 정밀하게 마모시킨 상태였다.
“이것이 종자 휴면 타파(Scarification)입니다. 강제로 마나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 스스로 물과 산소를 마실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겁니다.”
로완은 긁어낸 씨앗들을 차가운 흙과 모래를 섞은 부엽토 상자에 묻었다.
“그리고 야생의 겨울을 흉내 냅니다. 사흘 동안 그늘진 서늘한 곳에 두어 씨앗 내부의 성장 호르몬을 깨울 겁니다. 마지막으로 마나 성수가 아니라 깨끗한 우물물에 마나를 20분의 1로 희석한 물을 뿌립니다.”
“희석한 물이라고?”
펠릭스가 물었다.
“농도가 너무 높으면 삼투압 때문에 새로 터져 나오는 어린 세포가 마르고 맙니다. 아주 옅은 농도의 마나라야 뿌리가 마실 수 있습니다.”
로완은 덮개 천을 상자 위에 덮고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이틀 뒤 새벽에 오십시오.”
이틀 뒤 새벽, 푸르스름한 안개가 특허 약초 재배소 주위를 감쌌다.
펠릭스는 잠을 한 스무 분도 못 잔 퀭한 눈으로 마르크와 함께 묘목장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은 둔탁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로완은 작업대 위에 얹어둔 토기 상자의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말도 안 돼….”
마르크의 입에서 기다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상자 안의 검은 모래 흙을 뚫고 은백색의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파란빛을 머금은 연두색 싹들이 빽빽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싹 밑으로는 눈처럼 깨끗한 흰 뿌리들이 흙 속으로 깊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상자 안에 묻었던 82개의 씨앗 중 무려 78개에서 선명한 마나 싹이 터져 나와 있었다. 발아율 95%에 달하는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펠릭스는 손을 떨며 싹 하나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마나 성수를 쏟아부었을 때는 검게 부패하던 종자가 고작 모래에 긁히고 서늘한 흙에 묻혔을 뿐인데 터질 듯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발아했다…. 백 개 중 여든 개 가까지 싹이 틔었어!”
펠릭스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이 정도 순도와 발아량이면 연금술 학부 수석 판정은 물론이고 시엘버그 가문의 약초 공급망에서도 독점적인 권리를 얻을 수 있다!”
마르크는 넋이 나간 채 싹터 나온 엘릭서 릴리를 바라보다 로완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마나 주입만을 전능하다고 믿었던 연금술 학부의 자존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표정이었다.
그때 차가운 산바람이 묘목장의 깨진 유리창 사이로 세차게 불어 들었다.
갓 돋아난 엘릭서 릴리의 파란 싹들이 서리를 맞은 듯 가늘게 떨렸다. 로완은 싹 끝에 맺힌 차가운 이슬방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로완? 무슨 문제라도 있나?”
펠릭스가 물었다.
“싹은 틔웠지만 이 묘목들은 추위에 극도로 약합니다.”
로완이 서늘해진 바람의 온도에 손을 올려 보았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어요. 첫서리가 내리면 이 여린 싹들은 하룻밤 사이에 모두 동사할 겁니다.”
한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겨울이 오고 있네요. 이 상태로 노지에 두면 엘릭서 릴리뿐만 아니라 다른 영초들도 다 죽을 텐데요.”
로완은 깨진 유리창 밖으로 아카데미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리로 벽을 세우고 땅 밑에 온열 룬을 깔아야 해. 겨울에도 꽃을 피울 집을 만드는 거다.”
특허 약초 재배소의 첫 과제가 성공하는 순간 로완의 눈은 이미 다가올 한파와 두 번째 시련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