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6화: 학장의 제안과 특허 약초 재배소
수호 신목의 잎 한 장이 아침빛을 받아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검게 오그라들었던 가장자리에 엷은 녹빛이 돌아와 있었다. 눈을 떼고 다시 보면 착각이라 여길 만큼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로완은 잎맥을 따라 올라가는 은빛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로완은 접종 구획에 덮어 둔 천을 들었다. 부엽토 아래의 마른 모래는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졌고 그 밑의 흙은 축축하되 질척이지 않았다. 은빛 잔뿌리 몇 가닥이 흰 균사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기가 내려갔네.”
한스가 옆에 쪼그려 앉아 낮게 말했다.
“어제보다 손에 덜 붙어요.”
“아직 방심하면 안 돼.”
로완은 잔뿌리 가까이 손을 대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균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거야. 뿌리가 다시 숨을 쉬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
정원 입구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를 따라 회색 로브를 입은 교수 셋과 온실 감독관이 들어왔다. 맨 뒤에는 에르단이 수정판을 든 관리 마법사 둘을 데리고 있었다.
온실 감독관은 천을 걷은 자리를 보자마자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군요. 부교수님의 정화 주술이 결국 신목을 되돌린 모양입니다.”
한스의 어깨가 굳었다. 로완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반대편 뿌리 구획을 가리켰다.
그곳도 정원 안에 있었다. 같은 외곽 수호진이 둘러졌지만 돌바닥 아래의 물길을 열지 않았고 균사를 붙이지도 않은 구획이었다.
흙은 여전히 검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가락 굵기의 뿌리 아래에는 잿빛으로 물러진 가는 뿌리가 엉켜 있었다.
“정화 주술이 원인이면 여기도 같은 속도로 나아져야 합니다.”
로완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물이 빠지지 않았고 살아 있는 뿌리도 균근과 닿지 못했어요.”
감독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무의 상태를 구획 둘로 재단하겠다는 건가? 신목은 하나다.”
“그래서 같은 나무 안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로완은 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스가 준비해 둔 수분침과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처치한 곳과 하지 않은 곳의 수분을 같은 깊이에서 재고 뿌리 색을 확인하죠. 북쪽 결계의 진폭도 같은 시간에 봐 주세요.”
실비아는 잠시 로완을 바라보다 수정판을 에르단 쪽으로 밀었다.
“공개적으로 확인하지.”
에르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분침을 받아 들었다. 그는 먼저 미처치 구획의 흙에 침을 꽂았다. 푸른 눈금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 붉은 선에 닿았다.
“과습.”
그가 짧게 말했다.
다음에는 접종 구획을 쟀다. 눈금은 중간에서 멈췄다. 흙을 살짝 걷어 내자 검은 잔뿌리 사이로 은빛을 되찾은 가는 뿌리가 보였다. 그 표면에는 흰 균사가 가는 망처럼 붙어 있었다.
교수 하나가 몸을 숙였다.
“균사가 뿌리를 침식한 흔적은 없군.”
“공생자입니다. 물이 고인 흙에서는 뿌리도 균사도 숨을 못 쉬니까 먼저 물길을 열어야 했고요.”
감독관은 끝까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 정도 차이는 부교수님의 주술이 뿌리에 더 잘 닿은 탓일 수도 있지.”
실비아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내 주술은 정원 외곽에만 머물렀다. 신목 아래로 정화 마나를 흘려 넣지 않았어.”
사람들의 시선이 에르단에게 모였다.
그는 잠시 수정판의 은빛 파문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결계석과 정화 주술의 안전을 먼저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판은 전날보다 고른 빛을 내고 있었다.
“사실이다.”
에르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외곽 수호진만 유지했다. 이 구획에는 추가 정화가 들어가지 않았다.”
북쪽 탑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렸다. 수정판 위의 빛이 가늘게 흔들렸으나 곧 가라앉았다.
“진폭도 줄었다. 아직 안전 선언을 할 수는 없지만 어제보다 낫다.”
실비아는 정원 바깥에서 기다리던 노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학장님. 직접 보셨습니다.”
알버스 듀란은 지팡이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희끗한 눈썹 아래의 눈은 신목보다도 로완의 손과 발밑의 흙을 먼저 살폈다.
“보고를 들었을 때는 과장인 줄 알았다.”
학장이 말했다.
“뿌리 썩음을 막으려고 물길을 바꾸고 균사를 붙였다더군.”
“과장은 아닙니다.”
로완은 대답했다.
“다만 아직 치료가 끝난 건 아닙니다. 접종한 구획 하나가 버티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이 상태를 며칠 지켜보고 다른 뿌리로 넓혀야 합니다.”
알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급한 승리를 말하지 않는 대답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 순서와 기준은 남겨 두었나?”
로완은 한스가 품에 안고 있던 장부를 받았다. 썩은 뿌리를 도려낸 위치와 시간, 모래와 숯가루를 섞은 비율, 물이 빠지는 속도, 균사 접종 범위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북쪽 결계가 크게 흔들릴 때 어떤 조치를 멈춰야 하는지도 따로 표시돼 있었다.
“같은 병증이면 같은 순서로 시작할 수 있게 적었습니다. 흙의 상태가 다르면 멈추는 기준도 같이요.”
온실 감독관이 끼어들었다.
“그 장부는 약초식물원의 관리 기록으로 편입하면 됩니다. 현장 지휘는 제 아래에서—”
“안 됩니다.”
로완의 말이 감독관의 목소리를 잘랐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스는 놀란 얼굴로 로완을 봤다. 감독관의 얼굴에는 곧바로 붉은 기가 올랐다.
“뭐라고 했지?”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하지만 처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휘하면 같은 일이 반복돼요.”
로완은 감독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물을 빼야 할 때 마나를 넣고 죽은 뿌리를 걷어내야 할 때 기다리라고 하면 치료가 아닙니다.”
감독관의 손이 허리의 지팡이로 향했다. 그러나 알버스가 그보다 먼저 지팡이 끝으로 돌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감독관.”
낮은 목소리였지만 정원 전체가 멈춘 듯했다.
“수호 신목을 베는 편이 안전하다고 주장한 사람이 누구였지?”
감독관의 입술이 굳었다.
“결계 안전을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결과로 판단하겠다.”
알버스는 로완의 장부를 넘겼다.
“아카데미 약초식물원은 매년 고사한 영초를 메우느라 적지 않은 돈을 버린다. 약초는 모자라고 연금술 실습은 줄어든다. 결계가 흔들릴 때마다 신목에 귀한 마나석을 쏟아붓는 것도 오래 갈 일은 아니지.”
그의 시선이 로완에게 돌아왔다.
“네 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재현할 수 있나?”
“식물이 다르니 처방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로완은 장부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그래도 관찰하고 기록하고 비교하는 방식은 같습니다. 흙과 물길과 뿌리부터 확인하면 됩니다.”
“좋다.”
알버스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방법을 시험할 곳이 필요하겠군.”
학장실의 창문 밖으로 수호 신목의 은빛 잎이 보였다. 로완은 젖은 조수복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실비아와 한스, 감독관 앞에 섰다. 책상 위에는 신목 치료 장부와 정원 도관 출입 기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알버스는 지도 한 장을 펼쳤다. 약초식물원 서쪽 끝에 길게 비어 있는 구획이 붉은 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폐묘목장이다. 예전에는 약초 묘목을 길렀지만 세 번 연속 뿌리 병이 번진 뒤 닫아 두었지.”
한스가 작은 소리로 숨을 삼켰다. 온실 감독관이 손대지 않는 땅이었다.
“그곳을 독립 재배소로 쓰게 해 주마.”
감독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장님. 약초식물원 안의 시설을 말단 조수에게 독립적으로 맡기시는 겁니까?”
“말단 조수가 수호 신목을 살릴 방법을 찾아냈다.”
알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독립적이라는 말은 제멋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다. 처방과 결과를 남기고 아카데미가 검증한다. 성공하면 그 방법을 아카데미의 특허 재배법으로 보호한다.”
로완은 지도를 보며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감독관의 명령 한마디에 물길이 막히고 기록이 사라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알버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말해 보아라.”
“재배소에 들이는 흙과 재료의 출입 장부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배수와 토양 처방은 제 책임 아래 결정하고요. 결과가 나면 정화 주술이나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바꾸지 말고 처방 기록 그대로 남겨 주세요.”
감독관이 비웃듯 숨을 내쉬었다.
“조수가 요구만 많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로완은 한스를 봤다. 한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스를 정식 조수로 배치해 주세요. 혼자서는 기록도 재배도 지킬 수 없습니다. 한스는 물길을 읽고 흙을 다루는 법을 이미 배웠습니다.”
한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알버스는 한스를 한 번 훑어봤다. 한스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저, 저는 시키는 일은 잘합니다. 아니, 그냥 시키는 것만 하진 않겠습니다. 배울 겁니다.”
실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신목의 물길을 우회할 때도 손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현장 조수로 적합해요.”
알버스는 펜을 들어 지도 아래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특허 약초 재배소. 현장 책임자 로완. 정식 조수 한스. 재료와 처방 기록은 학장 직속 보관.”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되겠나?”
로완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충분합니다.”
폐묘목장은 오후 햇빛을 받고도 축축한 냄새가 났다.
썩은 목재로 엮은 울타리는 한쪽이 무너져 있었고 유리창 몇 장은 깨진 채였다. 바닥을 덮은 흙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로완이 삽날을 꽂자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 들어갔다.
한스는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엉망인데.”
“좋은 일이야.”
“이게?”
“문제가 눈에 보이잖아.”
로완은 부서진 수로 쪽으로 걸었다. 수로 바닥에는 마른 진흙이 두껍게 굳어 있었고 배수구는 낙엽과 자갈로 막혀 있었다. 흙 위에는 이끼가 누렇게 죽어 붙어 있었다.
“먼저 물길을 열고 흙을 부숴야 해. 그다음에야 씨앗을 받을 수 있어.”
“첫날부터 배수로구나.”
“식물은 늘 뿌리부터 시작하니까.”
그때 실비아가 묘목장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종이 묶음이 들려 있었다.
“정화 도관 출입 기록이다.”
로완은 흙 묻은 손을 털고 종이를 받았다. 기록에는 도관을 청소한 관리 마법사의 이름과 시간, 사용한 푸른 염료의 양이 적혀 있었다. 은색 가루가 발견되기 전날 밤에도 한 번의 출입이 있었다.
그 줄의 날짜와 시간은 멀쩡했다.
그러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칼날로 긁어 낸 듯 하얗게 비어 있었다.
한스가 숨을 죽였다.
“누가 지운 거야?”
“아직 몰라.”
로완은 종이의 거친 빈칸을 엄지로 문질렀다.
“하지만 기록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도관 가까이에 있었겠지.”
실비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원본 장부는 봉인해 두었다. 더는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
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목 정원의 물길은 바로잡았지만 누군가는 그 물길을 망가뜨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폐묘목장 한가운데로 가서 삽을 땅에 꽂았다.
굳은 흙 위에 깊지 않은 자국 하나가 남았다.
“한스.”
“응.”
“오늘은 배수구부터 비우자.”
한스가 옆에 서서 삽날을 땅에 박았다.
두 사람의 첫 삽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흙 아래에 잠들어 있던 물길이 아직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 길을 지킬 장부와 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