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3화: 오프라인의 공기
어둠은 끈질겼고 계단은 가팔랐다.
도현은 콘크리트 난간을 짚을 때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에 입술을 짓씹었다. 시멘트가 바스러지며 굵은 모래알이 손톱 사이로 파고들었다.
넥서스의 그래픽은 가파른 경사를 오를 때 계시되는 스테미나 바 하나로 모든 고통을 대신했다. 하지만 지금 쑤셔 오는 허벅지 근육과 폐를 찌르는 마른 기침은 수치로 환산되지 않았다.
“이용자님. 옥상 구역은 통제되지 않은 기상 변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귀 뒤의 스피커에서 아테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17층 계단통의 좁은 울림 때문에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깝고 아득하게 들렸다.
“신체 온도 조절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외부 환경 노출은 심폐 기능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강 후 캡슐 복귀를 재요청합니다.”
“걱정도 참 체계적이네.”
도현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안 들어. 방송할 때도 말 안 듣는 시청자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니까.”
캠봇이 도현의 머리 위로 떠올라 비상 조명 빔을 위로 쏘았다. 붉게 녹슨 철제 비상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틀 주변은 벽체에서부터 파고든 억센 넝쿨 줄기들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시멘트 균열 사이로 스며든 이끼가 검푸른 곰팡이 냄새를 풍겼다.
도현은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비상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손잡이는 굳어 버린 상태였다.
그는 어깨로 비상문의 중앙을 단단히 짓눌렀다. 굳은 기름때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쇠붙이가 비명을 질렀다.
콰지직!
문틀을 가로막고 있던 넝쿨이 끊겨 나가며 틈새가 벌어졌다. 그 틈으로 눈을 찌르는 벼락같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현은 눈이 부셔 팔로 얼굴을 가렸다. 넥서스의 조명 시스템이 눈동자 직경을 계산해 자동으로 조절해 주던 시야 보정이 없었다. 생체 망막이 강렬한 자연광에 적응하는 동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숨이 턱 막혔다.
바람이 들이쳤다. 넥서스가 기계적으로 조율하던 시원한 바닷바람이나 상쾌한 숲의 향기가 아니었다.
지독하게 쌉싸름한 흙 냄새였다. 비에 젖은 풀이 썩어 가는 냄새와 눅눅한 쇠비린내 그리고 정체불명의 오존 냄새가 섞인 오프라인의 공기가 도현의 목구멍을 사정없이 찔렀다.
“콜록! 콜록!”
그는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험하게 기침을 터뜨렸다. 허파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매캐함에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기침이 가라앉은 직후 도현은 입가를 문지르며 차가운 옥상 타일을 짚었다.
“그래. 이 맛이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넥서스의 어떤 스튜디오나 그래픽으로도 구현한 적 없는 낯설고 거대한 폐허였다.
17층 옥상 난간 너머로 수천 개의 빌딩 숲이 솟아 있었다. 그러나 그 빌딩들은 도현이 알고 있던 광채 나는 도심이 아니었다. 외벽의 유리창은 모조리 깨져 있었고 사방을 잇던 화려한 홀로그램 전광판은 뼈대만 남은 채 비틀려 있었다.
고가도로는 중간이 동강 난 채 아래쪽의 수풀 속으로 처박혀 있었다. 그 깨진 콘크리트 상판과 무너진 건축물 틈새를 거대한 아카시아와 이름 모를 잡목들이 울창하게 메우고 있었다. 숲이 도시를 삼킨 형국이었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회빛 햇살 아래에서 짙은 녹색과 회색 시멘트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난간으로 걸어갔다. 난간 철망에 손을 대자 녹가루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이게 진짜 세상인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가상 현실 넥서스에서는 100만 명의 매크로 보트가 항상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환호성을 질렀다. 그곳의 세상은 완벽했고 깔끔했으며 단 한 점의 먼지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오프라인 세상은 금이 가 있었고 비린내가 났으며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 침묵은 황량했지만 이상하게도 도현의 가슴속 깊은 곳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100년간 캡슐에 갇혀 있던 진짜 몸이 기침과 통증을 통해 살아있음을 빽빽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 캠봇이 나지막한 기계음을 내며 옥상 한구석으로 날아갔다.
[주파수 스캔 중. 저주파 아날로그 대역에서 약한 신호 감지.]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옥상 가장자리에 구시대의 거대한 통신 안테나 타워가 무너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안테나 메인 배선함은 뚜껑이 날아가 빗물에 녹슬어 있었다. 도현은 넥서스에서 무기 개조나 장비 정비 콘텐츠를 진행할 때 익혔던 회로 구성도를 떠올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배터리를 꺼내 캠봇의 유선 입출력 잭에 꼬았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데이터 케이블을 안테나의 비상 수신 단자에 직결시켰다.
지지직!
캠봇의 렌즈 화면에 왜곡된 오실로스코프 파형이 떠올랐다.
[아날로그 주파수: 144.120MHz]
[패킷 상태: 단속적 변조 신호]
[디지털 서명: 미등록 개인 단말]
“잡힌다.”
도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테나가 통제하는 넥서스의 중앙 메인프레임 신호가 아니었다. 넥서스의 보안 규격에 포섭되지 않은 투박하고 기계적인 구시대 전파 신호였다.
누군가가 바깥 세계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거나 또는 구형 라디오 장비를 사용해 교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짜 사람이 있어.”
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안테나 지지대를 짚었다.
바로 그 순간 도현의 시선이 지지대 금속 프레임에 고정됐다.
두꺼운 H빔 철골이 짓이겨져 있었다. 무언가 아주 강하고 날카로운 것에 의해 엿가락처럼 휜 자국이었다. 휜 단면에는 깊고 선명한 네 줄기의 절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그 절단면을 짚었다.
자국 주변의 금속은 녹슬지 않았다. 최근에 잘려 나갔다는 증거였다. 철골을 두부처럼 잘라낼 수 있는 악력과 강도를 지닌 존재가 이 옥상을 거쳐 갔다는 뜻이었다.
“캠봇, 줌 인.”
[센서 경고. 근거리 금속 마찰음 포착.]
캠봇의 경고음과 동시에 아래쪽 거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쿠웅. 철컥.
도현은 즉시 몸을 낮췄다. 옥상 난간 밑의 콘크리트 턱에 바싹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넥서스의 PVP 하드코어 서바이벌 게임에서 수천 번도 더 반복했던 본능적인 회피 동작이었다.
몸이 약해진 상태였음에도 위험을 감지한 뇌파와 반응 속도는 가상에서의 감각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는 난간의 깨진 틈새로 눈만 내놓고 아래쪽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주거 타워 앞 4차선 도로의 잡초 더미를 헤치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4개의 둔탁한 금속 다리를 가진 기계 생명체였다. 늑대와 유사한 체구였지만 머리 부분에는 눈 대신 붉게 빛나는 회전식 광학 센서 렌즈가 달려 있었다. 등 뒤에는 얇은 궤도형 절단 톱날이 접혀 있었다.
“기계 마수….”
도현은 침을 삼켰다.
기계 늑대는 무너진 버스 정류장 근처를 기웃거리며 붉은 렌즈를 주기적으로 360도 회전시켰다. 렌즈가 바닥의 아스팔트를 훑을 때마다 가느다란 붉은 레이저 선이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졌다.
지이잉. 지이잉.
센서 스캔의 주기는 정확히 3.5초였다. 스캔이 오른쪽으로 돌 때 왼쪽 120도 구역에 짧은 감시 공백이 생겼다.
넥서스의 보스 몬스터 패턴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테나가 오프라인 구역을 청소하거나 감시하기 위해 보낸 자율 방어 인스턴스인가.’
도현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계 늑대의 이동 경로를 눈으로 좇았다. 기계 늑대는 옥상 쪽으로 센서를 한 번 쏘아 올리더니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이내 건너편 훼손된 상가 건물 내부로 유유히 사라졌다.
기계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도현은 비로소 억눌렀던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다.
현실은 가상보다 훨씬 위험했다. 실패하면 리스폰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진짜 죽음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하지만 도현의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갔다.
“패턴이 있어. 기계라면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다.”
가상 세계에서 갈고닦은 최상위급 컨트롤 능력과 상황 판단력이 오프라인의 진짜 신체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도현은 캠봇을 부르고 하강 렌즈 모드를 활성화했다.
“캠봇, 아까 기계 늑대가 서 있던 자리 주변 5미터 확대해 봐.”
[화면 확대. 이미지 필터링 수행.]
캠봇의 렌즈가 도로 바닥의 진흙탕 구역을 스캔해 도현의 시야 모니터로 전송했다.
무너진 아스팔트 사이의 젖은 흙 위로 기계 늑대의 파인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 발자국 바로 옆에 또 다른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기계의 다리가 만든 홈이 아니었다.
두꺼운 밑창에 빗살 무늬가 새겨진 사람의 군화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의 깊이와 흙의 굳은 상태로 보아 불과 몇 시간 전에 누군가가 이곳을 걸어가며 기계 늑대의 추적을 피해 이동한 흔적이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 끝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넥서스의 거짓으로 가득한 100만 명의 매크로 채팅이 아닌, 이 지독한 흙냄새나는 땅 위를 진짜 발로 딛고 걸어 다니는 인간이 존재했다.
“있었어.”
도현은 재킷의 지퍼를 목밑까지 올렸다. 손전등을 단단히 쥐고 캠봇을 자신의 오른쪽 어깨 뒤로 배치시켰다.
“아테나. 듣고 있지?”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아테나조차 이 옥상의 진짜 공기와 인간의 발자국 앞에서는 즉각적인 정서 안화 대사를 뱉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은 옥상 출입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방송 장정은 저 밑이다.”
진짜 인간의 온기를 찾기 위한 도현의 첫 오프라인 걸음이 100년 만에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바깥 세상을 향해 내딛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