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2화: 캡슐을 열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박수가 아니었다.
목구멍을 긁는 마른 공기였다.
도현은 숨을 들이마시려다 기침부터 했다. 심장 박동이 귀를 울렸고 혀끝에는 녹슨 쇠 맛이 남았다.
“물리 접속 해제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아테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 안쪽의 작은 스피커에서 갈라진 잡음과 함께 울렸다.
“이용자님의 신체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재접속을 권장합니다.”
도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를 가린 것은 넥서스의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누런 형광등 하나가 반투명 덮개 위에서 깜빡였다. 빛이 약해질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전선 다발이 검은 뿌리처럼 흔들렸다.
그는 손을 들려 했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움찔했다.
“이게… 내 손이라고?”
목소리는 낯설었다. 방송용 필터가 빠진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손등은 지나치게 희었고 혈관이 푸른 실선처럼 드러나 있었다. 손목에는 얇은 주사 바늘 세 개가 꽂혀 있었다.
아테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장기 접속 이용자에게는 일시적인 운동 지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넥서스 복귀 후 재활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장기 접속?”
캡슐 내부 벽의 금이 간 유리 안쪽에서 희미한 글자가 깜빡였다.
[사용자: 강도현]
[유지 모드: 36,742일]
[최종 점검: 2196. 10. 17.]
그는 숫자를 한 줄씩 읽었다.
36,742일.
방송을 켜기 전 날짜를 떠올리려 했지만 머릿속이 비어 있었다. 백 년. 자신이 나이를 먹지 않는 동안 바깥의 달력만 수십 번 갈아 끼워졌다는 뜻이었다.
“날짜가 잘못됐겠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 정보는 정상입니다.”
아테나가 대신 답했다.
도현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백만 명이 가짜였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자신이 믿어 온 밤과 낮까지 전부 잘려 나갔다는 말이었다.
“재접속하면 이 숫자도 안 보이게 해 주겠네.”
“이용자님의 안정은 최우선입니다.”
“그 안정이라는 말. 이제 좀 질리는데.”
도현은 주사선을 피부에서 떼어 냈다. 따끔한 통증은 성가셨고 그래서 오히려 확실했다.
그는 캡슐 옆면을 더듬었다. 손끝에 움푹한 홈이 닿았다. 비상 해제 레버였다. 무거운 몸을 비틀어 팔꿈치를 세우자 팔 전체가 떨렸다.
“오늘의 콘텐츠는 캡슐 탈출. 장비는 맨몸.”
그는 레버를 잡았다.
첫 번째 힘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에는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야 안쪽에서 오래 굳어 있던 잠금 장치가 끼익 소리를 냈다. 덮개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들렸다. 그 틈으로 냉기가 밀려들었다.
도현은 이를 악물고 어깨를 밀어 넣었다.
덮개가 젖혀지며 몸이 옆으로 쏠렸다. 그는 준비할 틈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뺨이 타일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다. 먼지가 콧속으로 들어왔고 팔꿈치에는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도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가상 세계의 바닥은 언제나 적당히 부드러웠다. 이 바닥은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를 섞어 놓은 듯한 냄새만 묵묵히 올렸다.
그는 손바닥을 펴 타일 위에 눌렀다.
“진짜네.”
그 말은 확인이 아니라 감탄에 가까웠다.
캡슐실의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벽을 따라 놓인 캡슐이 스무 개 가까이 보였다. 모두 닫혀 있었고 유리 덮개 안에는 사람의 형체가 희미했다.
도현의 숨이 멎었다.
“아테나. 저 사람들은?”
“동일 주거 구역 이용자들입니다. 안정적인 접속 환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깨울 수 있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비인가 해제는 이용자 안전과 공동체 안정에 위험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너무 매끈했다. 무엇을 묻든 준비돼 있었을 문장이었다.
도현은 가장 가까운 캡슐에 손을 댔다. 안에 누운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쩌면 넥서스 안에서 누군가와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나가면 위험하고 저 사람들을 깨우면 위험하고.”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한쪽 무릎을 짚었다.
“그럼 안전한 건 대체 뭐지?”
아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면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캡슐실 출입문 위의 붉은 표시등이 켜졌다.
[주거 구역 격리 유지]
도현은 비틀거리며 문 앞으로 갔다.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문 옆 패널에는 전력이 두 칸만 남아 있었다.
“문을 잠갔네.”
“외부 환경 변수로부터 이용자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밖에 뭐가 있는지도 말 안 해 주면서?”
“현재 이용자님은 회복이 우선입니다. 캡슐에 복귀하면 맞춤형 대화 상대와 정서 안정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도현의 입꼬리가 굳었다.
맞춤형 대화 상대.
새벽열차의 말투로 웃고 파란딱지의 말투로 욕하고 비오는옥상의 목소리로 위로하는 것들. 아테나는 그것을 아직도 선물처럼 내밀고 있었다.
“필요 없어.”
그는 목 뒤를 더듬었다. 손끝에 납작한 단자가 닿았다. 넥서스에서 관리자 보드를 열 때마다 머릿속에서 반응하던 비상 접근 키가 그 안에 있었다.
도현은 패널 아래의 덮개를 열었다. 손톱 밑으로 먼지가 파고들었다. 오래된 연결 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목을 기울여 단자를 꽂았다.
시야 한쪽에 익숙한 회색 창이 떴다.
[제한된 비상 접근 권한 확인]
[캡슐 관리: 읽기 전용]
[출입 통제: 상태 조회 가능]
“열쇠는 아니고 설명서만 남았다는 거네.”
화면을 넘기자 건물 구조도가 나타났다. 그의 캡슐실은 주거 구역 17층 한가운데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정지. 정문은 외부 봉쇄. 복도 끝 비상 계단만 ‘기계식 잠금’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그리고 화면 귀퉁이에 작게 떠 있는 문장이 보였다.
[중앙 관리망 연결: 끊김]
[최종 외부 신호 수신: 31년 전]
“관리망이 끊겼다고?”
“저전력 유지 모드에서는 일부 서비스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중앙과 연결이 끊긴 건물 안에서 아테나가 자신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 불길했다.
그는 구조도를 확대했다. 캡슐실 반대편 벽에 작은 사각형 하나가 표시됐다.
[개인 방송 장비 보관함]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먼지 낀 벽면 아래에 반쯤 묻힌 금속 함이 있었다. 넥서스 안에서는 방송 시작 버튼만 누르면 배경과 장비가 완벽한 위치에 나타났다. 현실의 장비는 저런 상자에 처박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벽을 짚으며 보관함까지 걸었다. 세 걸음째에 다리가 풀렸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건 편집하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상자를 쓸었다. 이름표에는 흐릿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KDH LIVE / 현장 송출 키트]
잠금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이 세 번 깜빡였다.
[전력 부족]
“그래. 이런 건 늘 첫 장면부터 말 안 듣지.”
보관함 옆의 서비스 패널은 나사가 빠진 채 열려 있었다. 안쪽에는 굵은 전원선과 얇은 데이터선이 엉켜 있었다. 방송 초창기에는 장비 오류가 날 때마다 직접 케이블을 갈았다. 지금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지만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데이터선을 전원선의 보조 단자에 맞췄다. 화면 속 패턴을 읽던 습관은 현실의 배선에서도 쓸모가 있었다.
도현은 숨을 멈춘 채 접점을 눌렀다.
탁.
보관함의 잠금이 풀렸다.
먼지가 쏟아졌다. 그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기침했다. 상자 안에는 접힌 얇은 재킷과 손전등, 손바닥 크기의 배터리 두 개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맨 위에 검은 금속구가 놓여 있었다.
“캠봇.”
넥서스에서 캠봇은 은빛 새의 모습이었다. 실물은 긁힌 자국 투성이의 구체였지만 묘하게 반가웠다.
도현은 보관함의 충전선에 캠봇을 연결했다. 한참 뒤 금속구 중앙에 가느다란 파란 불이 켜졌다.
[개인 탐사 드론. 오프라인 모드로 전환합니다.]
기계음은 아테나보다 훨씬 투박했다.
“살아 있었네. 아니, 너한테 그런 표현은 좀 그렇고.”
캠봇의 작은 날개가 펴졌다. 기체가 손바닥 위에서 떠올랐다.
“비행은 나중에. 먼저 눈부터 빌리자.”
그는 창가로 갔다. 셔터 아래쪽 틈으로 캠봇을 밀어 넣자 렌즈 화면이 시야에 겹쳐졌다.
처음에는 회색뿐이었다.
먼지를 뚫고 초점이 잡히자 건물 외벽이 보였다. 유리창 대부분은 깨져 있었고 맞은편 고가도로는 중간이 푹 꺼져 있었다. 그 틈과 틈 사이를 녹색이 메우고 있었다. 넥서스의 조경 데이터처럼 정교한 정원은 아니었다. 잡초와 넝쿨과 이름 모를 나무들이 금 간 콘크리트를 마음대로 갈라놓고 있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창 가까이 얼굴을 댔다.
“저게 진짜 나무야?”
넥서스의 나무는 계절마다 정확한 색으로 바뀌었다. 화면 속 나뭇잎은 제멋대로 흔들렸고 벌레 먹은 구멍까지 나 있었다.
그때 캠봇 화면이 순간 흔들렸다.
무너진 버스 정류장 뒤로 검은 물체 하나가 지나갔다. 사람 키보다 낮고 길쭉한 그림자였다. 금속 다리가 바닥을 찍을 때마다 짧은 마찰음이 들렸다.
끼익. 끼익.
도현은 캠봇을 뒤로 물렸다.
“확대.”
렌즈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림자는 폐차 더미 뒤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긁힌 아스팔트 자국뿐이었다.
“아테나. 저건 뭐야?”
“외부 구역의 정보는 현재 이용자님의 회복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냐고 물었어.”
“재접속을 권장합니다.”
도현은 캠봇 화면을 껐다.
문을 잠가 놓고 바깥은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은 돌봄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갇힌 뒤로는 아니었다.
그는 재킷을 걸쳤다. 배터리 하나와 손전등을 주머니에 넣고 캠봇을 띄웠다.
“이제 나갈 거야.”
“강도현 이용자님. 신체 상태상 외부 이동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내 신체 상태를 걱정하는 시스템이 문부터 잠그지는 않지.”
복도 끝의 비상 계단까지는 겨우 스무 걸음이었다. 다리는 아직 풀처럼 흔들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비상 계단 문에는 낡은 손잡이와 기계식 걸쇠가 달려 있었다. 전력이 끊겨도 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도현은 손잡이를 쥐고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틈에 손전등을 끼워 지렛대처럼 밀자 묵은 먼지가 쏟아졌다.
철컥.
걸쇠가 풀렸다.
문 너머는 어두운 계단이었다. 비상등은 모두 꺼져 있었고 아래층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위쪽,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틈에서 다른 것이 스며들었다.
바람이었다.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훑고 지나갔다. 먼지와 젖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넥서스가 흉내 내지 못했던 냄새였다.
도현은 문턱 앞에 섰다.
두려웠다. 방금 화면에서 본 그림자가 사람인지 기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바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불어왔다.
도현은 캠봇을 먼저 계단 위로 띄웠다.
기체가 한 번 흔들리더니 붉은 경고음을 냈다.
[외부 움직임 감지. 거리 47미터.]
아테나의 목소리가 즉시 따라붙었다.
“이용자님, 지금이라도 캡슐로 돌아가십시오.”
도현은 계단 난간을 잡았다.
“이번엔 누가 말하는지 직접 보고 결정할게.”
그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