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21화: 둘째 고리의 문
돌판 뒤편의 좁은 회랑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바닥을 적신 지하수 위로 얇은 살얼음이 덮여 있었고 양쪽 석벽에서는 짙은 먹물 같은 그림자가 촛불처럼 일렁였다. 목패의 푸른 빛은 더 이상 직진하지 않고 벽과 바닥을 감돌며 은은한 원을 그렸다.
회랑 끝에 솟아 있는 거대한 석문은 일반적인 문과 형태가 달랐다. 문짝 중앙에 손잡이나 열쇠 구멍 대신 거울처럼 매끄럽게 연마된 흑백의 원형 석판이 박혀 있었다.
왼쪽 반원은 투명한 백옥으로 채워져 서리를 뿜었고 오른쪽 반원은 칠흑 같은 흑요석으로 이루어져 그림자를 삼키고 있었다.
"이게 두 번째 문이군."
하린이 석문 앞에 멈춰 서며 숨을 죽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문 주변의 령압 배치가 지상의 어떤 정령청 결계와도 달라. 음과 양 서로 다른 두 성질의 영맥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있어."
민우는 떨리는 오른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하단전 중앙의 령핵이 욱신거렸지만 영안을 집중하자 석문 표면의 영맥 흐름이 뚜렷하게 보였다.
백옥과 흑요석 사이의 경계선에 가느다란 틈이 나 있었고 그 틈새로 목패와 동일한 주파수의 파동이 맥박치고 있었다.
[주인님, 저 문의 백옥 속에는 단순한 서리가 아닙니다. 제 본질과 닮았으면서도 훨씬 오랜 세월 정제된 빙령의 숨결이 잠들어 있습니다.]
백랑의 목소리가 민우의 귓전을 날카롭게 울렸다. 흑영 역시 바닥의 그림자를 일렁이며 낮게 덧붙였다.
[흑요석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음영의 핵이 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한쪽이라도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석문 전체가 자폭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부수려 들면 구영맥 자체가 무너진다는 뜻이네."
민우가 중얼거렸다.
하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민우의 굳은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우야, 네 령핵 마모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어. 이 문은 두 령격을 완벽하게 같은 양으로 주입해야 열리는 구조야.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네 단전이 먼저 터져 나갈 수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정령청의 1급 수배망에 걸릴 뿐이야. 이 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민우는 주저하지 않고 석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목패를 들어 흑백 원형 석판의 정중앙에 밀착시켰다.
위잉.
목패가 석판에 닿는 순간 맑은 종소리가 지하 회랑 전체에 공명했다. 동시에 백옥과 흑요석에서 두 줄기 빛이 솟구쳐 민우의 양손을 휘감았다.
차디찬 한기가 왼쪽 팔을 타고 파고들었고 묵직한 그림자의 음기가 오른쪽 팔을 타고 짓눌러왔다.
"크윽……!"
민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상반된 두 기운이 단전으로 곤두박질치며 령핵의 미세한 균열을 매섭게 찔렀다.
[계약자여, 조율의 끈을 놓치지 마라!]
백랑이 포효하며 자신의 한기를 민우의 왼손으로 밀어 넣었다. 흑영도 지체 없이 그림자를 뻗어 민우의 오른손을 지탱했다.
민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영안의 시야 속에서 붉고 푸른 맥이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그는 두 요괴의 힘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대신 하단전의 조율선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 백랑의 서리와 흑영의 그림자를 같은 진동수로 맞물리게 했다.
서리는 그림자의 형태를 굳히고 그림자는 서리의 냉기를 품었다.
목패가 세 번 울렸다.
첫 번째 울림에 백옥의 서리가 흑요석의 가장자리로 스며들었다.
두 번째 울림에 흑요석의 그림자가 백옥의 내부를 빈틈없이 채웠다.
세 번째 울림에 민우의 조율선이 석판 중앙의 경계선을 곧게 관통했다.
철커덕!
오랜 침묵을 깨고 묵직한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거대한 석문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안쪽에서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석문 너머에 펼쳐진 공간은 넓은 원형 제단이었다.
제단 천장에는 서울 도심의 지하 암반을 지탱하는 고대 지맥들이 푸른 뿌리처럼 뻗어 있었고 바닥에는 정교한 팔괘와 천간지지가 새겨진 석판들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중앙의 받침대 위에는 손바닥만 한 옥빛 고리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고리의 절반은 백색의 서리 결정으로 덮여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칠흑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감돌고 있었다. 두 기운이 끝없이 서로를 순환하며 고리 중앙에서 완벽한 영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천화조율주법의 둘째 고리인가?"
하린이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민우가 제단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받침대 위의 옥빛 고리가 반응하듯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돌판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이 푸른 빛을 발하며 공중에 문장을 띄웠다.
[상극의 령격을 다스려 영맥의 틈새를 꿰매는 자. 둘째 고리 '조율환(調律環)'을 취하여 흩어진 맥을 묶어라.]
민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율환에 손끝이 닿는 순간 맑고 깊은 파동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찌릿한 충격과 함께 과거 이 제단을 세웠던 고대 계약자들의 잔류 사념이 민우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
수백 년 전 도심의 영맥이 뒤틀리고 이면 세계와의 경계가 무너졌을 때 상극의 요괴들을 조율하여 도성을 지켜냈던 자들의 기억이었다.
천화조율주법은 단순히 요괴를 지배하고 부리는 주술이 아니었다. 인간과 요괴 상반된 두 힘을 융합하여 붕괴하는 세계의 경계를 봉합하는 거대한 결계 주법이었다.
옥빛 고리가 스스로 크기를 줄이며 민우의 오른손 손목에 부드럽게 감겼다.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기운이 손목을 타고 하단전으로 흘러들었다. 그동안 민우를 괴롭히던 령핵의 마모 통증이 기적처럼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조율환이 백랑과 흑영의 령격을 중간에서 완충해 주는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맡은 덕분이었다.
[호오…… 제법이군. 내 힘을 받아내면서도 네 녀석의 영맥이 찢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물건 덕분이었나.]
백랑이 흡족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흑영도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님의 령핵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두 힘을 동시에 운용해도 이전처럼 단전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민우는 손목의 조율환을 어루만졌다. 옥빛 고리 표면에서 서리와 그림자가 조화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다행이야. 이걸로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겠……."
하린의 안도 섞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구구구궁!
제단 뒤편의 거대한 암벽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의 팔괘 문양이 붉게 물들었고 천장에 뻗어 있던 푸른 영맥의 뿌리들이 검붉은 연기를 뿜으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지?"
민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영안을 통해 바라본 제단 뒤편의 암벽 너머에서 끔찍한 공간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간이 유리창처럼 금이 가며 쪼개지고 있었고 그 틈새로 이면 세계의 역겨운 요기(妖氣)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린이 허리춤에서 영력 측정기를 꺼내 확인하더니 사색이 되었다.
"수치가 한계를 넘었어! 이건 단순한 요괴 출현이 아니야.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경계의 틈새' 현상이야!"
"경계의 틈새?"
"이면 세계와 현실 세계를 나누는 장막이 붕괴할 때 발생하는 재앙이야! 보통은 고위 결계가 유지되는 도심 지하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데……!"
하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벽면의 파열부를 가리켰다.
깨진 암벽 틈새에는 검은 놋쇠로 만들어진 주술 못들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누군가 정령청의 보호 결계를 일부러 부수기 위해 고의로 박아 넣은 파괴용 주술구였다.
"누군가 구영맥의 지맥을 고의로 찢어놓았어. 수장고에서 유물이 도난당한 틈을 타서 지하 전체의 균열을 유도한 거야!"
크아아아악!
키에에에엑!
찢어진 공간의 틈새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는 흉측한 형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흙처럼 검게 뭉쳐진 몸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침식귀(侵蝕鬼)'들과 반투명한 얼음 가시를 온몸에 두른 '빙령충(氷靈蟲)' 수십 마리가 제단을 향해 기어올랐다.
하급 요괴들이었지만 그 숫자가 끝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제단 통로를 타고 지상의 지하상가와 도심 전체로 요괴 무리가 밀려 올라갈 판이었다.
"내가 엄호할게!"
하린이 권총 모양의 정령 퇴마기를 뽑아 들고 영탄을 난사했다. 탕, 탕 소리와 함께 선두의 침식귀 두 마리가 머리를 터뜨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무리가 하린의 발밑으로 쇄도했다.
"하린 씨, 뒤로 물러서요."
민우가 차분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오른손 손목에서 조율환이 맑은 옥빛을 뿜어냈다.
이전과 달랐다. 두 요괴의 힘을 끌어올릴 때마다 찾아오던 살을 에는 듯한 두통과 단전의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율환이 완벽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여 민우의 의지대로 영력을 정밀하게 증폭시키고 있었다.
"백랑, 전방을 얼려라."
[크하하하! 기다리고 있었다!]
백랑의 거대한 형상이 민우의 등 뒤에서 백색의 늑대 실루엣으로 솟구쳤다.
극저온의 서리 폭풍이 제단 바닥을 휩쓸며 쇄도하던 수십 마리의 침식귀와 빙령충들을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 붙였다. 얼어붙은 요괴들의 몸에서 푸른 서리꽃이 피어났다.
"흑영, 숨통을 끊어."
[분부대로.]
민우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갈라지며 수십 개의 그림자 칼날로 솟아올랐다.
서각! 서걱!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요괴들의 목과 가슴을 흑영의 그림자 송곳이 일격에 꿰뚫었다. 단 한 마리의 반격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무자비한 연계였다.
파사사삭.
요괴들의 시체가 검은 재와 얼음 가루로 부서져 바닥으로 흩어졌다. 불과 수 초 만에 제단을 가득 메웠던 요괴 군단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하린은 총구를 내린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두 대요괴의 힘을 이토록 물 흐르듯 결합하여 일격에 무리를 쓸어버리는 전투는 정령청의 어떤 베테랑 특수 요원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둘째 고리를 얻은 조율선의 힘인가."
민우는 숨을 깊게 내쉬며 손목의 조율환을 내려다보았다. 령핵은 여전히 미세하게 열을 품고 있었지만 쓰러질 정도의 과부하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이이잉!
제단 깊숙한 곳, 찢어진 경계의 틈새 너머에서 더욱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도심 지하 깊은 곳을 관통하는 거대한 지하철 선로와 환승역 방향에서 수백 마리의 요괴들이 울부짖는 기척이 지맥을 타고 전해져 왔다.
하린이 단말기 신호를 잡으려 애쓰며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민우야, 이 균열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야! 지하 지맥을 타고 강남역 환승역 지하 구역 쪽으로 거대한 틈새가 번져나가고 있어!"
민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도심 한복판 지하 환승역에 닥쳐올 거대한 이면 세계의 붕괴. 그 서막이 이미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