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19화: 두 갈래의 추격
폐인쇄소 지하 작업실의 주황색 전등 아래로 자줏빛 안개가 얇은 띠를 그리며 흘러다녔다.
은하린은 오래된 인쇄기 옆 작업대 위에서 조사관 단말기의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백하얀 안개와 겹친 단말기 유리 표면에는 가느다란 푸른 파문 세 줄기가 번갈아 맥박처럼 찍히고 있었다. 첫 번째 파문은 백랑의 날카로운 한기였고 두 번째 파문은 흑영의 점밀한 음기였다. 그리고 그 둘의 정돈된 박자 사이에서 불규칙하게 떨리는 세 번째 맥박 하나가 뚜렷하게 자취를 남겼다.
민우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하단전 안쪽에 가로지른 푸른 선을 천천히 짚었다.
손가락 끝을 아랫배에 살짝 대는 것만으로도 두 갈래의 상반된 기운이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왼쪽 가슴에서는 얼음 송곳이 심장을 가볍게 찌르는 듯한 얼얼함이 느껴졌고 오른쪽 어깨 밑으로는 검은 진흙 덩어리가 뼈마디를 눌러오는 무거움이 치솟았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지난밤 정령청 본부 수장고 탈출 직후처럼 영맥 결절점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피를 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상태는 어때?"
은하린이 단말기 버튼을 가볍게 눌러 세 번째 파문의 주파수 곡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버틸 만해."
민우가 조용히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 네 령핵이 그 두 대요괴의 힘을 팽팽한 밧줄처럼 붙들고 있을 뿐이야.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조금만 쏠려도 그 조율선은 바로 터져 나가."
[주인님, 그림자의 힘은 이미 최소치로 조율하여 조율선 오른편을 따라 흐르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오만한 늑대가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한기를 뿜어낸다면 조율선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흑영의 목소리가 민우의 의식 깊은 곳에서 낮고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러자 귓가에서 백랑의 거친 으르렁거림이 바로 이어졌다.
[크하하. 미물 같은 그림자 놈이 감히 누구를 지적하느냐? 그 애송이의 령핵이 마모되는 건 네놈의 칙칙한 음기가 밑바닥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둘 다 조용히 해."
민우가 마음속으로 차갑게 읊조리자 내면을 울리던 두 요괴의 대립이 딱 멈췄다.
조율선이 성립된 이후 두 요괴의 목소리와 기운은 민우의 의식 중앙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다. 민우가 그어 놓은 푸른 선을 경계로 양쪽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흐를 뿐이었다. 민우는 가슴 한복판에서 령핵이 작게 깎려 나가는 감각을 느꼈지만 그 통증을 무덤덤하게 눌러 내렸다.
은하린은 단말기 화면을 민우 쪽으로 기울였다. 옥빛 목패에서 뿜어져 나온 낯선 주파수 곡선이 붉은 띠 형태로 차올라 있었다.
"맥의 안개로 외부 유출은 막았지만 단말기에 기록된 주파수 패턴을 분석했어. 이건 누군가가 외부에서 억지로 쏘아 보낸 추적용 탐지 신호가 아니야."
"그럼 뭐지?"
"반응 신호야. 천화조율주법을 만든 과거의 주술사가 목패 자체에 내장해 둔 일종의 쌍자령격 응답이지. 이 땅 위에서 조율선이 다시 열렸을 때 같은 주법의 자취나 보조 유물을 간직한 특정 장소가 거기에 맞춰 공명하게 설계되어 있어."
민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장소라고 했나?"
"그래. 이 주파수의 방위와 잔여 영맥 좌표를 정밀 계산해 보면 서울 도심 구영맥 지하 구역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어. 아주 오래전에 일제강점기와 도심 개발을 거치며 봉쇄된 조선 시대 주술 유적지 부근이야."
민우가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옥빛 목패를 가슴 안쪽 주머니에 챙겼다. 목패의 차가운 질감이 얇은 옷감을 뚫고 피부로 전해졌다.
"그곳에 천화조율주법의 다음 구절이나 또 다른 관련 유물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군."
"좋게 해석하면 그렇지. 하지만 정령청이나 다른 주술 기업이 그 봉쇄 구역을 관리하고 있다면 이건 우리가 위치를 세상에 스스로 알린 꼴이나 다름없어."
그때 은하린의 조사관 전용 비밀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비상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화면 전체가 붉은 경고창으로 덮이며 정령청 본부의 긴급 암호문이 빠른 속도로 흘러나왔다. 은하린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기계적으로 훑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갔다.
"생각보다 훨씬 빨라."
"정령청인가?"
"본부 지하 3층 1급 수장고 도난이 공식 확인됐어. 청파고 폭주 현장에 출동했던 강현 대장이 본부로 긴급 소환됐고 서울 전역에 1급 비상 수배령이 발령됐어."
같은 시각 정령청 본부 지하 3층 1급 수장고 앞.
비상 경고등의 불빛이 붉게 반짝이며 굳게 닫힌 철제 격벽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수장고 중앙에 늘어서 있던 주법 보관함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고 천장에 붙어 있던 방어 부적 수십 장은 검게 그을린 채 바닥으로 너덜거리며 떨어져 있었다.
강현 특수 수사대장은 비스듬히 부러진 청동 격벽 위에 억센 손을 올렸다.
손끝에 아주 미세한 차가운 서리 결정이 묻어났다. 강현은 굵은 손가락으로 서리를 문질러 냄새를 맡은 뒤 눈매를 매섭게 찌푸렸다.
"백색 늑대의 한기."
그의 옆에서 경비 담당 팀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를 제출했다.
"새벽 교대 시간에 수장고 자동 격벽 사슬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하 2층 환기구 쪽에 침입 흔적이 남았으나 결계 보안 필터 기록에는 결격 사유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결격 사유가 전혀 없었다고?"
강현의 목소리가 바닥을 긁듯 낮게 가라앉았다.
"복제된 황동 요원 인장이 사용되었습니다. 령격 주파수도 정식 대원의 것과 일치했기에 지하 자동 경보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마라."
강현이 돌아서며 경비 팀장의 가슴을 툭 쳤다.
"이중 계약 필터와 령격 동조 결계는 복제 인장 하나로 통과할 수 있는 허술한 물건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요괴의 령격을 미세하게 조율해서 결계의 빈틈을 동시에 찌르지 않는 한 이 수장고는 절대로 열리지 않아. 그런데 이 잔류 기운을 봐라. 늑대의 서리와 그림자의 음기가 하나의 결 따라 얽혀 있다."
경비 팀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침입자가 요괴 둘을 동시에 다루는 미등록 계약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우리 정령청 내부의 정식 인장 주파수를 손에 쥐어 준 조력자를 둔 놈이다."
강현의 시선이 파괴된 수장고 바깥 복도로 향했다. 청파고등학교 지하 영맥 폭주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미세한 위화감이 이제야 완벽한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청파고의 폭주는 본부 특수 수사대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한 성동격서였다. 놈들은 처음부터 지하 수장고의 천화조율주법을 노리고 날짜를 맞춘 거다."
강현은 허리춤의 청동 부적 소총을 짚으며 주머니에서 대장용 단말기를 꺼냈다.
"서울 전 구역에 1급 봉쇄망을 펼쳐라. 정령청에 등록되지 않은 다중 계약자를 최우선 수색 대상으로 지정하고 도심 주요 영맥 차단진을 즉시 가동해."
"내부 배신자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진행합니까?"
"그건 감찰부에 넘겨. 내 눈으로 그 놈 얼굴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수사를 멈추지 않는다."
강현의 눈동자에 푸른 령압의 불꽃이 맹렬하게 번졌다. 청파동 골목에서 놓쳤던 그 고등학생 소년의 잔상과 수장고 바닥에 남은 백색 서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폐인쇄소 지하 작업실.
은하린은 단말기에 뜬 1급 비상 수배령의 세부 통제안을 빠르게 내려 읽었다.
"강현이 수장고 현장을 직접 통제하고 있어. 정령청 본부 인근 령파 탐지 부적과 령탐견까지 전부 풀었어. 한 시간도 안 돼서 이 폐인쇄소 골목 근처까지 수색망이 조여올 거야."
민우는 작업대 위에 박혀 있던 청동 못을 하나씩 뽑아 품에 챙겼다.
"이 지하 가옥의 삼중 결계로는 막을 수 없나?"
"외부 기척을 차단하는 건 가능해. 하지만 정령청이 광역 령파 탐지진을 도심 전체에 덧씌우면 이 지하에 맺힌 정체된 령압 덩어리 자체가 이상 징후로 찍히게 돼. 삼중 결계는 바깥에서 찌르는 공격을 막는 것이지 결계 내부의 령압 밀도 차이까지 지우진 못하니까."
[주인님, 그림자의 길을 열겠습니다. 어둠 속이라면 수색대의 탐지선도 피할 수 있습니다.]
흑영이 민우의 발밑 그림자를 넘실거리며 제안했다. 백랑도 내면에서 서늘하게 이죽거렸다.
[도망치는 것은 사냥감의 방식이다. 탐지 부적을 쥔 놈들의 목을 미리 꺾어 놓으면 될 일 아닌가.]
"둘 다 아니야."
민우가 겉옷을 걸쳐 입으며 천장을 고요히 올려다보았다.
"움직인다. 목패의 주파수가 가리키는 구영맥 지하 구역으로."
은하린이 놀란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수배령이 떨어진 직후에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간다고? 그건 제 발로 포위망 한가운데에 걸어 들어가는 짓이야."
"포위망이 완전히 완성되고 나면 서울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길이 막혀. 어차피 놈들이 수색망을 집중적으로 조여오는 곳은 이 인쇄소 골목 부근이야. 도심 구영맥 구역은 수십 년 전 봉쇄된 폐영맥이라 오히려 정령청의 실시간 감시가 헐거워."
민우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은하린은 말을 멈췄다. 그녀는 맥의 안개를 조용히 거두며 단말기를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좋아. 대신 내 맥의 안개로 길을 트는 건 한계가 있어. 네 조율선을 써야 해."
"알았다."
두 사람은 지하 작업실의 낡은 철문을 잠그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새벽 세 시의 골목길에는 차가운 비구름 아래로 gray 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눅눅한 빗물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듬성듬성 떨어졌다. 골목 어귀에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정령청 수색선발대였다. 검은 우비를 입은 두 명의 특수 요원이 검은 부적을 쥔 채 령탐견 두 마리를 이끌고 골목 입구를 수색하고 있었다. 령탐견의 주둥이 끝에서 푸른 령압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쪽 골목 안쪽에서 미세한 서리 기운이 느껴진다. 탐지 부적 가동해."
요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새벽 정적을 깨뜨렸다.
은하린이 담벼락 뒤로 몸을 숨기며 맥의 안개를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민우가 그녀의 손목을 눌러 잡았다.
"맥의 안개는 수색대의 탐지 부적에 바로 걸려. 내가 한다."
민우는 눈을 감고 하단전의 푸른 조율선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푸른 선이 떨리며 왼편의 서리와 오른편의 그림자가 동시에 솟아올랐다. 민우는 두 힘을 섞지 않고 흑영의 그림자로 자신과 은하린의 몸을 감싼 뒤 그 겉면에 백랑의 차가운 공기층을 얇게 두렀다.
그림자가 주변의 빛과 기척을 삼키고 차가운 공기층이 체온과 미세 령압을 감추었다.
스스스.
령탐견 두 마리가 민우 일행이 서 있는 담벼락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짐승들이 킁킁거리며 젖은 흙을 팠으나 민우가 만들어 낸 공기층은 마치 오래된 시멘트 벽의 서리처럼 탐지 기운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이상하군. 서리 잔향만 남아 있고 생체 령압은 없어. 탈출 시 남아 있던 잔여 흔적인가 보다."
요원들은 령탐견의 사슬을 잡아당기며 반대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색대의 기척이 멀어지자 민우는 참았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가슴 중앙이 욱신거리며 조율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두 요괴의 힘을 동시에 조율해 은폐막으로 응용하는 것은 령핵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조율선을 이렇게 쓴다고?"
은하린이 놀라움이 섞인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버틸 수 있을 때 써야지."
민우는 옥빛 목패를 꺼내 들었다. 목패의 푸른 빛은 이제 도심 중앙의 높이 솟은 빌딩 숲 너머, 낮게 깔린 검은 산자락 부근을 향해 일직선으로 정밀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령청의 1급 수배령과 수색망이 그들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와 은하린은 멈추지 않고 젖은 새벽 안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부에서 걸려온 낯선 맥박의 진원지를 향해, 두 갈래의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