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5화: 회색 평원의 봉화탑
출정 이틀째 낮에도 북쪽 길은 밤처럼 어두웠다.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로 정벌대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말들이 내뿜는 입김은 흰 연기가 되었다.
대성전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성녀의 깃발을 보고 환호하던 병사들이 이제는 망토 깃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북부의 냉기는 신성한 축복만으로 밀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멈추세요!"
앞쪽에서 외침이 터졌다.
성유와 붕대를 실은 수레 하나가 기울며 얼음 위에 주저앉았다. 바퀴살이 쩍 갈라진 채였다. 뒤따르던 수레가 급히 방향을 틀자 말 한 마리가 놀라 앞발을 들었다.
루카스가 곧장 달려갔다.
"모두 제자리에 서라! 수레를 먼저 옮긴다."
"행렬을 멈추면 해가 지기 전에 전초 기지에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보급 신관이 장부를 품에 안고 다가왔다.
"성녀님께서 먼저 이동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엘레나는 군마에서 내렸다.
"부상자를 두고 앞서 갈 수는 없어요. 말부터 진정시키고 수레 안의 물품을 나누어 옮기세요."
"일정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지키는 겁니다."
그녀는 수레 옆에 주저앉은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의 손가락 끝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얼어붙은 고삐를 잡고 있다가 감각을 잃은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장갑을 벗고 그의 손을 감쌌다. 손바닥에서 피어난 금빛이 차가운 피부를 천천히 덥혔다.
"감각이 돌아오나요?"
"예. 성녀님. 이제 따뜻합니다."
"신성력으로 나아진 것과 몸이 회복된 건 달라요. 난로 곁에서 손을 녹이고 따뜻한 물을 마시세요."
엘레나는 보급 신관에게 손짓했다.
"물이 든 솥을 먼저 꺼내세요. 약초 상자도요."
"약초는 전선 기지에서 쓰려고 아껴 둔 것입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전선까지 갈 사람이 줄어들어요."
신관이 상자를 열었다. 엘레나는 그 안에서 은달빛 풀을 꺼냈다. 칼릭스가 건넨 비단 주머니에서 덜어 둔 잎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만 뜨거운 물에 넣었다. 맑은 숲 향이 피어오르자 주변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피로와 추위를 다스리는 약초예요. 한 사람당 한 모금씩만 나누세요."
루카스가 갈라진 바퀴를 살피다 고개를 들었다.
"성녀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손이 얼어붙으실 수 있습니다."
"기사들은 수레를 들어 올리고 보급병들은 물품을 나누어 옮기세요. 루카스 경은 말들이 놀라지 않도록 앞을 정리해 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루카스가 명령을 내리자 멈춰 있던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쟁은 장부 속의 화살표가 아니었다. 추위와 한 끼 늦어진 식사가 병사들의 싸움을 먼저 무너뜨리고 있었다.
장갑 안쪽의 반지가 따뜻하게 한 번 울렸다.
'네가 행렬을 멈췄군. 수레는 이미 고쳤다.'
그 순간 수레 아래의 얼음이 검게 물들었다. 갈라진 바퀴가 어둠의 힘에 이끌리듯 맞물렸다. 동시에 루카스가 지렛대를 밀어 올리고 보급병들이 부러진 나무를 단단히 묶었다.
수레가 다시 일어서자 병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성녀님의 축복이 바퀴를 고쳤습니다!"
엘레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신의 빛은 작은 곳에도 머뭅니다. 이제 서두르세요."
'칭찬받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도왔어요?'
'네가 직접 들어 올리려 했으니까.'
해가 기울 무렵 정벌대는 북부 회색 평원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전초 기지는 오래된 석벽과 낮은 천막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너머로 낡은 봉화탑이 보였다. 꼭대기의 불씨는 꺼진 지 오래였고 탑 주변만 안개가 유난히 짙었다.
"저곳이 봉화탑입니다. 오늘 밤에는 접근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왕군의 정찰대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확인해야 해요."
엘레나는 천막으로 들어가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봉화탑을 중심으로 검은 냉기가 얇게 번지고 있었다. 전쟁터에 남은 원망이 병사들의 불안과 맞물리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저 안개는 병사들의 꿈을 어지럽힐 겁니다. 먼저 정화하겠어요."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성녀님께서 직접 가시겠습니까?"
"단독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정화 의식은 주변의 기척이 적을수록 안전해요. 루카스 경은 외곽에 기사들을 배치해 주세요. 제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는 아무도 탑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고요."
"그때는 제가 신호를 보낼게요. 루카스 경이 외곽을 지켜 주어야 제가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어요."
루카스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성녀님께서 홀로 감당하시는 동안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너무 가까이 오지만 말아 주세요."
"예. 탑 아래의 바위선까지 물러나겠습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뒤 그녀는 흰 망토를 두르고 봉화탑으로 향했다. 루카스와 성기사들은 약속대로 외곽에 멈췄다.
봉화탑의 문은 경첩이 녹슨 채 반쯤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기운이 발목을 감쌌다. 누군가 오래전 이곳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낮은 소리가 돌벽 사이를 맴돌았다.
엘레나는 벽돌 위에 손을 올렸다.
"당신들의 고통을 이곳에 묶어 두지 않을게요."
금빛 신성력이 돌 틈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냉기가 반발하며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붕대를 돌기둥에 감았다.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병사들의 마음이 신성력의 길을 만들었다. 검은 냉기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바닥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돌판 하나가 옆으로 밀리며 계단이 나타났다.
엘레나는 장갑 안의 반지를 눌렀다.
'저장고 입구를 찾았어요.'
'내가 간다.'
'루카스 경이 밖에 있어요. 기척을 완전히 숨겨요.'
'이미 네 뒤에 있다.'
계단 아래 어둠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칼릭스가 그 틈에서 걸어 나왔다. 흑발에는 밤의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붉은 눈은 그녀의 얼굴부터 손끝까지 훑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당신은요?"
"내가 묻는 중이다."
"저도 묻고 있잖아요."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 마디를 확인했다. 낮에 병사를 치료한 뒤 차가워진 손이었다.
"손이 차갑다."
"북부에 도착했으니까요."
"내가 따뜻하게 해 주겠다."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자 붉은 마력이 작은 불씨처럼 피어났다. 엘레나의 신성력과 부딪치지 않은 마력은 온기로만 남았다.
"이런 건 병사들에게 쓰면 안 되죠?"
"네가 먼저다."
"마왕의 자원이 아주 편파적이네요."
"당연한 일이다."
칼릭스는 품에서 작은 보온병과 꿀빵 두 개를 꺼냈다.
"이번에도 공물인가요?"
"야식이다. 루카스가 들으면 정화 공물이라고 하겠지."
"당신도 그 착각을 즐기고 있군요."
"네가 웃으니까."
엘레나는 꿀빵을 반으로 나누어 그의 입에 넣었다. 마왕의 차가운 얼굴과 꿀이 묻은 입술이 어울리지 않았다.
"전선까지 와서도 당신은 여전하네요."
"너를 보러 왔으니 당연하다."
"양군의 상황은 어때요?"
"해가 뜨기 전 정찰대가 움직일 것이다. 내 군대는 북쪽 능선 뒤에 대기 중이다. 제국군이 봉화탑 앞 평원으로 내려오면 대치가 시작된다."
"당신이 먼저 나타나겠네요."
"네가 너무 앞으로 나오지 않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
"성녀가 뒤에만 있으면 의심받아요."
"그럼 내 오른쪽 어깨를 노려라."
엘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편지에 쓴 각본을 정말 실행할 생각이에요?"
"네가 검을 휘두르고 내가 빗겨 맞는 척한다. 세 번째 검격 뒤에 내가 물러나면 첫 장면은 끝난다."
"너무 쉽게 물러나면 루카스 경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 기사에게는 내가 너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이 저를 경계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어요?"
칼릭스는 눈썹을 좁혔다.
"이 정도면 되나."
"그건 걱정하는 얼굴이에요."
"전장에서는 안 돼요."
엘레나는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눌러 표정을 바꾸었다.
"칼릭스는 엘레나 로렌스를 죽이고 싶어 해야 해요. 아주 무섭게."
"싫다."
"배역에 충실해 주세요."
"네가 다치는 배역은 싫다."
엘레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다치지 않을 거예요. 세 번째 검격은 당신의 어깨를 스칠 뿐이고 당신은 북쪽으로 물러나요. 그러면 저는 병사들 앞에서 승리를 선언하고요."
"그 뒤에는 반드시 반지를 눌러라. 당신도 위험해지면 눌러라."
"나는 네가 보는 앞에서 쉽게 죽지 않는다."
"제가 안 보는 곳에서도 죽으면 안 돼요."
칼릭스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지상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성녀님! 봉화탑 안쪽의 진동이 커졌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루카스였다.
칼릭스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엘레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놓았다.
"약속했죠. 여기서는 피를 보지 않기로."
"그가 너무 가까이 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이제 돌아가세요."
"너를 두고 가기 싫다."
"내일 저를 죽이는 척하려면 체력을 아껴야죠."
칼릭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옛 보급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엘레나의 손목을 잡아 반지 위를 엄지로 눌렀다.
"한 번이면 내가 간다. 두 번이면 네 곁에 있다는 신호다."
"알겠어요."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검은 그림자가 돌벽 사이로 스며들자 칼릭스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녀는 저장고 바닥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검은 냉기가 금빛에 감싸여 부서졌다. 봉화탑 전체가 낮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녀님!"
"괜찮아요. 오래된 원망이 마지막으로 몸부림친 것뿐이에요."
엘레나는 벽에 감은 붕대를 가리켰다.
"병사들의 마음이 이곳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이제 밤새 악몽을 꾸는 사람은 줄어들 겁니다."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저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곳에서도 홀로 어둠을 밀어내셨군요."
"홀로 한 건 아니에요. 모두가 조금씩 도왔어요."
엘레나는 그의 시선이 손으로 향하기 전에 장갑을 다시 끼웠다.
"이제 돌아가요.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정찰대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봉화탑 꼭대기에 올라서자 회색 평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개 너머 북쪽 능선에 붉은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루카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마왕군의 신호일 겁니다."
엘레나는 장갑 안의 반지를 눌렀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보내지 않았다. 약속한 신호만 전했다.
멀리 능선의 붉은 빛 하나가 세 번 깜빡였다.
칼릭스의 응답이었다.
루카스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전원 기상! 마왕군이 움직인다!"
천막 곳곳에서 갑옷을 여미는 소리가 쏟아졌다. 잠들지 못한 병사들이 창을 들고 석벽 앞으로 모였다.
엘레나는 북쪽을 바라보며 성녀의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모두가 그녀에게 마왕을 쓰러뜨리라고 외칠 것이다. 칼릭스는 가장 무서운 얼굴로 그녀 앞에 서야 한다.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일 봐요. 너무 멋있게 나타나지는 말고."
안개 너머에서 낮고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회색 평원의 첫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