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4화: 출정 전야의 검은 전령
출정 전날 밤의 대성전은 기도보다 짐 꾸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백은 회랑에는 성수 항아리와 붕대 상자가 줄지어 놓였고 보급 신관들은 금실로 봉인한 성물을 하나씩 장부에 적었다. 평소라면 촛불과 향 냄새만 고요히 흐르던 곳에 말굽을 감쌀 가죽끈과 방한 망토와 은빛 창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엘레나는 성녀의 침실 앞 임시 탁자에 앉아 두꺼운 병참 목록을 넘겼다.
"정화수 서른 항아리. 성유 열두 상자. 축복받은 창날 이백 개."
수석 신관이 굳은 목소리로 읽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빈칸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
"상처를 씻을 물과 잠을 못 이룬 병사들을 위한 약초는 어디 있나요?"
"성녀님께서 계시니 신성력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신성력은 만능이 아니에요."
엘레나는 장부를 덮지 않은 채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보랏빛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병사들이 발을 다치면 걸을 수 없고 잠을 못 자면 창을 제대로 들 수 없습니다. 북부 국경의 밤은 차갑다고 들었어요. 붕대와 해열 약초를 두 배로 늘려 주세요. 말에게 먹일 귀리도 추가하고 물 끓일 솥도 따로 챙기세요."
신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들에게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정리되는 표와 인장에 가까웠다. 엘레나에게 전쟁은 발바닥이 찢긴 병사와 얼어붙은 손끝으로 버티는 보급병들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품 안쪽에 숨겨 둔 작은 비단 주머니를 떠올렸다.
칼릭스가 준 은달빛 풀.
마계 국경 지대의 약초를 제국 정벌대 보급품 속에 넣는다는 건 듣기만 해도 신관들이 쓰러질 일이었다. 그러나 피로를 가라앉히는 효능만큼은 확실했다. 엘레나는 약초 상자 항목에 직접 봉인을 찍었다.
"이 상자는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밤 기도와 부상병 안정에 쓸 겁니다."
"예. 성녀님."
신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때 회랑 끝에서 갑옷 소리가 다가왔다.
루카스 데 아스테리아가 출정 지도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피곤했지만 눈빛만은 성물처럼 빛났다.
"성녀님. 전선 숙영 계획을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엘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세요. 루카스 경."
루카스는 지도를 펼치자마자 검은 선을 세 겹이나 그은 구역을 가리켰다.
"성녀님의 천막은 제1성기사단 본진 중앙에 배치하겠습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 호위 기사 여덟 명씩 세우고 제가 직접 입구를 지키겠습니다."
"입구를 직접요?"
"예. 마왕은 교활합니다. 성녀님께서 홀로 악의를 정화하시는 밤을 노릴 가능성이 큽니다."
엘레나는 잔잔히 웃었지만 속으로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입구에 루카스가 서 있으면 칼릭스는커녕 그림자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제국의 가장 충직한 방패가 지금은 그녀의 연애에 가장 단단한 성벽이 되고 있었다.
"루카스 경. 그 마음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반드시 혼자 있어야 하는 기도 시간이 필요해요."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또 그 고통스러운 정화 의식을 홀로 감당하시려는 겁니까?"
"병사들의 불안은 밤에 가장 커집니다. 그때 제가 조용히 기도해 두어야 아침에 진영이 흔들리지 않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는 기도도 할 생각이었다. 다만 그 기도 사이에 마왕과 비밀 회의 겸 데이트가 끼어 있을 뿐이었다.
루카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단독 기도 시간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성녀님의 거룩한 희생을 훔쳐보는 무례는 제가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마왕이 달콤한 공물로 성녀님을 시험할지도 모릅니다. 몽블랑 같은 형태로요."
엘레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루카스는 너무 진지했다. 너무 진지해서 반박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달콤한 공물이라는 말이 이렇게 장엄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그런 유혹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역시 성녀님."
루카스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창문 너머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톡.
엘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새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밤보다 짙은 깃털 사이로 붉은 눈이 반짝였고 발목에는 달빛 실로 묶은 작은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칼릭스의 전령이었다.
새의 날개 끝에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성역 결계가 그 기척을 물면 경보 종이 울릴 터였다.
루카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성녀님. 물러서십시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녀는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검은 새는 놀라울 만큼 얌전히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엘레나는 장갑 안쪽의 월광의 맹세 반지를 눌렀다.
금빛 신성력이 얇게 피어올라 검은 깃털을 감쌌다. 마력의 날카로운 냄새가 향 냄새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결계의 떨림도 숨을 죽이듯 잦아들었다.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성녀님. 그 새는..."
"전장의 어둠을 미리 품고 온 징조 같군요."
엘레나는 최대한 성스럽게 말했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루카스는 감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새벽 출정 전부터 하늘이 성녀님께 계시를 보내는군요."
엘레나는 새의 발목에서 편지를 풀어 손바닥 안에 숨겼다. 편지는 검은 종이였지만 그녀의 손에 닿자 평범한 흰 종이처럼 변했다. 그 위에는 칼릭스의 단정한 글씨가 떠올랐다.
북부 회색 평원의 낡은 봉화탑.
지하 저장고에 옛 보급로가 남아 있다.
첫 전투가 시작되면 나는 오른쪽 어깨를 빗겨 맞는 척하겠다.
너는 너무 세게 때리지 마라.
마지막 줄에서 엘레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를 보러 가는 길에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다.
그녀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어 웃음을 삼켰다. 마왕이 전장 작전문에 연인에게 맞는 강도를 걱정하는 문장을 적어 보내는 일은 아마 제국 역사서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종이를 접어 소매 안쪽에 넣었다.
"루카스 경."
"명령하십시오."
"전선에 도착하면 낡은 봉화탑 주변을 먼저 정화해야겠어요. 오래된 보급로와 빈 저장고에는 원망이 고이기 쉽습니다."
"즉시 일정에 넣겠습니다."
루카스는 지도를 붙들고 봉화탑에 굵은 원을 그렸다.
"제가 기사들을 물려 접근 금지선을 치겠습니다. 성녀님께서 단독으로 정화하셔야 할 장소라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엘레나는 가슴속에서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릭스의 비밀 접선 장소가 성기사단장의 손으로 공식 보호 구역이 되고 있었다. 교황이 알면 성장을 떨어뜨릴 일이고 칼릭스가 알면 아마 꽤 만족스럽게 웃을 일이었다.
검은 새가 손등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엘레나는 새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답장을 보내야겠네요."
"성녀님께서 계시에 답하시는 겁니까?"
"전장에는 기도가 오가야 하니까요."
엘레나는 새 편지지에 아주 짧게 적었다.
봉화탑에서 봐요.
그리고 당신도 너무 실감 나게 다치지 마세요.
그녀가 종이를 접자 월광의 맹세 반지가 따뜻하게 울렸다. 작은 종이는 새의 발목에 감기며 은빛 매듭으로 변했다. 검은 새는 편지를 물고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금빛 신성력에 감싸인 검은 그림자가 밤하늘로 사라지는 모습은 정말로 신성한 징조처럼 보였다.
루카스는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저는 반드시 성녀님을 지키겠습니다."
엘레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든든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제 목숨 하나가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봉화탑 정화 시간에는 멀리서 기다려 주세요. 경이 가까이 있으면 병사들이 저보다 경의 표정을 보고 더 긴장할지도 몰라요."
루카스는 충격받은 듯 굳었다가 곧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 얼굴이 병사들에게 위압감을 준다면 투구를 쓰겠습니다."
"투구보다 거리를 부탁드린 거예요."
"아. 예. 반드시 거리를 지키겠습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출정의 새벽은 금세 찾아왔다.
대성전 정문 앞에는 흰 깃발과 은빛 갑옷이 끝없이 늘어섰다. 말들이 입김을 뿜었고 수레바퀴에는 서리가 얇게 내려앉았다. 계단 아래의 백성들은 성녀의 이름을 부르며 하얀 꽃잎을 던졌다.
교황 아르만은 높은 계단 위에서 축복문을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장엄했고 손에 든 성장은 새벽빛을 받아 붉게 번뜩였다.
"신의 검이 어둠을 베고 성녀의 빛이 제국의 길을 밝히리라."
엘레나는 흰 망토를 두르고 군마 앞에 섰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그녀는 백성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축복을 내렸다.
금빛 신성력이 부드러운 눈발처럼 흩어지자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떨던 병사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이 부분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들이 덜 아프기를 바랐다.
루카스가 말고삐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제1성기사단은 성녀님의 빛을 따라 북부 전선 끝까지 가겠습니다."
"모두 살아 돌아오는 것을 첫 번째 명령으로 삼겠어요."
"마왕을 단죄하는 것보다 말입니까?"
엘레나는 잠시 북쪽 하늘을 보았다.
장갑 안의 반지가 따뜻하게 울렸다.
"죽은 자는 평화를 누릴 수 없으니까요."
루카스는 그 말을 성녀의 자비로 받아들인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엘레나는 군마에 올랐다. 흰 망토가 새벽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봉화탑에서 봐요."
먼 북쪽에서 붉은 마력이 아주 희미하게 응답했다.
겉으로는 마왕을 단죄하러 가는 길.
속으로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
성녀의 깃발이 대성전 문을 지나 북쪽 길로 나아갔다. 엘레나의 가장 위험하고 달콤한 출정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