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변이 맹수들이 내 말을 듣는다

1화: 굶주린 왕의 손
폐동물원의 정문은 입을 벌린 채 녹슬어 있었다.
강태오는 차단봉을 넘었다. 운동화 밑창이 젖은 흙을 밟을 때마다 물컹한 소리가 났다. 전날 밤 내린 비는 평범하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빗물이 닿은 풀잎마다 붉은 얼룩이 번졌고 죽은 매미들이 길을 막았다.
태오는 마스크 위로 손수건을 한 겹 더 둘렀다. 배낭 안에는 이틀 치 물과 사흘 치 통조림이 들어 있었다. 오늘 안에 물탱크를 찾지 못하면 내일 아침부터 물을 세어 마셔야 했다. 운이 좋으면 동물용 사료 창고도 남아 있을 터였다.
매표소 옆 안내도는 빗물에 번져 있었다. 태오는 지하 관리 통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붉은 물이 발목까지 차 있었다. 물 위의 막이 기름처럼 흔들렸다.
철이 휘는 소리가 났다.
태오는 손전등을 끄고 벽에 등을 붙였다. 통로 끝 철문 아래로 검은 털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털 사이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호랑이.
그는 가방에서 접이식 몽키스패너를 꺼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손잡이는 짧고 가벼웠다. 맹수를 상대하기에는 우스운 도구였지만 빈손보다는 나았다.
돌아가면 살 수 있다. 물탱크는 다른 곳에도 있을지 모른다.
문 너머에서 숨이 끊어질 듯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태오는 철문에서 세 걸음 떨어진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동물행동 상담사로 일하던 시절 배운 원칙이 떠올랐다. 겁먹은 동물 앞에서는 퇴로를 막지 않는다. 손을 먼저 뻗지 않는다.
그는 물통 하나와 비상용 건사료 봉지를 꺼냈다. 길고양이에게 주려고 남겨 둔 사료였다.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먹어도 됩니다. 대신 저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물통을 철문 쪽으로 밀자 낮은 으르렁거림이 번졌다. 문 아래로 은빛 줄무늬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 하나가 물통 옆에서 멈췄다.
그 순간 태오의 머릿속에 낯선 문장이 터졌다.
배고파.
태오는 숨을 멈췄다. 굶주림이 위장에서 비틀렸고 앞다리의 상처가 뼈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네가 먼저 도망가지 않으면 나도 물지 않아.
태오는 몽키스패너를 내려놓았다. 철문 안에서 호랑이가 물을 핥았다. 어둠에 잠긴 얼굴에서 한쪽 금빛 눈만 떠올랐다. 어깨 높이는 철문 손잡이보다 높았다. 줄무늬는 은빛에 가까웠고 목덜미의 털은 젖은 철사처럼 뻣뻣했다.
“하랑.”
사육동 안내판에서 본 이름을 불렀다. 하랑은 물을 마시다 말고 금빛 눈을 들었다.
내 냄새를 안다.
태오는 하랑이 이름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표지판과 자신의 냄새를 구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듣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감정과 감각이 문장 모양을 얻은 신호였다.
“저는 하랑 씨를 꺼내러 온 게 아닙니다. 물탱크와 사료를 찾으러 왔습니다. 문이 무너지면 다칠 수 있으니 상처만 확인하게 해 주세요. 싫으면 물러나겠습니다.”
하랑의 코가 철문 틈 가까이 내려왔다. 피와 비린내와 오래된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픈 손. 또 묶나.
“묶지 않습니다. 믿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약속을 어기면 물러나세요.”
하랑은 앞다리를 들었다. 발가락 뒤쪽에 검은 금속 파편이 박혀 있었고 주변 살은 부어 있었다. 붉은 비가 상처 안으로 스며든 흔적도 보였다.
통로 뒤쪽에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났다. 붉은 물이 계단 아래에서 넘쳐 철문 쪽으로 밀려왔다. 시간은 태오 편이 아니었다.
그는 소독약과 거즈를 바닥에 나란히 놓았다. 탄력 붕대도 길게 풀어 두었다.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태오는 소독약을 자신의 왼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따가움에 눈썹이 움직였지만 손을 거두지 않았다.
냄새가 쓰다. 죽이지 않는다.
“네. 아프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대답하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랑의 굶주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태오는 무릎을 짚었다.
하랑이 철창을 들이받았다.
쾅!
철문 사이로 거대한 얼굴이 다가왔다. 송곳니가 드러났고 목에서 붉은 불빛 같은 공포가 튀었다.
나가야 한다. 닫힌 냄새. 뒤에서 온다.
“뒤에는 물만 있습니다. 당신을 쫓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문이 무너지면 둘 다 다칩니다.”
하랑은 발톱을 세운 채 태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태오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낡은 동물병원 밴드가 붉은 물에 젖어 있었다.
태오는 철문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이 틈 앞에서 멈췄다.
“제가 먼저 손을 넣겠습니다. 냄새만 맡으셔도 됩니다. 물면 빼겠습니다. 그다음에는 다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물이 발목을 적셨다. 태오는 손을 더 내밀었다.
하랑의 코끝이 손바닥에 닿았다.
굶주림. 목을 찢는 갈증. 발 안쪽을 파고든 쇳조각. 비가 내릴 때마다 몸 안에서 낯선 것이 깨어나는 느낌. 사람 손이 목덜미를 누르던 기억.
하얀 벽과 금속 냄새가 눈앞을 스쳤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거대한 몸을 붙잡고 있었다.
태오는 비명을 삼키며 물에 주저앉았다.
하랑은 손을 물지 않았다. 금빛 눈이 태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이 무너졌다.
“아직 안 무너졌습니다.”
태오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치료할 건지 말 건지 결정해 주세요. 억지로 하지 않겠습니다.”
하랑은 한참 동안 태오를 보았다. 이윽고 몸을 옆으로 틀어 앞다리를 철문 아래로 밀어 넣었다.
허락한다. 한 번만.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태오는 거즈로 피를 닦았다. 하랑의 근육이 굳자 즉시 손을 멈췄다.
“멈췄습니다. 너무 아팠습니까?”
아픔은 냄새가 아니다. 불이다.
“그럼 세 번 나누겠습니다. 누를 때마다 말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상처를 닦았다. 두 번째로 집게를 파편에 걸었다. 금속을 잡는 순간 하랑의 울음이 통로를 흔들었다. 태오의 머릿속에도 불이 번졌다. 그는 하랑의 발이 아니라 자신의 발이 찢긴 것처럼 느꼈다.
“조금만 더.”
태오는 집게를 비틀었다.
파편이 빠졌다.
하랑의 앞발이 바닥을 내리쳤다. 물이 튀었고 태오는 뒤로 넘어졌다. 하랑은 앞으로 달려들었지만 철문이 가슴을 막았다. 태오는 눈을 감았다.
이빨은 내려오지 않았다.
하랑은 피 묻은 파편을 확인한 뒤 태오의 손을 핥았다. 뜨거운 혀가 손바닥을 스쳤다.
작은 손. 약속을 지켰다.
태오는 붕대를 감았다. 매듭은 조이지 않았다. 움직일 때 피가 멎는 정도로만 고정했다.
“오늘은 이 정도입니다.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문을 밀어도 됩니다. 다만 제가 먼저 길을 확인하겠습니다.”
하랑은 대답 대신 어둠을 바라보았다.
태오는 철문을 살폈다. 아래쪽 경첩은 휘었지만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랑이 밖으로 나온 뒤에도 문을 닫아 둘 수는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가두는 모양이 되는 것은 싫었다.
그는 부러진 사육봉을 주워 철문과 벽 사이에 비스듬히 걸었다. 하랑이 안쪽에서 밀면 열리고 바깥에서 무언가 밀어붙이면 걸리는 임시 걸쇠였다.
“제가 잠그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 막대가 넘어지면 소리가 납니다. 그때는 서로 먼저 확인하죠.”
하랑은 막대와 태오를 번갈아 보았다.
닫힌 문이 아니다. 돌아갈 수 있는 문이다.
“맞습니다.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태오는 그제야 자신이 하랑의 영역을 빼앗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전을 이유로 문을 잠그는 순간 치료는 또 다른 포획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손에 남은 피를 거즈로 닦고 먼저 통로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랑은 한 발을 내디딘 뒤 멈췄다. 상처가 욱신거리는지 어깨가 낮아졌다. 태오는 다가가지 않고 바닥에 남은 물통을 하랑의 앞에 놓았다. 하랑은 물을 마신 뒤에야 다음 발을 내놓았다.
태오는 안내도와 라디오를 챙겼다. 계단 쪽은 붉은 물로 막혀 있었다. 물탱크 표지는 사육동 뒤편에 있었다. 그는 하랑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옆걸음으로 움직였다.
철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아 하랑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거대한 몸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부상당한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는 모습이 보였다. 태오는 허리에서 몽키스패너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랑은 도구를 한 번 보고 관심을 거두었다.
물탱크 표지판 아래에는 작은 철제 문이 있었다. 잠금장치는 녹아 있었다. 태오가 어깨로 밀자 안쪽에서 묵직한 물소리가 울렸다.
비상 물탱크였다.
물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배출관을 열자 맑은 물이 통에 떨어졌다. 태오는 손을 씻고 두 번째 물통을 하랑에게 내밀었다.
하랑은 먼저 태오를 보았다.
“이건 같이 쓰죠. 제가 물을 채우면 당신도 마십니다. 사료를 찾으면 당신도 먹습니다. 대신 다친 발로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세요. 싫으면 거절해도 됩니다.”
하랑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작은 손은 물을 숨기지 않는다.
이번에는 문장보다 따뜻한 바닥과 젖은 털의 감각이 먼저 왔다. 태오는 그것이 하랑의 대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라디오에서 잡음이 터졌다.
치익. 치익.
물탱크의 철판이 가늘게 떨렸다. 지하 깊은 곳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우우우우—
소리는 귀보다 뼈로 느껴졌다. 하랑의 털이 목덜미부터 일어섰다. 그는 태오 앞을 가로막고 어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저 울음은 먹이를 부르는 냄새가 아니다.
철제 문 너머에서 검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붉은 비와 섞이지 않는 새까만 얼룩이었다.
태오는 물통의 뚜껑을 닫았다. 계단 쪽은 막혔고 사육동 뒤편에는 확인하지 않은 통로가 있었다. 하랑은 어둠을 노려보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태오는 그 옆에 섰다.
“같이 확인하죠.”
하랑이 금빛 눈을 돌렸다.
“이번에도 먼저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깊은 지하에서 두 번째 울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태오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