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5화: 바다가 보이는 집
새벽의 공작저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엘리아나는 작은 가죽 가방 하나를 들고 현관 계단 앞에 섰다. 가방 안에는 옅은 면 드레스 두 벌과 약병, 어머니의 지참금 환전증, 바다에 관한 낡은 시집뿐이었다.
로라는 자기 짐보다 엘리아나의 가방을 더 여러 번 살폈다.
"아가씨, 정말 이것뿐이세요? 손수건도 더 넣어 드릴까요?"
"두 장 있어요. 더 넣으면 들고 가기 귀찮아져요. 남부에서는 가벼운 쪽이 좋을 것 같아요."
문 앞에는 황실 문장이 새겨진 검은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 기사 에단과 마르코가 마차 양옆에 서 있었고 베르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출발 전에 한 번만 맥을 보겠습니다."
"라피스 해안에 도착해서 보세요. 지금 보면 맥박이 빨라져서 출발을 늦추실 테니까요."
베르너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만류가 싫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걱정이 자기 발목을 잡는 손이 되는 일만은 원하지 않았다.
그때 수석 집사가 급히 현관을 가로질러 왔다.
"영애님, 공작 각하의 귀환 전까지 처분을 중단하라는 통지가 있습니다. 소공작님도 아직 최종 허가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약혼 해지 절차를 밟으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제 집으로 가는 거예요."
에단이 황실 승인서를 펼쳤다. 카시안의 친인이 찍힌 문서였다.
"황태자 전하의 명령입니다. 엘리아나 영애의 남부행은 오늘 새벽부터 황실의 통행 보장 아래 진행됩니다. 귀환 전 처분 중단 통지는 이 이동을 저지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집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아나는 텅 빈 복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카일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가 떠나지 말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현관은 의외로 편안했다. 적어도 오늘은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가죠, 로라."
마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움직였다. 공작저의 붉은 벽돌 담장이 뒤로 멀어졌다. 엘리아나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그곳에 남겨 둔 것은 물건뿐 아니라 더 이상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었다.
수도를 벗어난 뒤 다음 날 오후, 마차는 남쪽의 작은 역참에 멈췄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수도보다 부드러웠다. 젖은 흙과 풀 냄새가 섞인 바람에 로라는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남부에 가까워졌다고 기뻐했다.
엘리아나는 그 기쁨에 맞장구를 치려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 안쪽이 얼음 조각으로 긁히는 듯했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이 막혔고 손끝의 감각이 멀어졌다.
"아가씨!"
로라가 부축하려 하자 엘리아나는 손을 들어 막았다.
"약부터요. 괜찮아요."
베르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는 말은 진료 기록에 적지 못합니다. 오늘은 더 이동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엘리아나는 물과 약을 받아 삼켰다. 쓰디쓴 가루가 혀에 남았고 몇 번을 삼킨 뒤에야 숨이 조금 길어졌다.
역참 처마 아래의 빈 의자에 앉자 마르코가 말없이 담요를 걸쳐 주었다.
"남부의 공기가 좋아지면 조금은 나아질까요?"
"따뜻하고 습한 기후가 통증을 덜어 줄 수는 있습니다. 충분한 휴식과 함께라면 더더욱요. 하지만 그것을 치료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알아요. 기대는 작게 할게요. 오늘 숨쉬기가 조금 편하면 그걸로 충분해요."
베르너의 손이 약병 뚜껑 위에서 멈췄다.
"선생님은 저를 고치지 못해도 돼요. 대신 아프면 약을 챙겨 주시고 제가 너무 무리하면 한 번만 말려 주세요."
"한 번으로 듣겠습니까?"
"듣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제야 베르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로라는 곁에 앉아 여행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는 엘리아나가 적어 둔 소원들이 가지런했다.
바다를 보며 멍하니 있기.
갓 구운 타르트 배부르게 먹기.
고양이 털에 파묻혀 잠들기.
"아가씨, 첫 번째는 오늘이에요. 타르트는 내일쯤이면 가능할까요?"
"라피스 해안에 맛있는 가게가 있다면요."
"분명 있을 거예요. 바다가 있는 곳에는 맛있는 게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 단순한 확신에 엘리아나는 작게 웃었다. 통증이 남아 있어도 내일 먹을 타르트를 생각하니 견딜 만해지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해 질 무렵 마차는 마침내 라피스 해안 북쪽 언덕을 올랐다.
완만한 길 끝에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햇빛을 머금은 물결은 멀리서부터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고 짠 바람은 언덕 위까지 올라왔다.
엘리아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듯 따뜻한 바람이 은발 사이를 스쳤다.
"정말 바다예요."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언덕 중턱의 하얀 저택 앞에는 관리인 미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의 중년 여인은 깊이 인사한 뒤 커다란 황동 열쇠를 내밀었다.
"계약하신 집입니다. 오래 비어 있었지만 지붕과 창문은 새로 손봤어요. 방은 두 개고 부엌이 작습니다. 대신 테라스에서는 바다가 아주 잘 보이지요."
엘리아나는 열쇠를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금고 열쇠나 보석함의 열쇠보다 훨씬 가볍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저를 영애라고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에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미레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엘리아나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남의 사정을 캐묻기보다 파도 높이를 더 궁금해해요."
현관을 열자 햇볕 냄새가 밴 흰 벽과 나무 바닥이 드러났다. 작은 부엌에는 찻주전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거실 창문 너머로는 푸른 수평선이 넓게 펼쳐졌다.
엘리아나는 테라스 가까운 방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얇은 커튼을 부풀렸다.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 창가에 올려두자 낯선 집이 조금 자기 것이 된 듯했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로라는 정원 쪽 방을 쓰세요."
"아가씨가 먼저 좋은 방을 고르셔야죠."
"그래서 골랐잖아요. 이제 여기는 제 집이니까요."
로라의 눈가가 붉어졌다. 엘리아나는 모른 척 부엌으로 가서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빵하고 수프면 충분해요. 내일은 타르트부터 먹고요."
정원 끝에는 말라 비틀어진 레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나무를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손끝을 들어 올렸다.
보랏빛 온기가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른 가지 끝에 연둣빛 새잎 하나가 피어났다.
짐을 대강 풀고 난 뒤 엘리아나는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해는 바다 끝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결은 붉은빛과 푸른빛을 번갈아 품으며 천천히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파도 소리는 커다란 방 안에서 누군가 낮게 숨 쉬는 소리처럼 일정했다.
그녀는 난간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완전히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가슴을 조이던 보이지 않는 끈 하나가 느슨해진 듯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로라가 뒤에서 담요를 들고 나왔다.
"저녁도 안 드시고요?"
"저녁은 먹어야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에도 식사는 포함돼요."
로라가 울다가 웃었다. 그 웃음에 엘리아나도 따라 웃었다.
미레나는 문간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 새벽에 해변 시장이 열립니다. 거기 ‘푸른 조개’라는 가게의 해산물 타르트가 아주 유명해요. 갓 구운 건 해가 뜨기 전에 다 나가니 일찍 가셔야 하지만요."
엘리아나의 눈빛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럼 로라와 해 뜨기 전에 나가 볼게요."
그녀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려던 순간 언덕 아래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황실 문장이 찍힌 작은 편지 하나가 호위 기사 에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엘리아나 님. 수도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친서입니다."
엘리아나는 봉인을 바라보았다. 붉은 밀랍 위의 문장은 이곳까지 따라온 수도의 그림자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바다를 본 날이었다. 그녀는 그날만큼은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내일 읽을게요. 우선 타르트를 먹고 나서요."
봉인된 편지는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 곁에서 새로 난 레몬잎이 바닷바람에 작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