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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4화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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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가문과의 작별

공작가의 수석 비서가 전달한 통지서는 탁자 위에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공작 각하의 귀환 전까지 영애의 약혼 해지와 남부 이탈에 관한 모든 처분을 중단하십시오.'

붉은 봉인이 찍힌 문장은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엘리아나를 다시 로젠버그라는 거대한 굴레 안에 가두겠다는 가문의 선언과 다름없었다.

로라는 통지서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손에 쥐고 있던 옷가지를 꼭 쥐며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정말 아무 데도 못 가실지도 몰라요. 각하께서는 가문의 명예와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엘리아나는 창가로 천천히 걸어가 어둠이 내린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로젠버그 공작은 전생의 기억 속에서도 오직 가문의 권세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정객이었다. 그가 수도로 돌아오면 황실과의 파혼을 막기 위해 엘리아나를 저택 깊숙이 감금하거나 치료라는 명목으로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들 것이 뻔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1년뿐이야. 그 소중한 나날을 공작과의 쓸데없는 설전이나 감금 생활로 허비할 수는 없어.'

엘리아나는 돌아서서 서재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로라.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공작저의 실질적인 집무를 처리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면 돼요."

"소공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카일 오빠라면 지금 당장 가문 내부의 서류를 처리할 권한이 있죠."

엘리아나는 깃펜을 들었다. 종이 위에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가 얹어졌다. 그것은 로젠버그 공작가의 영애로서 누리던 모든 권리와 명의를 포기하겠다는 공식 각서였다.

가문의 성씨 사용 철회, 상속권 포기 그리고 공작저 자산에 대한 모든 접근 권한 반납.

로라는 그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내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가씨, 정말 아무것도 안 가져가시는 건가요? 공작저에서 지급되던 품위유지비나 보석도 전부요?"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갈 순 없죠. 어머니가 내게 따로 남겨 주신 소박한 지참금과 내가 직접 모은 소액의 환전금이면 남부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해요."

엘리아나는 서류의 먹물이 마르자 그것을 정갈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가자, 로라. 소공작님의 집무실로."


공작저 본관 3층에 위치한 카일 로젠버그의 집무실은 늘 묵직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아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서류 더미에 묻혀 있던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아나와 같은 찰랑이는 은발에 서늘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카일은 늘 완벽한 귀족의 표본처럼 냉정하고 지성적인 인상을 풍겼다.

카일은 누이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에 옅은 피로와 경계심을 담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엘리아나. 조금 전 황태자 전하께서 다녀가셨다는 보고는 받았다."

"오빠에게 드릴 서류가 있어요."

엘리아나는 망설임 없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 봉투를 내밀었다.

카일은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에서 나온 종이를 훑어내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가문 명의 포기 및 자산 반납 각서.'

카일은 서류를 책상 위에 툭 던져 놓으며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이게 무슨 촌극이지? 또 황태자 전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새로운 연극인가? 아니면 파혼을 빌미로 가문에서 더 큰 정착금이라도 뜯어내려는 계산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과거의 엘리아나는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가문의 재력을 과시하고 다른 귀족 영애들을 견제하곤 했다. 카일의 눈에 지금의 행동 역시 또 다른 얄팍한 꾀수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독설에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보라색 눈동자로 카일을 직시했다.

"계산 같은 건 없어요. 서류 아래쪽에 첨부된 장부를 보세요. 지금까지 가문에서 제게 제공했던 모든 드레스와 보석, 마차와 하수인들의 목록이 적혀 있어요. 단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전부 공작저에 두고 갈 거예요."

카일은 다시 서류의 뒷장을 펼쳤다. 엘리아나의 말대로 그곳에는 지난 5년간 그녀에게 지급된 공작가의 자산 목록이 오차 하나 없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난달 공작저 금고에서 내어 준 품위유지비의 잔액까지 동전 한 닢 단위로 기록되어 있었다.

카일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너…… 진심인가?"

"네. 저는 로젠버그라는 이름을 버리고 남부 라피스 해안으로 갈 생각이에요.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절차가 복잡해질 테니 지금 가문을 대행하는 오빠가 이 각서에 서명해 주세요."

"남부 라피스 해안? 갑자기 거기는 왜 간다는 거지?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도 멋대로 깨겠다고 소동을 피우더니 이제는 가문까지 나가겠다고?"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이유가 뭐냐! 가문에서 네게 부족하게 해 준 것이 무엇이기에 이러는 거냐고 묻고 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분노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엘리아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부족해서 떠나는 게 아니에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저는 이제 누군가와 다투고 싶지도 않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저를 증명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에요."

엘리아나의 말투는 지극히 평온했다. 원망도 분노도 서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체념의 태도였다.

카일은 그 눈빛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혔다. 만약 엘리아나가 울부짖으며 그간의 냉대에 대해 항의했다면 차라리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린 사람처럼 차분했다.

"서류에 서명해 주세요.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정리하고 싶어요."

카일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에 울렸다.

"서명할 수 없다."

"오빠."

"공작 각하의 명령대로 모든 처분은 각하께서 돌아오신 뒤에 결정할 테니 돌아가서 네 방에 잠자코 있어라."

카일은 서류를 서랍 속에 넣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엘리아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응수했다.

"서명을 안 해 주셔도 상관없어요. 전 서류 없이도 떠날 테니까요."

엘리아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카일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끝에 남아 있는 종이의 차가운 촉감이 이상하게 가슴을 옥죄어 왔다.


방으로 돌아온 엘리아나는 곧바로 짐 정리에 착수했다.

로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드레스장을 열었다. 그곳에는 화려한 비단 드레스와 고급 털망토들이 가득했다.

"아가씨, 진짜 이 예쁜 옷들을 다 두고 가시나요?"

"라피스 해안은 따뜻한 곳이에요. 이렇게 두껍고 화려한 드레스는 바닷바람을 쐬기에 거추장스럽기만 하죠."

엘리아나는 직접 옷장 앞으로 다가가 연한 면 소재의 드레스 두 벌과 편안한 가디건 그리고 굽이 낮은 구두 두 켤레만을 꺼냈다.

이어 서류함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진짜 개인 자산을 꺼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린 시절 엘리아나의 명의로 따로 남겨 준 작은 시골 영지의 소독과 빙의 후 틈틈이 보석을 팔아 마련한 현금 환전증이었다.

남부에서 작고 아담한 별장을 유지하며 소소하게 디저트를 사 먹고 길고양이를 키우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액수였다.

"로라, 공작저에서 받은 물건들은 한곳에 정돈해 둬요. 나중에 집사가 들어와서 검수하기 편하게요."

엘리아나는 책상 위의 보석 상자들과 사치스러운 장식품들을 하나하나 정갈하게 배열했다.

그녀가 방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비워 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카일이 들어왔다.

카일은 집무실에서 엘리아나가 한 말이 참말인지 직접 확인하러 온 참이었다. 그가 예상한 모습은 엘리아나가 몰래 가문의 보물을 챙기거나 짐을 싸며 억지를 부리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예상을 완벽히 배신했다.

방 안은 서늘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화려했던 보석들과 명품 드레스들은 태그가 붙은 채 침대 위에 차곡차곡 놓여 있었고 짐 가방은 오직 작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다.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정말로 방을 비우고 있었던 건가?"

엘리아나는 가방 끈을 묶다 말고 돌아보았다.

"보시는 대로예요. 공작저의 자산은 전부 여기에 둬서 손상된 건 하나도 없어요."

"엘리아나,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가문의 성을 버리고 단신으로 남부에 내려가서 어떻게 살겠다는 거지? 네가 고생을 해 보지 않아서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모양인데……!"

카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엘리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바다를 보고 갓 구운 타르트를 먹고 따뜻한 햇살 아래서 잠들 거니까요."

"그런 소소한 일들은 공작저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여기선 할 수 없어요."

엘리아나의 단호한 대답이 카일의 말을 막았다.

"여기서는 제가 타르트를 먹어도 누군가는 의도를 물을 것이고 제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면 정치적 득실을 계산하겠죠. 저는 그 모든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 순간 엘리아나의 가슴 안쪽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은 압박감에 숨이 짧게 턱 막혔다.

엘리아나는 카일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급히 책상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카일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한 걸음 다가왔다.

"엘리아나? 안색이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엘리아나는 시선을 피하며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약 한 알을 입에 넣고 삼켰다.

쌉싸름한 약운이 혀 끝에 퍼지며 통증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몸 안에 잔류하던 정화 마력이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창가에 놓여 있던 시든 화분의 줄기가 희미한 보랏빛 온기를 받자 순식간에 파릇하게 살아났다. 마른 줄기 끝에서 조그맣고 흰 꽃 봉오리가 맺히더니 톡 소리를 내며 아담한 꽃을 피웠다.

방 안에 은은하고 정갈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카일은 그 신비롭고 서정적인 마력 파동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엘리아나의 마력은 거칠고 공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발현된 마력은 타인의 마음을 아리게 할 만큼 맑고 다정했다.

'이건…… 마력이 사용자의 본성을 반영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카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때 복도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황실 전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전령은 엘리아나에게 카시안 황태자의 친인이 찍힌 문서 한 장을 건넸다.

"엘리아나 영애.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출발 승인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영애의 뜻을 존중하여 사흘이 아닌 이틀 뒤 이른 새벽 남부행 마차를 출발시키도록 조치하셨습니다. 황실 정예 호위 기사 두 명과 베르너 의사가 동행할 것입니다."

엘리아나의 얼굴에 비로소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황태자 전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카시안은 공작의 귀환 통지서가 도착한 것을 알고 일부러 출발 일정을 이틀 뒤 새벽으로 앞당겨 준 것이었다. 공작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엘리아나가 안전하게 수도를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었다.

전령이 물러간 뒤 엘리아나는 짐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틀 뒤 새벽에 떠날 거예요. 오빠,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제가 조용히 떠났다고 말씀해 주세요."

카일은 서재 서랍 속에 넣었던 가문 포기 서류를 떠올렸다. 차가운 이성을 자랑하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생의 뒷모습을 잡아야 한다는 강렬한 본능을 느꼈다.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 잡아야 한단 말인가? 그동안 그녀를 오해하고 차갑게 방치했던 것은 바로 자신과 가문이 아니었던가.

카일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저 떠나가는 엘리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나는 텅 빈 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창가에 새로 피어난 흰 꽃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정말 바다가 가까워졌어.'

엘리아나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마음만큼은 바다처럼 더없이 넓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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