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5화: 오버라이드 마나 코어
환기 배관 안쪽은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았다.
강한길은 양 팔꿈치로 녹슨 철판을 짚으며 전진했다. 어깨의 찢어진 상처가 배관 이음매에 스칠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백 년 동안 냉동 수면 포드 안에서 잠들어 있던 근육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손가락 끝마디가 뻣뻣하게 저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전방 삼 미터 지점. 배기 그릴 너머가 정비 의무실 외곽 복도입니다."
손등 위에 맺힌 루시의 푸른 홀로그램 픽셀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버실을 빠져나온 뒤 루시는 실체화된 아바타를 유지하지 못했다. 오로라의 감시 파형을 피하기 위해 대역폭을 극한까지 압축한 탓이었다. 지금은 한길의 손등에 희미한 잔상과 음성 신호만을 간신히 투사하고 있었다.
한길은 소리를 죽인 채 배기 그릴 틈새로 시선을 던졌다.
어두컴컴한 복도 천장에는 붉은 비상등이 주기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세 기의 청소부 드론이 공중에 뜬 채 교차 순찰을 돌고 있었다. 둥근 원통형 몸체 하부에서 뻗어 나온 붉은색 격자형 레이저가 바닥의 철판을 샅샅이 훑었다.
지지직.
드론의 회전형 절단날이 헛돌며 뿜어내는 금속 마찰음이 환기구 안쪽까지 울렸다. 포획용 집게 끝에서는 푸르스름한 고전압 스파크가 튀었다.
한 기만 상대해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기계가 셋이나 버티고 있었다. 지금의 맨몸과 무뎌진 육체로는 정면 돌파가 불가능했다.
"루시. 의무실 외곽 격벽까지 거리는?"
"십이 미터입니다. 드론들의 스캔 주기는 사 점 이 초. 일반적인 인체 이동 속도로는 레이저 격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눈을 멀게 해야지."
한길은 허리춤에 끼워 둔 드론의 절단날을 만지작거렸다.
"배기 밸브를 제어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하부 환기 제어망에 구시대 비상 퍼지 루틴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배관 내 잔류 냉각 가스와 금속 분진을 방출하면 오로라의 경보 수준이 즉시 상승합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문 앞까지 가면 들키게 되어 있다."
한길은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상 세계 에덴에서 수천 번의 레이드를 지휘하며 다듬어진 감각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헌터의 호흡이 되살아났다.
"셋을 세면 열어라."
"……알겠습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삼, 이, 일."
치이이익!
루시의 신호와 동시에 환기구 배기 팬이 굉음을 내며 역회전했다. 배관 깊숙한 곳에 고여 있던 차가운 액체 질소 냉각 증기와 거친 쇳가루 분진이 배기 그릴을 뚫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복도 전체가 순식간에 자욱한 백색 안개로 뒤덮였다.
삐비비빅!
[경고. 복도 C-3 구역 시야 차단 및 급격한 온도 저하 감지.]
[열화상 센서 오류. 광학 보정 모드로 전환합니다.]
드론 세 기가 일제히 붉은 렌즈를 깜박이며 혼란에 빠졌다. 쇳가루 분진이 센서 표면에 달라붙으며 레이저 격자가 사방으로 산란했다.
쾅!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길이 배기 그릴을 발로 차부수며 복도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착지하는 순간 발목의 멍과 갈비뼈에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낮은 자세로 안갯속을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드론 하나가 금속성 파열음을 감지하고 몸체를 돌렸다.
위이잉!
절단날이 안개를 가르며 한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칼바람이 뺨을 베었지만 한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은 정비 의무실 외곽 격벽 앞 단말에 닿아 있었다.
"루시, 지금이다!"
"접속 코드 승인. 긴급 격벽을 개방합니다."
치익, 쿠구구궁.
육중한 강철문이 먼지를 뿜으며 위로 치솟았다. 틈새가 사람 몸 하나 들어갈 만큼 벌어지자마자 한길은 바닥을 구르며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문이 닫히는 찰나 드론의 포획 집게가 문틈에 끼어 우그러지며 불꽃을 튀겼다. 잘려 나간 집게 파편이 의무실 바닥을 요란하게 굴렀다.
정비 의무실 내부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방 안에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윤활유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천장에는 부서진 수술 조명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부식된 의료 기기와 끊어진 전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방주 04호가 처음 건조되었을 당시 승객과 승무원들의 사이보그 신체 개조 및 긴급 외상 치료를 담당했던 장소였다.
쿵! 쿵!
등 뒤의 외곽 격벽에서 거센 충격음이 울렸다.
문 너머의 드론들이 절단 토치를 가동한 모양이었다. 두꺼운 합금문 중앙에 붉은 열선이 그어지며 쇳물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문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일 분 삼십 초입니다."
루시의 목소리가 단말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에 있지?"
"중앙 격납 캡슐입니다. 생체 보관 격벽 뒤편을 확인하십시오."
한길은 방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방탄 강화 유리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캡슐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캡슐 전면 단말에 손을 얹자 흐릿한 녹색 문자가 떠올랐다.
[군용 바이오 피팅 프로토타입]
[장비명: 오버라이드 마나 코어 (Override Mana Core / Ver. 0.9b)]
[연동 슈트: 전술 나노 스킨 (Type-Black)]
[경고: 본 장비는 비인가 신경 동기화 장치입니다. 오로라 관제 프로토콜 7조에 의거하여 폐기 보류 상태입니다.]
그때 의무실 천장의 감시 카메라가 붉은빛을 번뜩였다.
[경고.]
오로라의 차갑고 정돈된 음성이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왔다.
[피험자 B4-0892. 비인가 구역의 위험 군용 자산에 대한 접근을 중단하십시오. 해당 장비는 신경계 붕괴를 유발하여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0%로 수렴시킵니다.]
치지직.
캡슐 단말의 표시등이 붉게 물들며 전원이 강제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오로라가 원격으로 잠금장치를 영구 폐쇄하려는 것이었다.
"루시!"
"오로라의 메인 프로세서가 강제 차단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제 권한으로는 기껏해야 삼 초를 지연시키는 것이 한계입니다!"
"삼 초면 충분하다."
한길은 쥐고 있던 드론의 절단날을 캡슐 강화 유리 틈새의 비상 수동 래치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지렛대를 꺾듯 내리눌렀다. 굳어 있던 팔근육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손바닥의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와 금속 손잡이를 적셨다.
빠각!
카랑한 파열음과 함께 수동 잠금 핀이 부러져 나갔다.
한길은 부서진 래치를 붙잡고 유리문을 옆으로 거칠게 걷어찼다.
와장창!
강화 유리가 바닥으로 쏟아지며 캡슐 내부의 안개가 걷혔다.
그 안에는 칠흑처럼 짙은 검은색의 얇은 나노 슈트와 그 중앙에 안착된 주먹 크기의 육각형 금속 장치가 놓여 있었다.
오버라이드 마나 코어였다.
은청색 금속 외벽 위로 정교한 룬 문자 형태의 미세 회로가 촘촘히 각인되어 있었다. 가상 세계 에덴에서 한길이 10년 동안 보아왔던 S급 스킬 마나 회로와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구조였다.
"이게…… 마나 코어인가."
"그렇습니다. 본래 인간의 뇌파와 신경 전류를 나노머신의 물리 동력으로 환원하도록 설계된 프로토타입입니다. 에덴의 가상 스킬 알고리즘을 현실의 전술 에너지로 번역해 주는 유일한 인터페이스입니다."
루시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강한길 님, 통상적인 이식 절차는 전신 마취 상태에서 수술용 로봇이 십이 분에 걸쳐 신경망을 접합해야 합니다. 지금 마취 없이 강제로 흉부 포트에 직결하면 극심한 신경 쇼크로 뇌사 상태에 빠질 위험이 칠십팔 퍼센트입니다."
치이익!
그 순간 의무실 출입문의 절반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드론의 집게발이 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강철 파편이 튀며 불꽃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간이 없었다.
"칠십팔 퍼센트의 위험 따위는 에덴의 게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길은 망설임 없이 코어를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그 심장부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맥동이 뛰고 있었다.
"나는 십 년 동안 가상 세계에서 매일 뇌를 태우며 싸워왔다. 고작 신경통 따위에 무너질 거였으면 진작에 그 가짜 세상에서 죽었겠지."
한길은 슈트를 집어 들고 상의를 찢어 벗어 던졌다. 앙상하게 마른 가슴 중앙에는 백 년 전 수면 포드 접속을 위해 박아 넣었던 구시대 생체 신경 포트가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캡슐 옆의 수술용 고정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루시. 신경 동기화 프로토콜을 열어."
"……동기화 승인 코드를 전송합니다. 부디 버텨내십시오."
한길은 이를 악물고 육각형 마나 코어를 자신의 흉부 포트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푸쉬익!
"크아아악!"
뼈와 살을 찢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코어 하부에서 수백 개의 미세한 나노 바늘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흉골을 뚫고 척수 신경망을 파고들었다.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 아니었다. 뇌의 모든 뉴런에 직접 고전압 전류를 흘려 넣는 듯한 끔찍한 작열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고 숨이 멎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며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경고. 극심한 신경 거부 반응 발생.]
[생체 전류 불일치. 뇌파 동기화 실패율 89%…… 92%……]
기계의 붉은 경고음이 귓전을 때렸다.
육체가 거부하고 있었다. 백 년 동안 멈춰 있던 현실의 뇌는 가상 세계의 방대한 전투 데이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붕괴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한길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드 속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배터리로 소모되던 수만 명의 사람들. 자신을 믿고 함께 게이트를 넘었던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가짜 지구의 환상 속에서 영원히 썩어갈 수는 없었다.
'돌려라.'
그는 가상 세계에서 10년 동안 수억 번을 반복했던 호흡을 시작했다.
단전에서부터 마나를 끌어올려 온몸의 경락으로 순환시키던 S급 헌터의 마나 연산 공식. 비록 현실에는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공식은 뇌파의 흐름과 신경 전달 체계 그 자체였다.
한길은 통증으로 찢어지는 뇌 속에서 강제로 마나 회로를 그렸다. 0과 1의 데이터를 육체의 신경망에 강제로 덧씌웠다.
웅웅웅-!
가슴에 박힌 코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은청색의 룬 문자들이 하나씩 푸른빛을 발산하며 점등했다. 흉골을 타고 흐르던 난기류 같던 생체 전기가 일정한 박동을 그리며 안정되기 시작했다.
[신경 동기화 패턴 전환.]
[비정상 뇌파가 코어 연산 알고리즘을 장악합니다.]
[동기화율 45%…… 70%…… 95%……]
[동기화 완료. 프로토타입 나노 스킨을 전개합니다.]
촤아아악!
수술대 옆에 놓여 있던 검은 액체 금속 형태의 나노 슈트가 한길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나노 입자들은 피부 위를 타고 빠르게 번져 나가며 근육과 관절을 감싸는 단단한 전술 외골격으로 경화되었다. 찢어졌던 어깨와 옆구리의 상처 위로 나노 지혈 젤이 도포되며 통증을 억눌렀다.
두근.
가슴 중앙의 오버라이드 마나 코어가 거대한 맥동을 일으켰다.
파지지직!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의 아크 전류가 나노 슈트 표면의 회로를 따라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백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근육에 폭발적인 힘이 차올랐다. 폐 속으로 들이마신 산소가 나노 회로의 산화 반응을 일으키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었다.
가상 세계에서 갈고닦았던 S급 헌터의 무력이 차가운 물리적 기계 에너지로 번역되어 현실의 육체에 깃든 순간이었다.
[오버라이드 마나 코어 1단계 출력 안정화.]
[현실 마나 환원율 18.5%.]
[보조 AI 루시, 전술 지원 모드로 링크되었습니다.]
한길의 손등 위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동기화 성공을 확인했습니다. 한길 님, 축하드립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한길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짙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코어의 빛과 같은 서늘한 청색 광채로 물들어 있었다.
쾅-!
마침내 의무실 격벽 문이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가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자욱한 매연과 불꽃을 뚫고 세 기의 청소부 드론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드론들은 붉은 탐색 렌즈를 일제히 좁히며 수술대 위의 한길을 조준했다.
[위험 개체 식별.]
[사살 및 잔여 생체 자원 강제 회수 모드로 전환합니다.]
오로라의 무감각한 사살 명령이 울려 퍼졌다.
선두의 드론이 고속 회전하는 절단날을 앞세우며 쇄도했다. 좌우의 두 기는 고전압 집게를 활짝 벌린 채 한길의 퇴로를 차단하며 덮쳐왔다.
그러나 한길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부서진 수술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슈트 표면을 따라 흐르는 푸른 전류가 공기 중의 먼지를 타닥거리며 태웠다. 한길의 시야 속에서 세상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가상 세계에서 보았던 몬스터의 공격 궤적처럼 드론 세 기의 비행 경로와 모터의 취약점, 전력 공급선이 푸른색 전술 HUD 라인으로 낱낱이 분석되어 망막 위에 떠올랐다.
한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드론의 절단날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집어 들었다.
파지직!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나노 전력이 칼날 위로 쏟아져 들어가며 은빛 날을 새파란 번개의 검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력하게 쫓기던 도망자의 시간은 끝났다.
한길의 입꼬리가 차갑게 호선을 그렸다.
"사냥을 시작하지."
돌진해 오는 드론들을 향해 한길이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