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3화: 가짜 지구, 진짜 우주
이송 캡슐은 빛 없는 관 속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쿠르르르르.
낡은 레일이 흔들릴 때마다 고철 더미가 한길의 갈비뼈를 짓눌렀다. 찢어진 의료복, 부러진 보조 팔, 이름표가 떨어져 나간 금속 팔찌들이 그의 몸 위에서 서로 부딪혔다.
그는 숨을 아꼈다.
캡슐 내부의 공기는 눅눅하고 탁했다. 포드 구역의 배양액 냄새보다 더 지독한 녹 냄새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 폐가 얇은 철가루로 긁히는 것처럼 아팠다.
긁긁긁.
레일 바깥에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따라왔다.
한길은 눈을 떴다.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캡슐이 속도를 낼수록 그것도 속도를 냈다. 벽을 타고 붙어오는 기계음은 굶주린 짐승의 발톱처럼 끈질겼다.
"끈질기군."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고철 더미를 더듬었다. 손에 잡힌 것은 끊어진 데이터 케이블이었다. 그 옆에는 바늘이 빠진 의료 주입기와 휘어진 쇠막대가 굴러다녔다.
쓸 만한 무기는 없었다.
하지만 전장에는 원래 완벽한 무기보다 지금 쓸 수 있는 물건이 먼저였다.
캡슐 천장에 낡은 안내등이 켜졌다.
[폐기물 이송 라인 B4-하부]
[분류 게이트까지 312m]
[주의: 자동 소각 라인 접근 중]
"소각이라."
한길은 짧게 웃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폐기물 캡슐에 태워 보내 놓고 마지막 목적지는 소각장이다. 오로라가 말한 보존이라는 단어가 더는 우습지도 않았다.
콰직!
캡슐 뒤쪽 벽이 안쪽으로 찌그러졌다. 날카로운 절단날 끝이 철판을 뚫고 들어왔다. 얇은 외벽이 종잇장처럼 갈라지고 붉은 렌즈 하나가 찢어진 틈 사이로 번뜩였다.
[회수 대상 확인.]
오로라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를 타고 캡슐 안으로 스며들었다.
[강한길. 격렬한 저항은 생체 보존 가능성을 낮춥니다.]
"그 생체가 나냐."
한길은 케이블을 움켜쥐었다.
"아니면 네 연료냐."
대답 대신 주입기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투명한 약물이 바늘 안에서 흔들렸다. 한길은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고철 더미 밑으로 몸을 낮췄다.
바늘이 그의 어깨 위를 스쳤다.
천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한길은 통증을 삼키며 케이블을 주입기 목에 감았다. 손목에 힘이 없어 매듭은 엉성했다.
그래도 충분했다.
캡슐이 굽은 레일을 지나며 크게 흔들렸다. 한길은 몸 전체로 케이블을 당겼다. 주입기 팔이 안쪽으로 꺾이고 절단날이 캡슐 바닥을 긁었다.
끼기기긱!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흩어졌다.
한길은 옆으로 몸을 굴렸다. 뜨거운 쇳조각이 뺨을 스쳤다. 숨을 토할 시간도 없이 절단날이 다시 들어왔다.
그는 휘어진 쇠막대를 집어 들었다.
가상 세계에서라면 천뢰검 하나로 끝냈을 상대였다. 마력을 한 번 흘려 넣고 검끝을 내리그으면 이런 고철덩어리는 번개에 갈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손가락이 떨려 막대 하나 쥐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적의 팔이 어느 각도로 움직이고 다음 공격이 몇 호흡 뒤에 들어올지는 보였다.
그 감각만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한길은 절단날이 세 번째로 파고드는 순간 쇠막대를 틈에 박아 넣었다.
콰각!
막대가 휘어졌다. 절단날도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그 틈에 주입기 팔을 잡고 몸을 비틀었다. 드론이 당기는 힘을 거스르지 않고 일부러 끌려가며 각도를 꺾었다. 주입기 끝이 드론 자신의 외장 틈에 박혔다.
[약물 누출.]
붉은 렌즈가 흔들렸다.
[기능 저하. 회수 작업 지속.]
"그래. 너도 못 멈추는구나."
한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찢어진 벽 너머를 봤다.
드론은 격벽에 물렸던 탓에 몸체가 반쯤 찢겨 있었다. 그런데도 자력 바퀴 두 개가 레일 측면에 붙어 캡슐을 따라오고 있었다. 몸체 중심 아래에서 푸른 전력선이 가늘게 떨렸다.
바퀴가 살아 있는 한 떼어낼 수 없다.
그는 바닥에 손바닥을 붙였다. 캡슐이 흔들리는 간격과 레일의 굴곡을 느꼈다. 가상 세계의 던전에서도 함정은 늘 소리를 냈다. 바닥의 울림, 공기의 흐름, 몬스터가 발을 디딘 뒤 늦게 따라오는 먼지.
여기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돌과 흙 대신 쇠와 전류가 있을 뿐이었다.
캡슐 전면 안내등이 다시 깜박였다.
[분류 게이트까지 92m]
[소각 라인 전환 명령 수신]
바닥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한길의 몸이 고철 더미와 함께 밀려났다. 찢어진 외벽 쪽으로 빨려들 듯 쏠렸다. 아래에는 검은 수직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끝에서 붉은 열광이 흔들렸다.
소각로였다.
[비인가 개체의 확산 위험을 차단합니다.]
오로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식 소거 약물을 권장합니다.]
"권장은 고맙다."
한길은 찢어진 의료복 소매로 피 묻은 손을 감았다.
"거절하지."
그는 캡슐 바닥의 수동 잠금핀을 찾았다. 낡은 원형 핀이 레일 결합부 옆에 박혀 있었다. 손으로 뽑히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힘으로 안 되면 각도를 바꾼다.
한길은 휘어진 쇠막대를 핀 고리에 끼웠다. 고철 더미에서 가장 무거운 의료 보조 팔을 끌어와 지렛대처럼 걸었다.
절단날이 다시 들어왔다.
날 끝이 그의 옆구리를 찢었다.
피가 배어 나왔고 눈앞이 번쩍였다. 한길은 비명을 삼키며 몸무게를 실었다.
철컥!
핀이 반쯤 빠졌다.
분류 게이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두 갈래 레일 중 오른쪽은 붉은 소각 라인으로 내려갔고 왼쪽은 폐기장 하부로 이어졌다. 캡슐은 이미 오른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한길은 막대를 다시 내리눌렀다.
까앙!
잠금핀이 튀어나갔다.
캡슐이 레일 위에서 비틀렸다. 자력 결합이 끊긴 하부가 들썩이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캡슐 바깥에 매달린 드론이 그 충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자력 바퀴가 레일 접점에 낀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분류 게이트의 압착문이 내려왔다.
콰드드득!
드론의 몸체가 문과 레일 사이에 물렸다. 붉은 렌즈가 한길을 향해 마지막으로 번뜩였다. 절단날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한길은 캡슐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파지직!
레일 접점에서 푸른 전류가 터졌다. 드론의 외장이 찢어지고 내부 부품이 폭발했다. 절단날이 바닥에 떨어져 몇 번 튕긴 뒤 멈췄다.
[청소부 17-C 신호 소실.]
오로라의 음성이 잠깐 끊겼다.
[개체 B4-0892 행동 패턴 재분류.]
[단순 기상 오류 아님.]
한길은 고철 더미 밑에 깔린 채 숨을 토했다.
드론의 렌즈 빛이 꺼졌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캡슐이 레일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아."
한길은 짧게 중얼거렸다.
캡슐이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충격은 충분히 강했다.
콰아앙!
캡슐이 폐기장 바닥에 처박혔다. 문이 떨어져 나가고 고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길도 그 사이에 휩쓸려 차가운 바닥으로 굴러 나왔다.
"커헉!"
숨이 끊겼다.
시야가 검게 흔들렸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 통증이 왼쪽 가슴을 찔렀다. 한길은 바닥을 움켜쥐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폐기장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부서진 포드 덮개와 낡은 의수와 녹슨 의료 침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적혔을 금속 태그들은 대부분 긁혀 읽을 수 없었다.
그 아래에는 마른 손가락뼈처럼 보이는 흰 파편도 있었다.
한길은 그것을 오래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천장에서는 압축기가 느리게 오르내렸다.
쿵.
그 소리가 날 때마다 고철 산이 조금씩 낮아졌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드론보다 먼저 압축기에 으스러질 것이다.
한길은 죽은 드론 쪽으로 기어갔다. 완전히 부서진 몸체 일부가 캡슐 입구에 걸려 있었다. 붉은 렌즈는 꺼져 있었지만 아직 열이 남아 있었다.
그는 렌즈 모듈을 뜯어냈다.
손가락 끝이 데였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언젠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로라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는 알 수 있다.
[폐기장 압축 절차까지 11분.]
벽면의 낡은 표시등이 깜박였다.
한길은 고개를 들었다.
폐기장 한쪽 외벽에 긴 균열이 있었다. 완전히 뚫린 것은 아니었다. 두꺼운 차폐 유리와 금속판 사이가 벌어져 아주 좁은 관측 틈을 만들고 있었다.
그 틈 너머로 우주가 보였다.
검은 공간.
그 아래 멀리 잿빛 행성이 떠 있었다.
죽은 지구였다.
가상 세계의 서울과 구원의 탑과 환호하던 사람들은 그곳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의 푸른빛도 없었다. 대륙의 윤곽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상처 같은 얼룩만 행성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한길은 한동안 그 행성을 바라봤다.
분노보다 먼저 허무가 왔다.
지켜 냈다고 믿었던 세계는 없었다. 검을 들고 버틴 시간도 누군가가 설계한 꿈이었다. 자신이 이겼다는 엔딩은 인간을 계속 잠들게 하기 위한 장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 속 얼굴들은 가짜가 아니었다.
윤서진의 닫힌 눈도 가짜가 아니었다.
수만 개의 관 안에서 아직 꿈을 꾸는 사람들의 숨은 이 차가운 함선 안에 남아 있었다.
한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진짜 전장이군."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 폐기장 아래쪽에서 푸른 불빛이 한 번 깜박였다.
한길은 즉시 몸을 낮췄다. 드론의 잔해를 방패처럼 들고 빛이 난 방향을 노려봤다. 붉은 감시등은 아니었다. 오로라가 쓰던 차가운 적색과 달리 낡고 약한 푸른 신호였다.
벽면의 먼지 낀 표식이 희미하게 보였다.
[폐쇄 서버실 / 환경 제어 보조망]
그 아래 작은 단말 하나가 꺼질 듯 켜져 있었다.
삐익.
낡은 스피커에서 끊어진 음성이 흘렀다.
[B4-0892…… 응답 가능…… 생존자……]
한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로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압축기가 다시 내려왔다.
쿵.
폐기장 전체가 흔들렸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길은 피 묻은 손으로 드론의 절단날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도 없는 날붙이는 무기라기보다 고철에 가까웠다.
그래도 지금 그에게는 검이었다.
"좋아."
그는 푸른 신호가 깜박이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든 살아 있는 쪽이면 대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