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6화: 전설의 시작
아침 햇살이 건조장 바닥에 길게 내려앉았다.
백운휘는 대나무 발 위에 널어 둔 약재들을 하나하나 뒤집으며 살폈다. 덜 마른 자소엽에서는 풋풋한 풀내가 올라왔고 황련 뿌리는 밤이슬을 털어내며 노란 속살을 드러냈다.
"도윤 사제."
곁에서 멍하니 서 있던 도윤이 흠칫 놀라며 돌아봤다.
"예, 예? 백 사제."
"백령화 뿌리가 든 통이 바닥을 보입니다. 지난겨울에 묵혀 둔 건 향이 다 날아가서 달여도 맹물 맛밖에 안 나겠어요."
운휘는 낡은 목제 보관함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윤은 말문이 막혔다. 불과 몇 시진 전 맹독 침을 든 살수가 침입해 문패를 부수고 약방을 쑥대밭으로 만들 뻔했다. 자신의 목덜미에는 여전히 독침에 긁혔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몸도 온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운휘는 아침이 밝자마자 약초 향이 싱겁다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백 사제는 간밤의 일이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무섭지요. 그 도둑놈이 자소엽 상자를 발로 찰 뻔하지 않았습니까. 상자가 부서졌으면 올가을 약방 자용초는 구경도 못 할 뻔했습니다."
운휘는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윤은 그 표정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침입자가 부러뜨린 것은 상자가 아니라 살수의 허리뼈였고 휘어 버린 것은 맹독이 서린 강철 침이었다.
"어디서 약초를 채우시려는 겁니까? 산 위쪽 골짜기는 요즘 안개가 짙어서 험합니다."
"화산 안쪽 골짜기는 손을 너무 탔습니다. 산 아래 화음현 장터로 나가야겠습니다. 장터 약전 골목에 가면 인근 심마니들이 캐 온 백령화 생뿌리가 제법 들어옵니다. 겸사겸사 하남 쪽 산자락도 훑고 오면 좋겠고요."
"하산 말입니까?"
도윤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석 노인이 작두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긴 노인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운휘야. 네가 지금 산을 내려가겠다고?"
"예, 어르신. 약방 약재 창고가 너무 부실합니다. 흑설초 같은 독초나 찾으러 도둑이 들 정도면 다른 귀한 보혈 약재는 얼마나 말랐겠습니까. 제가 발품을 팔아 넉넉히 사 오거나 캐 오겠습니다."
운휘는 당연하다는 듯 낡은 약초 배낭을 털어 먼지를 털어냈다.
그때 건조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매화검을 허리에 찬 백향란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단정한 미간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가 하산을 해?"
운휘가 반갑게 웃으며 돌아봤다.
"사형,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하산 허락 패를 한 장 내어 주십시오. 화음현 장터에 내려가 백령화 뿌리도 사고 인근 약초 상인들도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백향란은 팔짱을 끼며 운휘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너 제정신이냐? 간밤에 살수가 네 목에 독침을 들이댔다. 화산의 약방 사정을 훤히 아는 놈들이 산 아래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딜 나간다는 거야?"
"약초를 사러 나가는 겁니다. 볕 좋을 때 사 와야 말리지요."
"약초가 네 목숨보다 중해?"
"목숨이야 멀쩡히 붙어 있지 않습니까."
운휘는 목을 긁적였다. 백향란의 시선이 운휘의 목덜미로 향했다. 어젯밤 시퍼런 독침이 닿았던 자리에는 붉은 자국조차 없었다. 쇠붙이가 부딪쳐 튕겨 나간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백향란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주먹을 쥐고 꿀밤을 한 대 먹이려 팔을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지난번 솥뚜껑과 어젯밤 살수의 꺾인 허리를 생각하면 자기 손가락 뼈가 먼저 부러질 것 같았다.
"안 돼. 당분간 넌 약방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장문인께서도 네 신변을 각별히 지키라 하셨어."
"사형, 약초는 때가 있습니다. 백령화는 초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뿌리를 캐서 덖어야 단맛이 돕니다. 지금을 놓치면 내년 봄까지 씁쓸한 묵은 뿌리로 탕을 끓여야 합니다."
운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둔하고 순박한 얼굴이었지만 약초에 관한 고집만큼은 화산의 어느 절정 고수보다 완강했다.
백향란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녀석을 억지로 힘으로 누를 수도 없었다. 지난밤 내력을 불어넣었을 때도 자신의 진기는 운휘의 몸 안에서 봄눈 녹듯 흩어져 버렸다. 억지로 막아서다가는 도리어 무슨 기행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따라와."
"어디로 갑니까? 장터 가는 길입니까?"
"장문인 처소다. 장문인께서 허락하시면 나도 안 말린다. 하지만 허락 안 하시면 얌전히 건조장에 틀어박혀 있어."
"좋습니다. 장문인께도 백령화 탕약 한 사발 올리겠다고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실 겁니다."
운휘는 싱글벙글 웃으며 백향란의 뒤를 따랐다. 도윤과 석 노인은 불안한 눈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산파 본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자하전(紫霞殿).
처마 끝에 걸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붉은 목재로 짜인 전각 안에는 은은한 매화향과 묵향이 감돌고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존 백서진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백발을 단정히 관으로 묶은 그의 눈매는 깊고 그윽했다. 탁자 위에는 지난밤 회수한 휜 독침과 약방 구조도가 놓여 있었다.
"장문인. 외문제자 백운휘를 데려왔습니다."
백향란이 포권을 취하며 아뢰었다.
장문인은 붓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백향란의 뒤에 서 있는 운휘에게 닿았다.
삼베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약초 주머니를 찬 청년. 단전에는 티끌만 한 진기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호흡은 지극히 평범한 범인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눈은 속지 않았다.
'기혈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의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어 무(無)의 상태를 이루고 있구나.'
장문인은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화산의 비전 심법을 수십 년 연마한 자신조차 이토록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는 없었다. 쇠붙이를 부러뜨리고 맹독을 무색하게 만드는 육신을 지니고도 저토록 태연자약한 모습이라니.
"운휘라 하였느냐."
"예, 장문인 어르신. 약방에서 풀 뜯는 백운휘입니다."
운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은 휜 독침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간밤에 약방에 흉험한 무리가 들었다 들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목이 조금 간지러웠을 뿐 멀쩡합니다. 그보다 약초 도둑이 들어서 놀랐습니다."
"약초 도둑이라..."
장문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사파의 정예 살수를 일개 잡도둑으로 치부하는 배포로구나. 십 년간 외문 약방에 숨어 지내며 세상의 풍파를 한낱 먼지로 보아 넘긴 것인가.'
장문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향란이에게 들었다. 네가 산을 내려가려 한다고."
"예, 장문인 어르신. 허락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장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강호는 흉흉하다. 사파의 잔당들이 어둠 속에서 준동하고 있고 지난밤의 침입자 역시 그 거대한 암류의 일각일 터. 화산의 그늘 아래 머무는 것이 안전할 텐데 어찌 굳이 험한 세상으로 나가려 하느냐?"
운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파니 암류니 하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운휘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산에만 갇혀 있으면 썩은 풀을 골라내지 못합니다."
장문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썩은 풀이라..."
"예. 밭에 잡초와 해충이 들끓으면 제때 솎아내야 땅이 숨을 쉽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멀쩡한 약초 뿌리까지 죄다 썩어 버리지요. 산 아래 장터와 들판에 나가 흙도 만져보고 상한 줄기는 쳐내야 좋은 약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운휘는 그저 약초밭 관리하는 법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썩은 풀과 해충을 솎아낸다... 강호에 독버섯처럼 번지는 사악한 무리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뜻이로구나! 화산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직접 세상의 탁기를 바로잡겠다는 결의로다.'
장문인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무공의 경지가 극에 달해 화경을 넘어서면 속세의 무학에 연연하지 않고 천지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된다고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척 흙을 만지며 은거하던 이 기인이 마침내 강호의 어지러움을 정화하기 위해 첫걸음을 떼려는 것이었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내 어찌 막겠느냐."
백향란이 화들짝 놀라며 나섰다.
"장문인! 운휘는 아직..."
"향란아."
장문인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거목은 온실 안에서 자라지 않는 법이다. 운휘의 눈에는 이미 천하의 판도가 한 폭의 약초밭처럼 보이고 있거늘 우리가 좁은 식견으로 그 발걸음을 묶어둘 수는 없다."
백향란은 멍하니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장문인의 얼굴에는 깊은 경외와 감격이 서려 있었다.
운휘는 장문인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하산을 허락받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어르신! 좋은 백령화 뿌리를 구해 오면 어르신 몫으로 진하게 한 사발 달여 올리겠습니다."
장문인은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眞氣)를 보양하는 신비한 영약 탕을 친히 내려주겠다는 약조로구나.'
장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옥패 하나와 묵직한 전대를 꺼냈다. 서안 위에 올려진 옥패에는 붉은 매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화산의 장로들에게만 주어지는 화산옥패(華山玉牌)다. 강호 어디를 가든 화산파의 문도들이 너를 상전으로 받들 것이며 정파의 문파들 또한 네 길을 함부로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대로 필요한 물품을 구하도록 하여라."
운휘는 옥패와 은자 전대를 받아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귀한 걸 주셔도 됩니까? 옥패는 잃어버릴까 겁나니 배낭 깊숙이 넣어두겠습니다. 은자는 장터에서 약재 살 때 아주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운휘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는 신이 나서 전각을 나섰다.
백향란은 복잡한 심경으로 운휘의 뒤를 따랐다.
자하전을 나온 백향란은 운휘를 약방으로 끌고 가 두꺼운 털외투와 비상 약낭을 억지로 안겨주었다.
"사형, 날씨가 아직 따뜻한데 외투는 너무 두껍습니다."
"산길 밤바람이 얼마나 찬지 알고 하는 소리야? 그리고 돈 자랑하고 다니지 마. 주막에 들르면 꼭 문단속하고."
백향란은 투덜거리면서도 운휘의 배낭 끈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네가 네 몸을 알긴 뭘 알아..."
백향란은 한숨을 쉬며 운휘의 어깨를 툭 쳤다. 단단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어깨였다.
정오 무렵.
화산파의 거대한 산문 앞마당에 바람이 불어왔다.
운휘는 낡은 목제 약초 배낭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닳고 닳은 약초 곡괭이를 쥐었다. 허리춤에는 물을 담은 표주박과 장문인이 준 전대가 덜렁거렸다.
"어르신과 도윤 사제 모두 다녀오겠습니다. 볕 좋은 날 황련 발 뒤집는 거 잊지 마십시오!"
운휘는 손을 크게 흔들며 돌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약방 식구들과 백향란이 산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높은 절벽 위 난간에는 장문인 백서진이 서 있었다. 장문인은 바람에 휘날리는 도포 자락을 잡으며 운휘의 묵묵한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장문인. 정말 괜찮겠습니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백향란이 조용히 물었다.
장문인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보아라.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무림의 험난한 풍파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마치 뒷산 마실을 나가는 아이처럼 평온하구나."
"..."
"세상이 그를 약초꾼이라 부를지 아니면 화산의 신룡이라 부를지는 머지않아 판가름 날 것이다. 전설이 산을 내려가는구나."
장문인의 낭랑한 읊조림이 화산의 봉우리를 맴돌았다.
그 시각 운휘는 산길을 내려가며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백령화도 사고 소문으로만 듣던 용혈초 냄새도 한번 맡아보면 좋겠는데. 시장에 국밥 잘하는 집이 어디 있더라?"
강호의 무림맹과 사파의 고수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칼도 독도 통하지 않는 전설의 약초꾼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