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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5화

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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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화산의 비공개 고수

도윤은 건조장 뒤편 방의 문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 위에는 검이 놓여 있었다. 약방 담장을 훑은 낯선 발자국은 분명 이 근처에서 끊겼다.

방 안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윤 사제. 아직 안 주무십니까?"

"경계 중입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도윤은 곧장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창문을 조금만 열어 주십시오. 황련 뿌리가 밤바람을 쐬면 덜 눅눅해집니다."

도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밤에 약초 바람부터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창문은 안 됩니다."

"그럼 내일 볕 들기 전에 발을 뒤집어야겠군요."

운휘는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윤은 말린 약초 향 사이로 묽고 쇠붙이처럼 서늘한 기름 냄새를 맡았다.

동백기름보다 묽고 쇠붙이처럼 서늘한 냄새였다.

도윤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백 사제. 방 안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가 원래는 잘 안 움직이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장 너머에서 마른 기와 하나가 굴렀다.

도윤은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검집이 바닥을 박차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담 위에서 떨어졌다. 그림자의 발끝이 도윤의 검을 살짝 밟았다.

쿵.

짧은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도윤은 두 걸음 밀려났다. 상대는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약방 마당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건조장의 약초 발을 흔들었다. 널어 둔 자소엽이 파르르 떨렸다. 도윤은 상대가 담장을 넘은 곳을 바라보며 검을 세웠다.

그때 뒤에서 문고리가 움직였다.

도윤은 돌아섰다. 그러나 한 걸음 늦었다.

문틈에서 가느다란 검은 선이 튀어나와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살갗이 따끔해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기울었다. 그는 검을 놓지 않으려 손가락에 힘을 줬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도윤 사제?"

운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도윤은 문턱에 쓰러지며 이를 악물었다. 독침이었다. 겨우 한 번 스친 것뿐인데 팔다리가 얼음물에 잠긴 듯 무거웠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손가락 끝에는 회색 기름이 묻어 있었다.

운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침입자가 든 짧은 칼보다 사내의 손가락에 묻은 가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냄새군요."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지?"

"독초 보관함 문틀에 묻어 있던 기름 냄새 말입니다. 약초 냄새를 지우려고 바른 겁니까?"

침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끝을 운휘의 목에 겨눴다.

"열쇠는 어디 있지?"

"무슨 열쇠요?"

"흑설초와 칠보등이 든 칸의 열쇠다. 내놓으면 다치지 않는다."

운휘는 침입자를 다시 살폈다. 사내는 약초 이름을 정확히 알았다. 칠보등은 말린 줄기만 보아서는 그저 누런 뿌리처럼 보이는 약재였다. 약방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찾을 수 없었다.

"그걸 훔치러 화산까지 올라온 겁니까?"

"묻지 말고 대답해라."

"안 됩니다. 흑설초는 위험하고 칠보등은 아직 덜 말랐습니다. 들고 가다가 곰팡이라도 피면 약초만 버립니다."

"네 목숨보다 약초가 아깝다는 말이냐?"

"사람 목숨도 아깝지요. 그러니 도윤 사제에게 해독약부터 먹이십시오."

운휘가 문턱에 쓰러진 도윤을 가리켰다. 도윤의 입술은 벌써 푸르스름했다.

침입자는 낮게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한 시진이면 움직일 수 있다."

"그럼 더 안 됩니다. 한 시진 동안 약초 발을 지킬 사람이 없잖습니까."

운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침입자는 칼끝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날이 목에 닿았지만 운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놓인 자소엽 상자를 발끝으로 방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 상자는 밟지 마십시오. 오늘 낮에 막 뒤집었습니다."

사내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이 번졌다. 칼날을 목에 대고도 겁내지 않는 자는 드물다. 더구나 그 칼날을 보며 약초 상자부터 치우는 자는 없었다.

그는 운휘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밖으로 나가. 네가 열쇠를 모른다면 아는 놈을 부르면 된다."

운휘는 팔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버티면 약초 상자가 넘어질 것 같았다. 대신 사내가 밟지 않도록 발밑을 살폈다.

마당으로 나오자 담장 위에서 발소리가 터졌다.

"운휘야!"

백향란이었다.

그녀는 검각의 처마를 박차고 어둠을 가르며 내려왔다. 그 뒤로 석 노인과 외문 제자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침입자는 운휘의 등 뒤로 바짝 붙어 목을 감고 독침을 들었다.

"한 걸음만 더 오면 이놈 목에 꽂는다."

백향란의 걸음이 멎었다.

그녀는 운휘의 목에 얹힌 침 끝을 보았다. 청록빛을 띤 침은 달빛 아래에서도 불길하게 빛났다. 맨살에 스치기만 해도 혈맥을 굳힐 독이었다.

"그 아이를 놓아라."

"검을 버려. 그리고 독초 보관함의 열쇠를 가져와라."

"독초가 목적이면 운휘를 놓고 말해도 된다."

"화산 대제자가 순순히 열쇠를 내놓을 얼굴로 보이나?"

사내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백향란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휘두르면 운휘에게 침이 닿는다. 침입자의 호흡은 짧고 가벼웠다. 이 거리에서 한 번에 베어 낼 자신은 있었지만 운휘의 목이 그보다 먼저 다칠 수도 있었다.

운휘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형. 열쇠는 주시면 안 됩니다."

"입 다물어."

침입자의 팔이 조금 조여 왔다.

운휘는 목이 아니라 등 뒤를 신경 썼다. 사내의 발이 자소엽 상자 모서리를 밟고 있었다. 상자가 더 밀리면 뚜껑이 열리고 말린 잎이 흙바닥에 쏟아질 터였다.

"거기 발을 조금만 옮기십시오."

"뭐?"

"상자 밑이 젖으면 안 됩니다."

백향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숨기는 고수라면 이토록 평범한 얼굴을 지을 수 있을까.

침입자는 낮게 욕설을 뱉었다.

"네놈은 겁이 없나."

"무섭습니다. 하지만 약초를 밟는 건 더 곤란합니다."

그 말과 함께 운휘가 몸을 뒤로 기울였다.

상자를 발끝으로 끌어당기려는 움직임이었다. 운휘는 침입자가 자신에게 매달린 줄도 잊은 듯 등을 밀어 붙였다.

우드득.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휘의 등이 가슴을 누르자 침입자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그는 버티려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단단한 철판이라도 밀어내는 장력이 손바닥에서 터졌다.

퍽.

장력은 운휘의 등에 닿고도 흩어졌다. 손바닥이 닿은 곳에서 밀려난 것은 오히려 침입자 자신이었다. 운휘가 약초 상자를 겨우 끌어당기는 사이 침입자의 허리에서는 다시 둔한 소리가 났다.

"크윽!"

사내의 팔이 풀렸다. 독침이 운휘의 목을 스쳤지만 침 끝은 반달처럼 휘었다. 운휘는 목을 한 번 문지른 뒤 상자를 일으켜 세웠다.

"침은 휘었네요. 바늘은 좋은 쇠를 써야 하는데."

침입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운휘를 올려다봤다. 장력을 흩어 버린 등과 휘어 버린 독침. 자신을 등에 매단 채 한숨도 거칠어지지 않은 호흡.

화산이 숨긴 고수라는 소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소문으로는 부족했다.

"네가... 그 약초꾼이구나."

운휘는 상자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약초꾼은 맞습니다. 그러니 남의 약초를 훔치면 안 됩니다."

그 단순한 말이 침입자에게는 경고처럼 들렸다. 사내는 허리를 붙잡고 뒷걸음질쳤다. 백향란의 검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는 품속에서 검은 가루를 뿌렸다.

매캐한 연기가 마당을 가렸다.

"운휘, 눈 감아!"

백향란이 소리치며 소매를 휘둘렀다. 바람이 연기를 걷어 냈을 때 침입자는 담장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도윤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석 노인이 급히 달려와 맥을 짚고 해독환을 입에 넣었다.

"독이 깊지는 않다. 숨을 고르고 앉아 있어라."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운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휜 독침은 방금 전까지 운휘의 목에 닿아 있던 물건이었다.

"백 사제. 목은 괜찮습니까?"

"조금 간지럽습니다. 쇠 냄새가 묻었나 봅니다."

도윤은 더 묻지 못했다.

백향란은 침입자가 서 있던 자리를 살폈다. 흙 위에는 끌린 발자국과 검은 피 한 방울이 남아 있었다. 그 곁에는 젖은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종이에는 약방의 선반 배치가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흑설초와 칠보등이 든 칸에는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심지어 건조장 뒤편 방까지 가는 길도 표시돼 있었다.

석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문파 안 사정을 아는 놈이 있단 뜻이군."

백향란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아직은 단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약방 사람 모두의 출입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운휘는 자소엽 상자와 황련 발을 둘러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약초는 안 망가졌습니다."

백향란이 그를 돌아봤다.

"네 목에 독침이 닿았는데 그 말이 먼저 나오느냐?"

"침은 휘었잖습니까. 사형도 다치지 않으셨고요."

그 순한 대답에 백향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걱정과 화가 한꺼번에 치밀었지만 운휘의 목에는 상처도 없었다. 손을 들어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었으나 이마를 칠 자신이 없었다.

"오늘부터는 네 곁에 사람이 둘 이상 붙는다."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있다."

"그럼 약초를 말릴 사람도 늘겠군요."

운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백향란은 고개를 저었다.

새벽빛이 화산 능선 위로 얇게 번질 무렵 백향란은 장문인 처소로 향했다. 그녀는 밤새 손에 쥐고 있던 종이와 휜 독침을 탁자 위에 올렸다.

장문인은 한참 동안 두 물건을 살폈다. 흰 수염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운휘는 뭐라 하더냐?"

"약초를 밟지 말라고 했습니다. 침이 목에 닿은 것도 모르고요."

"그 살수는?"

"운휘의 등에 매달렸다가 허리가 꺾였습니다. 내력을 터뜨렸으나 운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장문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 건조장 지붕 위로 새벽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고수도 있다."

백향란이 고개를 들었다.

"장문인께서도 운휘가 일부러 숨긴다고 보십니까?"

"모르겠다. 다만 그 아이가 무엇을 숨기든 억지로 벗겨서는 안 된다."

장문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약방의 경계를 늘려라. 소문도 막아라. 운휘에게는 감시가 아니라 보호가 필요하다."

백향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혼자 붙들고 있던 불안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그 시각 운휘는 건조장 마당에서 자소엽을 뒤집고 있었다. 밤새 흩어진 잎을 한데 모으던 손이 멈췄다. 침입자가 남긴 기름 냄새가 아직 발 밑에 남아 있었다.

"흑설초를 찾는 사람이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약초도 미리 마련해야겠네."

도윤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구하시려고요?"

운휘는 화산 아래로 이어진 산길을 바라봤다.

"하산길 장터에 들르면 백령화 뿌리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약방에 쌓아 둔 건 오래돼서 향이 약하거든요."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밤의 살수가 사라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백운휘는 다음 약초를 구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그 말씀을 대사형께 하실 겁니까?"

"당연하지요. 허락 없이 나가면 또 혼나니까요."

운휘는 웃으며 자소엽 한 장을 뒤집었다. 화산의 비공개 고수는 그저 약초가 모자란 것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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