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프로게이머가 너무 강함

2화. 천재의 솔로랭크
연습실 문을 닫자 바깥의 생활 소음이 얇은 벽 너머로 밀려났다.
아직 아무도 없는 공간에는 본체 팬 돌아가는 소리만 있었다. 도현은 가장 안쪽 자리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과거의 자신이 늘 쓰던 자리였다. 벽 쪽에 붙은 모니터는 색이 조금 바랬고 키보드의 왼쪽 쉬프트 키에는 희미한 금이 가 있었다.
그는 마우스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손목이 편안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할 만큼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프지 않는다는 건 확인했다. 하지만 실제 게임은 다르다. 라인전에서 시야가 비는 순간, 손가락이 반 박자 먼저 움직여야 하는 순간에도 이 감각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은 천천히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기대하지 마.’
기대는 사람을 무디게 한다. 괜찮다는 말을 믿었다가 수없이 뒤통수를 맞았다. 의사의 소견도 그랬고 구단의 약속도 그랬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기대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클라이언트가 열렸다. 계정의 점수는 최고 구간 바로 아래에 걸쳐 있었다. 과거의 강도현은 이곳에서 자주 발이 묶였다. 전성기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팀 연습도 없이 솔로랭크와 스크림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조금만 억울하게 말리면 다음 판까지 감정이 남았다.
도현은 대기열 버튼을 눌렀다.
잠깐 뒤 문이 열렸다.
“형. 진짜 여기 있었네.”
박진성이 캔 음료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도현 옆의 빈자리에 음료 하나를 내려놓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솔랭 돌려? 오전 스크림도 취소됐는데 그냥 쉬지.”
“쉬는 건 나중에 해도 돼.”
“형이 그런 말 하니까 좀 무섭다.”
진성은 웃었지만 시선은 도현의 손목에 잠깐 머물렀다. 어제까지 도현은 연습이 길어지면 손목 보호대를 찾았다. 아픈 척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으니 진성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도현은 별말 없이 음료 캔을 옆으로 밀었다.
“한 판만 볼래?”
“당연하지. 형 승급전 근처잖아.”
매칭은 생각보다 빨리 잡혔다.
로딩 화면에서 도현의 눈빛이 멈췄다. 상대 미드의 닉네임은 블랙코멧이었다.
몇 년 뒤 A-League에 데뷔해 한 시즌을 흔들어 놓을 선수. 당시에도 라인전만큼은 날카로웠다. 다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칼날을 너무 믿었다. 웨이브가 한 줄만 더 남아 있어도 앞으로 나왔고 상대 정글러가 보이지 않아도 견제를 멈추지 못했다.
미래의 기록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펼쳐졌다.
도현은 곧 그 생각을 잘랐다.
그 기록은 내비게이션이 아니다. 지금 화면 위에 있는 다섯 명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놓치면 미래를 안다는 건 오히려 독이 된다.
게임이 시작됐다.
도현은 순간 이동기를 여러 번 쓸 수 있는 그림자 암살자를 골랐다. 블랙코멧은 긴 사거리의 구체를 던지는 마법사를 꺼냈다. 초반 주도권은 상대에게 있었다. 미니언을 지우는 속도가 빨랐고 직선 견제도 끈질겼다.
첫 번째 구체가 미니언 사이를 가르며 날아왔다.
도현의 손목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캐릭터가 반 걸음 옆으로 미끄러졌다. 구체는 어깨를 스치지도 못하고 뒤의 미니언에 박혔다.
진성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저걸 피한다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스킬을 쓴 순간에만 앞으로 갔다. 평타 두 번과 짧은 그림자 표식. 욕심 없이 뒤로 빠졌다. 체력 교환은 미세했지만 두 번이면 충분했다. 블랙코멧은 견제를 맞히지 못한 대신 미니언을 먼저 지우며 라인을 밀었다.
도현은 그걸 원했다.
세 번째 웨이브가 포탑 쪽으로 들어올 때 아군 정글러의 아이콘이 강가에서 사라졌다. 잠시 뒤 첫 번째 처치 알림이 떴다. 적 정글러에게 카운터 정글을 당한 모양이었다.
아군 정글러가 채팅창에 물음표를 연달아 찍었다.
진성이 혀를 찼다.
“아. 이 판도 정글 터지겠는데.”
도현은 미니맵을 봤다. 적 정글러가 위쪽 강가에서 모습을 보인 뒤 사라진 지 열두 초. 남아 있는 캠프와 미드 웨이브의 위치를 보면 다음 동선은 둘 중 하나다. 바텀으로 내려가거나 미드에 한 번 더 얼굴을 비추는 것.
블랙코멧은 두 번째 경우를 믿고 있었다.
상대 미드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도현의 퇴로 쪽에 구체를 굴렸다. 견제라기보다 신호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도현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림자 하나가 미니언 뒤에 남았다. 속박이 날아오는 순간 도현의 캐릭터가 그 자리로 바뀌었다. 발밑을 묶으려던 고리가 허공에 닿았다.
수풀에서 적 정글러가 튀어나왔다.
진성이 숨을 삼켰다.
“형 뒤!”
도현은 이미 보고 있었다.
적 정글러의 돌진기가 빠지자 도현은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블랙코멧의 점멸은 아직 있었지만 체력이 낮았다. 그림자 표식이 터지기 직전 상대는 점멸을 눌렀다.
그러나 도현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도현은 상대가 도착할 위치에 마지막 스킬을 깔아 두었다. 빛이 번지고 마법사의 체력이 바닥났다.
첫 번째 처치.
적 정글러가 뒤늦게 빠지려 했다. 도현은 남은 이동기로 벽을 넘었다. 정글러가 뒤돌아 던진 둔화가 화면을 가로질렀다.
예전 같았으면 저걸 피한 뒤 손목을 의식했을 것이다. 다음 입력이 늦어질까 봐 한 번 더 눌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달랐다.
손끝이 망설임 없이 키를 눌렀다. 캐릭터는 둔화가 닿기 전 사선으로 빠져나갔다. 이어진 평타와 스킬이 적 정글러를 쓰러뜨렸다.
더블 킬.
“미쳤네.”
진성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도현은 화면을 보며 짧게 말했다.
“바텀에 핑 찍어.”
“왜? 아직 라인도 안 밀었는데.”
“적 미드 점멸 없어. 정글도 죽었고.”
도현은 남은 미니언을 한 번에 정리하지 않았다. 상대 포탑 앞으로 웨이브가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스킬 하나를 아꼈다. 다음 웨이브와 겹친 미니언이 포탑에 박히자 상대 바텀은 미드의 손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짧은 틈에 도현은 강을 건넜다.
바텀에서는 아군 둘이 포탑 앞에서 밀리고 있었다. 적 서포터가 뒤로 빠지는 척하며 좁은 길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대기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도현은 멈췄다.
“들어가지 마. 세 명 있어.”
아군 원거리 딜러가 앞으로 나가려다 멈췄다. 그 직후 수풀에서 적 탑 라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던 매복이 허공을 쳤다.
도현은 그때 벽을 넘었다.
적 진형의 가장 뒤에 있던 원거리 딜러에게 그림자 표식이 꽂혔다. 상대가 반응할 틈은 없었다. 도현은 첫 번째 이동으로 스킬을 피하고 두 번째 이동으로 빠져나왔다. 표식이 터지며 적 딜러가 쓰러졌다.
탑 라이너가 도현을 붙잡으려 했지만 아군 둘이 이제야 앞을 막았다. 전투는 넷째 처치 알림과 함께 끝났다.
채팅창이 조용해졌다.
도현은 귀환 버튼을 눌렀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지 않았다. 가슴은 빠르게 뛰었지만 손목에는 아무 감각도 남지 않았다.
그 평범한 사실이 너무 낯설었다.
‘할 수 있어.’
그 말은 들뜨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있었다. 계산한 대로 손이 따라왔다.
하지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대는 미드로 네 명을 모았다. 도현을 한 번 잡으면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군 정글러는 앞선 죽음 탓에 조급했고 원거리 딜러는 바텀 교전의 승리에 취해 있었다.
전령 둥지 앞에서 아군이 앞으로 쏠렸다.
도현은 채팅창에 짧게 적었다.
[뒤로. 강가 시야부터.]
핑을 세 번 찍자 아군이 마지못해 멈췄다.
잠시 뒤 어두운 수풀에서 적 서포터의 갈고리가 날아왔다. 아군이 한 걸음만 더 나갔다면 그대로 끌려갔을 각이었다.
도현은 벽 너머로 와드를 던졌다. 적 넷의 위치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지금부터는 그냥 따라와.”
진성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좁은 입구로 들어왔다. 갈고리와 속박이 겹쳐 날아들었다. 도현은 첫 번째 그림자로 옆을 빠져나갔다. 두 번째 군중 제어기는 점멸로 넘었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머리가 뒤따라가는 기분이 아니었다. 보이는 순간 이미 다음 자리가 떠올랐다. 미니맵의 점 하나와 스킬의 사거리, 적의 발끝 방향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도현은 상대 원거리 딜러 뒤에 남겨 둔 그림자로 파고들었다.
궁극기가 터졌다.
첫 번째 적이 쓰러졌다.
적 미드가 도현에게 모든 스킬을 쏟아부었다. 체력이 급격히 내려갔다. 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죽어!”
도현은 마지막 그림자로 빠져나갔다. 체력은 한 자릿수였다. 상대 둘이 그를 따라왔고 바로 그 순간 아군의 스킬이 옆에서 터졌다.
도현은 돌아서서 남은 피해를 넣었다.
두 번째 처치.
세 번째 적은 도망치지 못했다.
트리플 킬.
아군이 환호하며 미드로 달렸다. 도현은 넥서스에 핑을 찍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다른 목표를 주장하지 않았다.
붉은 수정이 갈라지고 승리 화면이 떠올랐다.
도현은 한참 화면을 보지 않았다.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손가락을 펼쳤다. 관절 사이에는 통증도 저림도 없었다.
기쁨보다 먼저 오래된 억울함이 밀려왔다. 이 손으로 끝까지 경기할 수 있었다면. 그 마지막 세트에서 한 번만 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도현은 손을 쥐었다가 풀었다.
이제는 그 생각에 붙들릴 이유가 없었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선택을 다시 하지 않을 수는 있다. 자기 손목을 방치하지 않고 팀원들이 무너지는 것을 구경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자 뒤에서 진성이 한참 말이 없었다.
“형.”
“왜.”
“아까 그거. 원래 할 수 있었어?”
도현은 화면 구석의 전적을 닫았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였어.”
진성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장난처럼 넘기지는 못했다. 방금 본 것은 운 좋은 한 판이 아니었다. 피해야 할 것을 피하고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럼 스크림도 해 볼 만하겠네.”
도현은 바로 긍정하지 않았다.
솔로랭크 한 판으로 팀을 바꿀 수는 없다. 다섯 명의 호흡은 개인의 손보다 복잡하다. 무엇보다 그는 다시 무리한 연습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 전에 검사부터 받아.”
“무슨 검사?”
“손목 검사. 제대로.”
진성의 눈썹이 올라갔다.
“갑자기?”
“문제 없다는 걸 기록으로 남겨야 해.”
도현은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손끝에는 조금 전 한타의 감각이 아직 선명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 감각을 빼앗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