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배송은 새벽 세 시에

4화 [해열 이끼 상자]
노인의 메마른 손이 삼베 발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어스름한 실내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온몸에 짙은 녹색 무명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자락 곳곳에 풀물이 짙게 배어 있었고 목에는 붉은 실로 엮은 마른 약초 묶음이 걸려 있었다. 주름진 이마 아래의 눈동자는 탁하지 않고 유리구슬처럼 서늘하게 번뜩였다.
노인은 처마 밑에 선 도윤의 젖은 신발과 형광 조끼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비 냄새가 맞군. 저쪽 관문은 아직 장마철인가 보지.”
도윤은 대답 대신 가슴 버클을 풀고 배달 가방을 앞으로 돌려 안았다. 지퍼를 열자 접어 넣은 우비 틈에서 은색 테이프로 감긴 7.4킬로그램짜리 검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 중앙의 푸른 경계 라벨은 가게 안의 청록색 등불을 받아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13번 적재함에서 수령한 화물입니다. 봉인 상태 확인 부탁드립니다.”
도윤은 실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상자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노인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돋보기를 눈가에 바짝 댔다.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상자 모서리의 테이프 접합부를 하나하나 쓸어내렸다. 손톱 끝으로 경계 라벨의 테두리를 꼼꼼히 긁어보던 노인이 마침내 턱을 끄덕였다.
“테이프 들뜸 없음. 경계 봉인도 온전해. 물기 하나 안 묻히고 용케 가져왔군.”
노인이 상자를 받아 가게 안쪽 평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상자가 나무 바닥에 닿자마자 미세하게 떨리던 진동이 잦아들었다.
도윤의 허리춤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1차 운송 완료: 경계 라벨 부착 상자 (인계 확인)]
[연계 배송 화물 수령 대기]
화면의 글자가 바뀌는 것과 동시에 노인이 평상 아래 나무 궤짝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로세로 뼘 남짓한 직사각형 상자였다. 짙은 밤나무 원목으로 짜인 상자 틈새로 서리 같은 서늘한 흰 김이 피어올랐다. 상자 겉면에는 붉은색 검수 직인이 찍힌 얇은 한지가 띠지처럼 둘러져 있었다.
“이게 네놈이 서울로 들고 가야 할 물건이다.”
노인이 상자를 도윤의 가슴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도윤이 상자를 받아 든 순간 장갑 너머로 얼음장 같은 냉기가 훅 끼쳤다. 겉보기와 달리 무게는 1킬로그램 안팎으로 가벼웠지만 상자 안쪽에서 사각거리는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잘게 부순 얼음 조각들이 숨을 쉬며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품목명이 어떻게 됩니까?”
“해열 이끼다. 북쪽 빙벽 그늘에서만 자라는 생물이지. 열병에 걸려 뇌가 끓어오르는 어린것들에게는 이만한 약이 없다.”
노인은 담뱃대를 털며 건조하게 덧붙였다.
“주의해라. 이놈은 사람 체온이나 바깥 열기를 쐬면 십 분도 안 돼 녹아내려 검은 진물이 된다. 진물이 되면 그냥 풀죽 쓰레기야. 반드시 냉기를 유지하고 절대로 심하게 흔들지 마라.”
도윤은 휴대폰을 상자 띠지 위에 가져갔다. 붉은 직인 위로 푸른 스캔 선이 지나가자 새로운 운송장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신규 연계 배송]
[품목: 빙벽 해열 이끼 (냉장 보존 요망)]
[픽업: 여명권 고목 약초전]
[도착: 서린병원 응급의료센터 야간 접수처]
[수령 대상: 소아과 당직의 또는 담당 간호사]
[배송 마감: 03:00]
[남은 시간: 01:42:15]
도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린병원 응급실. 서린구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종합병원이었다. 관문인 서린역 지하에서 병원까지는 평상시 오토바이로 십오 분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백 년 만의 폭우로 도로 곳곳이 잠기고 역류한 하수로 통제된 상태였다.
게다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서린역으로 돌아가는 시간과 지상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제하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끼가 시들면 운송 실패로 처리됩니까?”
“실패는 무슨. 신뢰 잔량 깎이고 네놈 계정은 영구 정지야. 무엇보다 저쪽 병원에서 숨 헐떡이는 아이 녀석이 오늘 새벽을 못 넘기겠지.”
노인이 도윤의 형광 조끼 가슴팍을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그 조끼…… 아주 오랜만에 보는군. 아직도 그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밤길을 뛰는 놈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네?”
“됐다. 쓸데없는 소리 물을 시간 있으면 발이나 놀려라. 네놈 낡은 오토바이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으니.”
노인은 삼베 발을 홱 내리며 가게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도윤은 더 지체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배달 가방 바닥에 마른 방한 천을 깔고 해열 이끼 상자를 정중앙에 수평으로 얹었다. 상자 양옆과 위쪽에는 접은 우비와 스펀지 완충재를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상자가 가방 안에서 단 1센티미터도 유격 없이 고정되도록 벨크로를 단단히 조였다.
가방 지퍼를 끝까지 올린 뒤 가슴 버클을 채웠다.
도윤은 뒤를 돌아 13번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돌바닥에 박힌 푸른 이끼를 밟지 않도록 시선은 항상 발앞 삼 미터를 유지했다. 보폭을 일정하게 맞추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가방 속 이끼 상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상체를 거의 수직으로 고정한 채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중앙 대로로 나서자 시장의 활기는 아까보다 더욱 거세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 상자를 실은 수레들이 길목을 메우고 인부들의 거친 고함이 허공을 갈랐다.
“우측 통행! 짐차 지나갑니다!”
도윤은 인파의 틈을 날렵하게 파고들었다. 수레바퀴와 궤짝 모서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처마 밑 통로를 따라 직진했다. 배달 일을 하며 수만 번 겪은 골목길 질주의 감각이 낯선 이계의 시장에서도 오차 없이 작동했다.
이윽고 저 멀리 은빛 안개 너머로 서린 관문 접속 통로의 석조 문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치형 문턱을 단숨에 박차고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시장의 요란한 소음이 뚝 끊기며 고요가 찾아왔다. 울퉁불퉁한 회색 암반 통로 벽면을 따라 청록색 등불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도윤은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다.
통로를 200미터쯤 내달렸을 때 전방 어둠 속에서 익숙한 표식이 눈에 띄었다.
문틀 바깥쪽 타일에 노란 초크로 그어 두었던 굵은 화살표.
푸른 실선이 형광 테이프처럼 둘러쳐진 철문이 반 뼘 정도 묵직하게 벌어져 있었다.
도윤은 손바닥으로 철문을 힘껏 밀었다.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는 순간 묵직한 기압차가 귀를 때렸다.
콰아아아아—!
귓전을 찢을 듯한 폭우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지하상가 바닥을 굴러가는 탁한 흙탕물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폐부로 밀려들었다.
서린역 지하상가 B2 폐쇄 구역이었다.
도윤은 문턱을 완전히 넘은 뒤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철문 틈 사이로 푸른빛이 아주 가늘게 새어 나오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휴대폰 화면이 진동하며 현실 네트워크로 복귀했다.
[현재 위치: 서린역 지하상가 B2]
[목적지: 서린병원 응급의료센터 (남은 거리: 3.8km)]
[남은 시간: 01:24:08]
마감까지 한 시간 이십사 분.
도윤은 젖은 콘크리트 경사로를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발목까지 튀어 오르는 흙탕물을 헤치며 화물 반입구 철문으로 다가섰다. 손잡이를 살짝 돌려 바깥 동향을 살폈다. 다행히 빗줄기가 워낙 거세어 경비원의 순찰 손전등 불빛은 역 정문 처마 밑에 머물러 있었다.
도윤은 문을 틈만 벌려 신속하게 빠져나왔다.
골목을 돌아 공영 주차선에 세워 둔 스쿠터 ‘비둘기’ 앞에 도착했다.
시트는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엔진 주변은 아직 식지 않아 미지근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도윤은 배달통을 열어 안쪽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훔쳐냈다. 등에 메고 있던 배달 가방을 통째로 배달통 안쪽에 넣고 고정 그물망을 이중으로 결착했다.
키를 꽂고 시동 버튼을 눌렀다.
푸르릉. 털털털털.
엔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계기판의 연료 표시등이 붉은빛을 깜빡이며 도윤의 시선을 찔렀다. 바늘은 이미 붉은 눈금의 맨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남은 기름으로 언덕길까지 왕복할 수 있을까.’
서린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서린구에서 가장 가파른 급경사 코스였다. 비에 젖은 노면에서 스로틀을 세게 당기면 연료 소모는 평지의 세 배 이상으로 치솟는다. 주유소에 들를 시간은 없었다. 자정이 넘은 폭우 속에서 문을 연 셀프 주유소는 병원 반대편 외곽 도로에만 있었다.
“버텨 줘라, 비둘기야. 딱 삼 킬로만.”
도윤은 스쿠터 핸들을 쥐며 중얼거렸다.
그는 스로틀을 부드럽게 감으며 주차선을 빠져나왔다.
서린역 앞 대로변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빗물이 도로를 집어삼켜 1차로는 완전히 물바다였고 비상등을 켠 트럭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도윤은 큰길을 버리고 즉시 상가 뒤편 고지대 골목길로 기수를 틀었다.
평소 배달을 뛰며 머릿속에 새겨 둔 서린구의 물길 지도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저지대 사거리는 십중팔구 맨홀이 역류해 바퀴 절반이 잠겼을 것이다. 반면 백화길 주택가 능선을 타고 달리면 경사는 심하지만 물이 고이지 않고 배수구로 곧장 빠져나간다.
스쿠터가 빗물 덮인 골목 오르막길을 차고 올라갔다.
바퀴가 물막을 밟을 때마다 핸들이 좌우로 미세하게 털렸다. 도윤은 양팔의 힘을 빼고 하체로 시트를 조이며 접지력을 유지했다. 브레이크는 절대 한 번에 깊게 잡지 않았다. 앞바퀴 락(lock)이 걸리는 순간 스쿠터는 그대로 미끄러져 배달통 속 해열 이끼 상자가 박살 날 터였다.
휴대폰 화면에 배송 메모가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요청 사항: 3세 소아 급성 뇌열 증세. 체온 40.5도. 해열제 불응성 쇼크 위험. 응급실 앞 도착 시 직통 비상벨 호출 요망.]
도윤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단순한 의약품 납품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넘어가며 차가운 약초 하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아이의 목숨줄이었다.
‘십 분. 아니, 오 분이라도 더 당겨야 한다.’
도윤은 골목길 코너를 돌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가파른 능선길 끝자락, 짙은 빗줄기와 비구름 너머로 서린병원 옥상의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이 흐릿하게 안갯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스쿠터 엔진이 언덕을 오르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