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전설의 골잡이

0003화 프로의 문턱
아침 일곱 시 반의 클럽하우스는 서늘했다.
강도윤은 낡은 관중석 계단에 앉아 차가워진 손가락을 비볐다. 운동장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잔디 위에 뽀얀 물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젖은 풀잎 냄새가 차가운 아침 공기를 타고 코끝을 찔렀다.
어제 테스트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야간 근무를 나가고 없었다. 식탁 위에 놓인 짧은 쪽지에 '감독님이 내일 훈련에 오라고 하셨어요'라고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덜컥,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유스 시절과는 체격부터 달랐다. 두꺼운 허벅지와 각진 어깨, 팔뚝에 돋은 핏줄까지 성인 프로 무대에서 오랜 세월 구른 흔적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선수들은 벤치 쪽에 웅크려 있는 도윤을 힐끗 보더니 무심하게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호기심 어린 눈빛도 아니었다. 매 시즌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연습생 중 하나를 보는 메마른 시선이었다.
"일찍 왔네."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성우 감독이었다.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는 손에 작전판을 든 채 도윤의 축구화를 내려다봤다.
"저기 창고에 가면 노란색 연습 조끼가 있다. 그거 입고 나와. 오늘은 테스트 지원자가 아니라 우리 팀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을 소화한다."
"네, 알겠습니다."
도윤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창고에서 꺼내 입은 조끼에서는 진한 땀 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뒤섞여 났다. 누군가가 수없이 그라운드를 뒹굴며 입었을 옷이었다. 그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오전 여덟 시, 정규 훈련이 시작되었다.
코치의 호각 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둥글게 모였다. 서 감독이 도윤을 가리키며 짧게 소개했다.
"어제 테스트에서 올린 강도윤이다. 오늘 훈련 같이한다."
선수들 사이에서 짧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유스 출신인가?"
"체격은 괜찮은데 여기서 버틸 수 있으려나."
가장 체격이 크고 턱수염이 거뭇한 선수가 도윤을 빤히 쳐다봤다. 팀의 주전 센터백이자 부주장인 최영호였다. 서른을 넘긴 베테랑의 눈빛에는 풋내기를 향한 냉랭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첫 훈련은 5대 2 론도다. 터치 두 번 이내, 뺏기면 바로 술래."
코치의 지시에 따라 훈련장에 붉은 콘이 깔렸다. 도윤은 최영호를 포함한 네 명의 1군 선수들과 한 조에 묶였다.
공이 돌기 시작했다.
도윤의 숨이 턱 막혔다. 유스 시절이나 어제 공개 테스트와는 템포 자체가 달랐다. 공이 발에 닿는 순간 탕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렸고 잔디를 미끄러지듯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공을 잡은 미드필더의 발목에서 희미한 푸른 선이 번졌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그 선을 따라 발을 뻗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미드필더는 오른쪽을 쳐다보며 공을 왼쪽으로 차는 노룩 패스를 구사한 것이었다.
시선과 몸의 잔상에 속아 푸른 선마저 찰나에 갈라졌다.
"어이, 덤비지 마."
최영호가 공을 가볍게 트래핑하며 혀를 찼다.
"눈만 보고 뛰면 여기서 백 날 뛰어도 공 근처에도 못 가."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선이 보인다고 해서 상대가 차는 순간까지 완벽히 확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수준의 프로 선수들은 킥 직전까지 선택지를 숨겼고 그로 인해 푸른 선의 궤적도 마지막 찰나에 급격히 변했다.
'더 깊게 봐야 해.'
도윤은 관자놀이에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열감을 참아내며 집중했다. 단순히 뻗어 나오는 선만 좇지 않았다. 상대의 골반 기울기, 디딤발의 무게중심, 공을 감아 차려는 발목의 각도를 겹쳐서 읽었다.
다음 턴, 상대 윙어가 공을 잡았다.
몸은 오른쪽으로 기우는데 디딤발의 뒤꿈치가 안쪽으로 깊게 박혀 있었다. 시선은 페이크였다. 푸른 선이 반대편 최영호의 발밑으로 얇고 날카롭게 그어졌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도윤은 공이 발을 떠나는 순간 정확하게 몸을 던졌다.
툭.
공이 도윤의 발 안쪽에 정확히 걸려 멈췄다.
"어?"
패스를 보낸 윙어가 헛숨을 들이켰다. 술래에서 벗어난 도윤은 숨을 몰아쉬며 물러섰다. 최영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군더더기 없는 차단이었다.
"몸 푸는 건 여기까지."
서 감독의 휘슬이 운동장을 갈랐다.
"조끼 나눠 입어라. 전술 훈련 겸 11대 11 연습 경기 들어간다."
드디어 실전이었다.
도윤은 주전 라인업인 형광 조끼 대신 후보 라인업인 검은 조끼를 받았다. 포지션은 투톱 중 오른쪽 스트라이커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주전 조끼를 입은 최영호가 버티고 서 있었다.
"삐익!"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전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프로 1군의 경기 템포는 론도 훈련보다 훨씬 거칠고 살벌했다.
도윤에게 공이 투입되자마자 등 뒤에서 거대한 바위가 부딪쳐 오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최영호였다.
"컥!"
도윤은 무게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공은 최영호의 긴 다리에 걸려 허무하게 뺏겼다.
"일어나. 여긴 파울 안 불어준다."
최영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전방으로 롱패스를 찔러 넣었다.
도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디를 털고 일어났다. 등이 욱신거렸다. 피지컬의 격차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힘으로 버티려 하면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갈 터였다.
주전 팀의 공격이 거세게 몰아쳤다.
전반 15분 만에 주전 공격수의 날카로운 중거리 슛이 검은 조끼 팀의 골망을 갈랐다. 1대 0.
후보 팀 선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야, 전방에서 공을 지켜줘야 라인을 올릴 거 아니야!"
미드필더 선배가 도윤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도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공을 등지고 버티지 못하니 전방으로 나간 패스가 죄다 역습의 빌미가 되고 있었다.
'힘으로 맞붙으면 안 된다.'
도윤은 심호흡을 하며 시야를 넓혔다. 자신이 가진 무기는 완력이 아니었다. 한 걸음 먼저 보고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공간에 대한 감각이었다.
전반 28분, 기회가 왔다.
상대 미드필더의 패스 미스를 가로챈 후보 팀 미드필더가 전방으로 길게 공을 차올렸다. 공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페널티박스 부근으로 떨어졌다.
최영호가 도윤의 어깨를 짚으며 먼저 점프할 준비를 했다.
공중볼 경합.
순간 도윤의 시야에 붉고 푸른 궤적이 교차했다.
최영호의 머리에 닿은 공이 뒤로 흐를 궤적이 푸른 선으로 선명하게 그어졌다. 높이 뛰는 최영호의 등 뒤, 페널티아크 정면의 좁은 빈 공간으로 공이 튀어 나갈 그림이었다.
도윤은 최영호와 함께 뛰어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척하다가 반 보 뒤로 물러서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어?"
허공으로 솟구친 최영호의 머리에 공이 빗맞았다.
탕!
머리를 맞고 굴절된 공이 도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빈자리로 정확히 떨어졌다.
도윤은 공이 바운드되는 순간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공의 속도를 죽이며 왼쪽으로 부드럽게 돌아섰다. 완벽한 퍼스트 터치였다.
공간이 열렸다.
"막아!"
뒤늦게 착지한 최영호가 사력을 다해 몸을 던져 태클을 시도했다. 주전 골키퍼 역시 각도를 좁히며 도윤의 정면으로 뛰쳐나왔다.
수비수의 긴 다리와 골키퍼의 넓게 벌린 두 팔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찰나, 도윤의 망막에 골키퍼의 다음 동작이 푸른 잔상으로 겹쳐 보였다.
골키퍼의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무너지며 오른손을 먼저 바닥에 짚는 1.5초 뒤의 미래.
도윤은 강슛을 때리는 척하며 디딤발을 강하게 굴렀다. 골키퍼가 슛 궤적을 차단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그 순간 도윤은 발목에 힘을 빼고 인사이드로 공의 허리를 가볍게 툭 찍어 찼다.
툭.
공은 몸을 날린 골키퍼의 역동작을 비웃듯 반대편 왼쪽 골문 구석으로 낮고 부드럽게 굴러갔다.
데굴, 찰싹.
공이 골대 안쪽 그물을 고요하게 흔들었다.
1대 1 동점.
운동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클을 시도하느라 잔디에 미끄러졌던 최영호가 멍하니 골문 안의 공을 바라봤다. 몸을 날렸던 주전 골키퍼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단 두 번의 터치였다.
수비의 궤적을 읽고 비워둔 자리로 이동한 첫 번째 터치, 그리고 키퍼의 역동작을 끌어내 빈 구석으로 밀어 넣은 두 번째 터치.
"……골."
심판을 보던 수석코치가 얼떨결에 호각을 불었다.
후보 팀 선수들이 달려와 도윤의 등을 두드렸다.
"야, 너 방금 터치 뭐냐?"
"위치 선정 미쳤는데?"
도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터치라인에 서 있던 서성우 감독은 팔짱을 낀 채 수첩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적고 있었다. 그의 굳은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풀려 있었다.
경기는 그대로 1대 1로 종료되었다.
훈련이 끝난 뒤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고 있던 도윤에게 코치가 다가왔다.
"강도윤, 감독님이 부르신다. 2층으로 가봐."
도윤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클럽하우스 2층 감독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 감독이 창밖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앉아라."
도윤이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자 서 감독이 돌아섰다.
"오늘 몸싸움 봤지? 아직 한참 모자라. 프로 수비수들은 오늘 최영호가 한 것보다 훨씬 거칠고 교활해. 조금만 방심해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 감독이 책상 위의 서류를 도윤 쪽으로 밀었다.
"공이 어디로 떨어질지 아는 감각, 그리고 골문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 그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지."
서류 상단에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표준선수계약서 - 서울 새벽고래 FC]
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신인 기본 계약이다. 연봉도 적고 출전 기회도 장담 못 해. 네가 실력으로 주전을 밀어내지 못하면 1년 내내 벤치에만 앉아 있을 수도 있어. 그래도 사인하겠나?"
서 감독이 펜을 건넸다.
도윤은 펜을 쥐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유스팀에서 쫓겨나듯 방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등과 차가운 공터에서 홀로 벽을 향해 공을 차던 밤들이 떠올랐다.
문이 열렸다.
도윤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정박아 넣었다.
'강도윤.'
세 글자를 적고 펜을 내려놓자 서 감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강도윤 선수. 내일부터 정식 선수단에 합류해."
"감사합니다, 감독님.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윤은 서 감독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클럽하우스를 빠져나온 도윤은 운동장 앞 벤치에 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윤아? 무슨 일 있어?
"엄마."
도윤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그는 푸른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잔디 구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계약했어. 프로 선수 됐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참았던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윤은 눈가를 훔치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유스 방출 후보에서 K2리그 프로 선수로.
마침내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도윤은 푸른 잔디를 향해 천천히 첫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