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전설의 골잡이

0002화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뇌진탕 소견은 없다고 말했다.
며칠은 무리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강도윤은 진료실 문을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관자놀이 안쪽에 남은 묵직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그는 무심코 배달 오토바이를 봤다.
앞바퀴에서 푸른 선 하나가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졌다. 오토바이는 선이 가리킨 자리에서 멈췄다.
도윤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축구공도 없었다. 잔디도 없었다. 그런데 선은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식탁 위에 놓인 김밥 통을 봤다. 어머니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텅 빈 통 뚜껑 안쪽에는 며칠 전 붙어 있던 메모 자국만 남아 있었다.
오늘은 네가 제일 빛날 거야.
도윤은 그 말을 믿는다고 대답했었다. 팀에 남을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지금은 그 약속을 지킬 구단조차 없었다.
그날 저녁 도윤은 집 근처 공터로 나갔다. 낡은 골대 앞에 공을 세워 두고 왼발로 찼다. 공이 벽에 맞고 돌아오는 순간 회전하는 공의 옆으로 희미한 선이 뻗었다.
그는 선이 끝나는 곳으로 먼저 뛰었다.
공은 발끝보다 반 뼘 앞에 떨어졌다.
도윤은 헛발을 찼고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찌르듯 아팠다.
"젠장."
한 번 더 공을 찼다. 이번에는 벽에서 튀어 나온 공이 선을 그리기 전에 발등으로 받아 냈다. 가슴에 닿은 공은 여전히 축구공이었다. 선명해진 것은 없었다.
보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더 오래 보려고 하면 눈앞이 흐려졌다. 먼저 달리면 공이 뒤로 빠졌다. 공이 실제로 떠나는 순간과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순간은 달랐다.
도윤은 공 위에 발을 올렸다. 지갑 가장 안쪽에는 서성우 감독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서울 새벽고래 FC. K2리그 팀의 이름을 볼 때마다 심장이 빨라졌다.
착각이라면 테스트장에서 들킬 것이다.
그래도 가야 했다. 축구를 그만둘 이유보다 계속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도윤은 명함에 적힌 주소 앞에 섰다.
서울 새벽고래 FC 훈련장은 오래된 공장 건물과 낮은 아파트 사이에 끼어 있었다. 화려한 클럽하우스는 아니었다. 낡은 철문 너머로 작은 천연잔디 구장과 웨이트장이 보였다.
하지만 도윤에게는 어디보다 넓어 보였다.
번호표를 받은 지원자는 마흔 명 가까이 됐다. 대학을 막 졸업한 선수도 있었고 실업팀 유니폼을 입고 온 선수도 있었다. 도윤의 가슴에는 37번이 붙었다.
"유스 출신이야?"
옆에서 번호표를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물었다. 넓은 어깨와 굵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도윤보다 두어 살은 많아 보였다.
"네."
"나는 실업팀에서 나왔어. 김태준. 원톱 보러 왔고."
도윤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태준은 도윤의 축구화를 훑어보고 피식 웃었다.
"여긴 골 하나 넣었다고 뽑는 데 아니야. 몸싸움부터 버텨야지."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스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어도 성남에 남는 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한 장면으로 선수가 되는 건 아니었다.
첫 측정은 스프린트였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도윤은 몸을 던졌다. 첫 다섯 걸음은 나쁘지 않았다. 열다섯 미터쯤에서 앞선 선수의 팔이 흔들렸다. 그 팔 뒤로 푸른 잔상이 겹쳤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기록은 중간이었다.
패스와 슈팅 훈련에서도 비슷했다. 움직이는 공을 볼 때마다 선이 나타날 듯 말 듯 시야 가장자리에서 흔들렸다. 도윤은 그것을 붙들지 않았다. 발등으로 공을 죽이고 두 번 만에 골대 구석을 노렸다.
슛은 골대 옆 그물을 때렸다.
서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얀 조끼를 입은 코치가 기록지에 줄 하나를 더 그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무서웠다. 칭찬도 질책도 없는 선수는 기억에서 먼저 지워진다.
"마지막은 실전으로 간다."
서 감독의 목소리가 훈련장에 낮게 울렸다.
"여기서 골만 기다리는 선수는 필요 없다. 잃으면 다시 뺏고 비면 먼저 뛰어. 그걸 못 하면 이름 기억할 이유도 없어."
도윤은 배정받은 파란 조끼를 받아 들었다. 같은 편 공격수는 김태준이었다.
8대8 경기가 시작되자 태준은 곧장 공을 요구했다. 첫 패스가 그의 발로 들어갔고 태준은 수비수 둘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깨를 버틴 뒤 발등으로 때린 슛은 골키퍼 정면이었다.
"더 빨리 들어와!"
태준이 도윤에게 손을 휘저었다.
도윤은 대꾸하지 않고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태준의 말처럼 박스 안에만 서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상대 미드필더가 공을 잡았다.
푸른 선이 오른쪽 측면으로 길게 번졌다. 상대 윙어가 그 끝에서 달리고 있었다. 도윤은 선이 가리킨 곳으로 뛰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제 공이 발을 떠나는 것보다 먼저 몸을 날렸다. 그러나 패스는 그의 뒤로 굴렀다. 선은 맞았다. 자신이 너무 빨랐을 뿐이었다.
상대 윙어가 빈 공간을 달렸다.
도윤은 방향을 바꾸려다 발을 헛디뎠다. 폐가 뜨겁게 조여 왔다. 상대의 낮은 크로스가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파란 조끼의 센터백이 몸을 던졌다. 공은 그의 정강이를 맞고 골문 옆으로 빠졌다.
"37번! 공 보고 뛰어!"
코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도윤은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에서 조금 전 장면이 뒤엉켰다. 공이 떠날 곳을 봤다. 그런데 공을 차기 전 상대의 발목은 아직 그 방향을 고르지 않았다.
선은 정답이 아니었다.
선이 보여 주는 장면에 몸을 던지는 순간 정답이 될 가능성 하나를 스스로 망쳐 버린다.
도윤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었다.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더 먼 곳을 보려 하지 말자. 자신이 닿을 수 있는 한 걸음만 보자.
상대 수비수가 다시 공을 받았다.
도윤은 푸른 선 대신 그의 발목을 봤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발끝이 바깥으로 열렸다. 그 짧은 순간에만 선이 얇게 번졌다.
왼쪽이다.
도윤은 패스가 떠난 뒤 움직였다. 한 걸음 늦은 것처럼 보였지만 공이 잔디에 닿는 순간 발끝을 뻗었다.
툭.
공이 그의 발등에 걸렸다.
상대 미드필더가 놀라서 멈췄다. 도윤은 곧장 앞으로 공을 밀었다. 태준이 오른쪽에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수비수 하나가 이미 그쪽으로 붙었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왼쪽 터치라인 쪽에 있던 윙어가 안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그가 공을 받을 자리까지는 선이 필요 없었다. 수비수의 시선이 태준에게 쏠린 것만으로 충분했다.
도윤은 빈 왼쪽으로 패스했다.
"좋아!"
윙어가 공을 받고 치고 나갔다. 태준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내렸지만 역습은 멈추지 않았다.
도윤도 페널티박스로 뛰었다. 처음에는 태준과 나란히 달렸다. 윙어가 고개를 들며 크로스를 준비하는 순간 태준이 앞으로 몸을 던져 골문 앞을 차지했다.
그 뒤에는 센터백 둘과 골키퍼가 있었다.
도윤의 눈앞에 골키퍼의 오른발과 수비수의 발끝이 푸른 선으로 겹쳤다. 선은 태준이 선 자리로 향했다. 공이 그곳에서 한 번 막히는 장면까지 보였다.
그는 선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로스가 낮고 빠르게 깔렸다. 태준이 공을 부르짖으며 발을 뻗었다. 수비수도 같은 순간 미끄러졌다. 둘의 발이 엉키며 공이 짧게 튀었다.
공은 도윤이 비워 둔 자리로 굴러왔다.
골키퍼가 몸을 낮췄다. 무릎이 먼저 왼쪽으로 꺾였다. 푸른 선은 그 손끝이 닿을 곳을 가리켰다.
도윤은 강하게 차지 않았다.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의 윗부분을 눌러 골키퍼가 비우는 오른쪽 아래로 밀었다. 공은 잔디를 낮게 스치며 손끝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철렁.
짧은 그물 소리에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도윤은 골문을 보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만 내려다봤다.
선이 시킨 자리가 아니었다. 선이 끝난 뒤에 남은 빈자리였다.
서 감독이 터치라인에서 팔짱을 풀었다. 코치가 그에게 무어라 속삭였지만 도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태준은 더 큰 목소리로 공을 요구했다. 도윤은 몇 번의 압박에 가담했고 한 번은 등을 지고 공을 지켜 냈다. 큰 장면은 더 없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지원자들은 물을 마시며 코치들의 얼굴을 훔쳐봤다. 누구도 합격 여부를 말하지 않았다.
도윤이 번호표를 떼려는데 서 감독이 불렀다.
"강도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여기로 다시 와. 팀 훈련에 섞여 봐야겠다."
태준의 시선이 등을 찔렀다. 도윤은 명함을 처음 받았던 날보다 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붙은 겁니까?"
서 감독은 단번에 답하지 않았다.
"아직 아니다. 오늘은 네가 어떤 선수인지 조금 봤을 뿐이야.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 자리를 찾으면 그때 말해 주지."
차가운 말이었다. 그런데 도윤은 이상하게 숨이 쉬어졌다.
아직 아니었다.
그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훈련장을 나서는 길에 주차장 쪽에서 공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놓친 공 하나가 경사로를 따라 내려왔다.
도윤의 눈앞에 푸른 선이 얇게 그어졌다.
그는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다음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