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인 척하고 도망쳤습니다

2화: 가장 높은 방의 손님
초여름 아침의 바닷바람은 물기 머금은 짠내와 함께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
리나는 12호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린넨 커튼이 하얗게 부풀어 오르며 방 안을 맴돌던 마른 먼지를 쓸어냈다.
침대 매트리스는 남부 건초와 바짝 말린 박하 잎을 섞어 채워 넣은 것이었다. 햇볕에 말린 시트를 팽팽하게 당겨 모서리를 정돈했다. 손끝에 닿는 천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북부 카시안 공작저의 침실은 늘 무겁고 어두웠다. 두꺼운 벨벳 커튼은 사계절 내내 빛을 차단했고 침대에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묵직한 모직 요가 깔려 있었다. 그 방에서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차가운 쇳조각이 얹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리나, 회의실 탁자 배치는 끝냈습니다.”
문가에서 테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보고했다.
“상석은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감사관과 공작이 나란히 앉든 마주 앉든 알아서 정하라고 의자를 전부 같은 높이로 맞췄어요.”
“잘하셨어요. 어느 한 사람만 돋보이게 의자를 놓으면 회의 시작 전부터 방에 날 선 잔향이 차오르니까요.”
리나는 침대 맡 탁자 위에 작은 청동 향로를 놓았다. 향로 안에는 연기를 피우지 않고 은은한 향만 배어 나오는 말린 감귤 껍질과 라벤더를 섞어 두었다.
뒤편 복도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약초 가방을 든 벨라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미간을 좁혔다.
“결국 그 사람에게 이 방을 주는 거니?”
“가장 조용하고 바람길이 좋은 방이에요.”
“네가 북부에서 도망칠 때 무슨 꼴이었는지 잊었어? 숨도 제대로 못 쉬어서 맥박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잖아. 그 남자가 네 고통을 단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적이 있었어?”
벨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슬이 퍼랬다. 그녀는 여전히 18개월 전 피를 토하듯 쓰러져 있던 엘리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리나는 시트의 주름을 조용히 매만졌다.
“잊지 않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라, 제가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이 방을 비워 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무서워서 가장 구석진 방으로 숨겨 둔 것도 아니고요. 파도의 집은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 맞는 방을 내주는 곳이에요. 공작이든 떠돌이 상인이든 돈을 내고 규칙을 지킨다면 똑같은 손님일 뿐이에요.”
벨라는 리나의 맑고 단단한 눈빛을 응시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독한 것. 그래, 네 뜻대로 해 봐. 대신 일이 틀어지면 바로 뒤뜰 마차로 뛰는 거다. 알겠지?”
“그럴 일 없게 할게요.”
리나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아래층에서 마리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차 우렸어요! 손님들 오시기 전에 한 잔씩 마셔요!”
주방으로 내려가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리차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마리는 커다란 주걱을 쥐고 리나를 반겼다.
“귀족 나리들이라 입맛이 까다로울 텐데 기름진 음식보다는 속을 달래 주는 맑은 조개탕이랑 구운 채소가 낫겠지요?”
“네, 마리. 장거리 마차를 탄 사람들은 속이 더부룩해서 단단한 고기를 소화하지 못해요. 첫날 저녁은 부드러운 해산물 죽과 찐 단호박으로 준비해 주세요.”
“알았어요, 주인님 손썰미대로 딱 맞춰 둘게요.”
파도의 집 직원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이것은 리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 여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언덕 아래 자갈길에서 육중한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테오가 창밖을 내다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습니다. 왕실 문장이 찍힌 마차 두 대와 북부 기사단 호위 마차 한 대입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맑은 종소리가 여관 로비에 퍼졌다.
가장 먼저 들어선 남자는 밝은 금발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화려한 장식을 덜어낸 단정한 제복 차림의 왕실 감사관 세드릭 아스텔이었다.
세드릭은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천장과 기둥을 훑어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호오, 비린내가 전혀 안 나는군요. 바닷가 여관치고는 공기가 아주 산뜻합니다.”
테오가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파도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관님. 지배인 테오 마르입니다.”
“반갑습니다, 지배인님. 소문대로 운치 있는 곳이군요. 그런데 이곳 주인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세드릭의 시선이 테오의 뒤쪽에 서 있던 리나에게 닿았다.
리나는 옅은 녹색 린넨 원피스 위에 단정한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밤색 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회녹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도의 집 주인 리나 벨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나는 남부식 평민 예법에 맞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허리를 숙였다.
세드릭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는 리나의 군더더기 없는 태도와 손끝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리나 벨 님. 왕실 감사단 열 명과 호위대 인원까지 열흘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소문으로는 손님의 체질에 맞춰 방을 내어주신다던데 맞습니까?”
“체질보다는 피로의 결을 살핍니다.”
리나는 카운터 위에 준비해 둔 숙박 서약서 두 장을 내밀었다.
“입실하시기 전에 여관 규정을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밤 열 시 이후의 소란 금지, 허가 없는 주방 및 관리 구역 출입 금지, 그리고 직원에게 사적인 시종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항입니다.”
세드릭의 뒤에 서 있던 서기관 한 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엄하군요. 왕실 조사관에게 서약서라니요.”
“로렌스, 조용히 해요.”
세드릭이 가볍게 손을 들어 부하를 제지했다. 그는 서약서를 훑어보더니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원칙이 분명한 곳일수록 잡음이 없는 법이죠.”
세드릭은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서약서 하단에 서명했다.
그때 현관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바깥의 차가운 바닷바람과 함께 묵직한 군화 소리가 로비 바닥을 울렸다. 공기의 온도가 순식간에 몇 도는 떨어진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리나의 숨이 찰나의 순간 멎었다.
검은 모직 코트에 은색 버클을 단 군복 차림의 남자. 짙은 흑발 아래로 서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레이먼드 카시안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북부의 한기 대신 남부의 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리나의 감각에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그의 위세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잔향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엉킨 불면의 끈,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자 특유의 찌르는 듯한 두통의 파동,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짓눌려 있는 메마른 피로.
그는 지쳐 있었다. 공작의 권위를 두르고 서 있었지만 속은 바짝 마른 장작처럼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레이먼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비를 훑다 리나의 얼굴에 멎었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에 낯선 동요가 스쳤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 늘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던 아내 엘리나.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햇볕을 받아 건강한 혈색이 도는 뺨과 곧게 편 허리, 그리고 흔들림 없이 자신을 마주 보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옷차림도 전혀 달랐다.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가 아니라 남부 서민들이 입는 소박한 린넨 차림이었다. 머리칼도 북부 귀족 부인들의 복잡한 올림머리가 아닌 실용적으로 묶은 매듭이었다.
외형의 조각들은 전혀 다른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류를 쥐고 있는 손가락의 각도와 숨을 고르는 찰나의 버릇에서 기묘한 기시감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쪽은 동행하신 북부 카시안 공작님이십니다.”
세드릭이 자연스럽게 소개를 건넸다.
리나는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도 띄우지 않았다.
“카시안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리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목소리는 평온했고 사투리가 살짝 섞인 남부 억양은 자연스러웠다.
레이먼드는 리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다.
“……그대가 여관 주인인가.”
“그렇습니다. 리나 벨이라고 합니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심이라기보다는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알 수 없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테오가 공작의 차가운 태도에 긴장하며 끼어들었다.
“공작 전하의 객실은 3층 최고층에 위치한 12호실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전망이 좋은 방입니다.”
레이먼드는 테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마침내 시선을 거두었다.
“안내해라.”
“제가 모시겠습니다.”
리나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와 리나의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레이먼드의 규칙적인 군화 소리만이 복도를 채웠다.
리나는 등 뒤에서 쏟아지는 레이먼드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과거 공작저의 복도를 걸을 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뒤를 따라 걸어준 적이 없었다. 늘 몇 걸음 앞서 걸었고 그녀는 그의 넓은 등 뒤를 쫓아가기 바빴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뒤를 따르고 있었다.
3층 복도 끝에 다다르자 리나는 황동 열쇠로 12호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원한 바다 냄새와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창밖으로는 마레아의 푸른 앞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방 안에는 인위적인 향수 냄새 대신 말린 허브와 남부 햇살의 따뜻한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레이먼드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멈춰 섰다.
관자놀이를 바늘로 찌르듯 괴롭히던 지독한 편두통이 신기할 정도로 누그러졌다. 며칠 동안 그를 옥죄던 북부의 냉기와 마차 안의 답답한 공기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방이 특이하군.”
레이먼드가 방 안을 둘러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바람길을 터서 공기가 고이지 않게 만든 방입니다.”
리나는 문가에 서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창문은 저녁 일몰 전까지 열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침구에는 수면을 돕는 약초가 들어 있으니 덮으시면 체온이 편안해지실 겁니다. 저녁 식사는 여섯 시 반에 1층 식당에서 준비되며 방으로 음식을 올리실 경우 미리 지배인에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레이먼드는 창가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문가에 선 리나에게로 돌아왔다.
“주인장.”
“말씀하십시오.”
“이 방의 배치는 그대가 직접 한 건가?”
“손님의 상태에 맞춰 가장 적합한 방을 준비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내 상태를 안다는 뜻인가?”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가 리나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리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게 마주 보았다.
“장거리 여행을 마친 손님들은 누구나 깊은 휴식이 필요합니다. 공작 전하께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아첨도 없었고 귀족을 향한 과도한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여관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직업적 태도만이 존재했다.
레이먼드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담담하게 선을 긋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알던 엘리나는 이런 눈빛을 하지 못했다. 언제나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며 시선을 바닥에 떨구던 아내였다.
레이먼드는 피로가 몰려오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알았다. 나가 봐도 좋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종을 울려 주십시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리나는 정중하게 목례를 한 뒤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리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멈춰 섰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세한 안도의 숨결이 번졌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도망치지 않고 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리나는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펴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파도의 집에서 그녀는 더 이상 숨죽여 울던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고 그녀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