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인 척하고 도망쳤습니다

1화: 죽은 이름이 예약 명단에 있었다
파도의 집 7호실에는 바다보다 짠 냄새가 배어 있었다.
리나는 문고리에 걸린 황동 열쇠를 손가락으로 감쌌다. 여섯 시간을 넘긴 물건에는 대개 주인의 잔향이 남았다.
차가운 금속 안쪽에서 피로가 눌어붙은 결이 느껴졌다. 그 위로 가느다란 불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방에 머물렀지만 쉰 흔적은 서로 등을 돌린 채 흩어져 있었다.
리나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손님. 아침 준비가 끝났습니다.”
안에서 낮게 언성이 오갔다. 잔향 감응은 말의 내용까지 읽어 주지 않았다. 리나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잠을 자지 못했고 한쪽의 마력이 다른 쪽의 불안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문이 열리자 중년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밤새 쥔 것처럼 구겨진 셔츠를 입었고 여자는 눈가가 붉었다.
“혹시 방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방은 좋았어요. 우리가 문제였지.”
여자가 웃으려다 고개를 숙였다.
“오늘 오전 목욕탕은 두 분이 따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남편분은 아홉 시에 온천탕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부인께서는 그 전에 약초탕을 쓰시겠어요?”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따로요?”
“같이 쉬는 것이 늘 같은 공간에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여자의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는 오래 묵은 통증의 잔향이 매달려 있었다. 아침은 한 상보다 각자 방으로 보내는 편이 나았다.
“소금기를 줄인 보리죽과 구운 배를 준비하겠습니다. 점심에 다시 같은 식탁을 잡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각자 드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끝에서 테오가 장부를 끌어안고 다가왔다.
“또 해결했군요. 저는 두 분이 짐을 싸서 나갈 줄 알았습니다.”
“나가고 싶은 손님을 억지로 붙잡지는 마세요.”
“붙잡은 적 없습니다. 다만 빈방은 장부에 아주 솔직하게 남거든요.”
주방 쪽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리죽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파도의 집은 리나 혼자 만든 곳이 아니었다. 리나는 손님이 남긴 피로와 불안을 읽었고 마리는 몸이 편해지는 음식을 만들었다. 테오는 빈방과 식재료와 급료를 계산했다. 그 셋의 일이 맞물릴 때 낡은 여관은 잠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집처럼 굴었다.
그때 현관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돈 냄새가 나는 손님입니까?”
테오가 장부 아래에 끼워 둔 봉투를 꺼냈다. 붉은 밀랍 위에는 아르델 왕실의 파도 문장이 선명했다.
“왕실 남부 관광 개발 조사단입니다. 열흘짜리 단체 예약이고 보증금은 오늘 안에 전액 들어옵니다.”
“객실은요?”
“상층 네 개와 별도 회의실 하나. 그리고 명단에 특별히 적힌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리나는 봉투를 받았다. 왕실 인장이 찍힌 종이는 사람을 이름보다 먼저 작게 만들곤 했다. 북부 저택에서 보았던 서류와 비슷했다. 누군가의 승인과 누군가의 침묵이 한 장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종이.
“열어 보세요. 안 열면 제가 궁금해서 죽습니다.”
“죽지 말고 직접 읽어요.”
리나는 밀랍을 잘랐다. 첫 줄에는 왕실 감사관 세드릭 아스텔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행원과 서기관들의 이름이 이어졌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리나의 손가락이 마지막 줄 위에서 멈췄다.
레이먼드 카시안.
검은 글자가 종이 위에서 깊게 패인 것처럼 보였다. 리나는 숨을 들이마시다 멈췄다. 목 안쪽이 마른 모래로 막힌 듯했다.
열여덟 달 전 장례식장에 놓인 관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엘리나 발렌의 시신이 있다고 믿었다. 지하의 작은 방에서 식은 손을 움켜쥐고 있던 사람은 엘리나 자신이었다.
관 뚜껑 위로 흙이 떨어지는 소리. 기도문을 읽던 사제의 목소리. 한 번도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던 남자가 관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모습.
리나는 종이를 접었다.
“취소하세요.”
테오가 눈을 크게 떴다.
“왕실 예약을요?”
“오늘 안에 보증금을 돌려보내고 객실 점검 문제를 사유로—”
“점검 문제라니요. 지붕도 배관도 멀쩡합니다.”
“그럼 다른 이유를 찾으면 됩니다.”
테오가 드물게 웃음을 지웠다.
“이 여관은 혼자 떠날 수 있는 여관이 아닙니다. 마리의 조카가 이번 달 급료를 기다리고 있고 두 하녀는 이미 다른 집 일을 거절했습니다.”
리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파도의 집 안에는 다섯 사람의 생활이 얽혀 있었다. 자신이 죽은 이름을 버리고 얻은 평온은 혼자만의 도피처가 아니었다.
현관 종이 다시 울렸다. 벨라가 약초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리나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인데 둘 다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처럼 서 있어?”
테오가 왕실 서류를 들었다.
“열흘짜리 예약입니다. 손님 중에 북부 카시안 공작이 있고요.”
벨라의 시선이 리나에게 돌아왔다.
“레이먼드?”
리나는 대답 대신 서류를 내밀었다.
벨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테오는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도 그가 리나에게 건넨 신뢰 중 하나였다.
“도착은 언제예요?”
“이틀 뒤 오후.”
“그럼 오늘 밤 배를 타면 아직 늦지 않아.”
벨라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현금이야. 네가 떠나기로 하면 바로 쓸 수 있어.”
리나는 주머니를 보았다. 떠날 수 있는 돈. 다시 이름을 바꿀 때 필요한 약.
“도망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벨라는 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네가 정해.”
리나는 봉투를 다시 펼쳤다. 레이먼드 카시안이 이곳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잔향 감응으로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다. 레이먼드가 자신을 찾는지 죽은 아내를 잊었는지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목적을 이미 정해 버리고 싶었다. 그가 체면을 지키려 왔다고. 죽은 아내의 흔적이 다른 곳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 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미워하기 쉬웠다.
“받겠습니다.”
테오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입니까?”
“왕실 감사단 예약을 받겠어요. 대신 특별 대우는 없습니다.”
리나는 서류를 테오에게 돌려주었다.
“모든 손님에게 적용되는 숙박 규칙을 먼저 보내세요. 회의실과 목욕탕 사용 시간을 정하고 식사는 사전 주문만 받습니다. 객실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고 직원에게 명령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넣고요.”
“공작에게도요?”
“공작에게 특히요.”
테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공작의 권력을 문밖에 벗어 두시라고 아주 정중하게 쓰겠습니다.”
“비꼬지 말고요.”
“저는 언제나 정중합니다.”
벨라가 코웃음을 쳤다.
“장부를 들고 손님을 협박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말다툼을 시작한 사이 리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높은 곳의 12호실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파도의 집 최고 객실이었다.
창문 틈으로 초여름 바람이 들어왔다. 전날까지 머물렀던 상인의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장거리 항해로 굳은 허리. 낯선 도시에서 혼자 잠들기 전 느낀 경계심. 그리고 새벽에 바다를 확인한 뒤 조금 가라앉은 숨.
리나는 책상 모서리를 쓸었다.
12호실은 사생활이 보장되고 계단을 통해 바로 현관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레이먼드가 이 방을 쓰면 자신의 움직임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감시하려고 방을 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손님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했다.
리나는 창문 잠금쇠와 현관 열쇠를 확인했다. 비상용 촛불을 침대 옆에 두었다.
“네가 이 방을 주려고?”
뒤에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고 객실이니까요.”
“그 사람에게서 가장 먼 방을 줄 수도 있잖아.”
“그러면 다른 손님에게 설명해야 해요. 그가 왜 특별 취급을 받는지도요.”
“네가 그 이름을 보고 손을 떨었는데도?”
리나는 잠금쇠에서 손을 뗐다.
“떨리는 건 제가 처리할 일입니다. 여관 규칙은 손님에게 보여 줄 일이고요.”
벨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이먼드가 너를 알아보면?”
“아직 그가 저를 찾는다고 정해진 건 아니에요.”
“알아보지 못하면?”
리나는 바다를 보았다. 파도는 절벽 아래에서 부서졌고 흰 포말은 금세 사라졌다.
“그것도 제가 감당할 일입니다.”
말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이곳의 문을 닫고 사라지면 레이먼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삶을 벌주는 일이 된다.
아래층에서 테오가 외쳤다.
“리나! 회신용 서신이 왔습니다!”
검은 외투를 입은 전달원이 예약 확정서와 객실 요구 목록을 건넸다.
“카시안 공작께서는 감사단과 같은 날 오후에 도착하십니다. 회의 전까지 외부 접촉을 줄여 달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파도의 집은 손님을 가두는 곳이 아닙니다.”
리나가 먼저 말했다.
테오가 급히 서신을 받아 들었다.
“외부 접촉을 줄인다는 건 조용한 객실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여관 규칙에 맞춰 안내하죠.”
전달원이 떠난 뒤 리나는 확정서의 마지막 줄을 보았다. 레이먼드 카시안의 서명이 있었다. 예전에도 그는 중요한 문서에 같은 방식으로 서명했다. 망설임이 없는 척하는 글씨.
리나는 펜을 들었다.
“회신하겠습니다.”
벨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예약을 확인합니다. 파도의 집은 모든 손님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고 요청하신 객실은 12호로 준비하겠습니다.”
리나는 종이 위에 리나 벨이라고 서명했다.
죽은 엘리나 발렌이 아닌 이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이름. 자신이 살아남은 뒤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지켜 낸 이름.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객실 배치표가 새로 붙었다. 12호실에는 왕실 감사단의 대표 손님 이름이 적혔다.
레이먼드 카시안.
리나는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입실 전 숙박 규칙 확인.’
이틀 뒤면 죽은 이름을 달고 있던 남자가 이 문을 열 것이다.
리나는 현관의 빗장을 확인하고 손을 내려놓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두려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문밖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파도의 집의 주인으로서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 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