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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4화

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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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머물거나 물러나거나]

수요일 저녁 7시 40분, 윤서의 휴대폰 화면에 짧은 진동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떴다.

식탁 위에 놓인 작은 국그릇과 반듯하게 썰린 계란말이, 그리고 숟가락을 쥐고 환하게 웃는 하린의 얼굴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다른 군더더기 없이 짧은 문장 하나만 덧붙어 있었다.

  • 밥 다 먹었어. 알레르기 반응 없고 기분 좋아. 8시에 문 열어 둘게.

윤서는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노란 조명 아래 하린의 뺨은 붉었고 식판 옆에는 물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현은 약속했던 시각을 어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의 말을 보태지도 않았다.

윤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201호 현관으로 걸어갔다.

시계 바늘이 저녁 7시 59분을 가리켰다. 윤서는 문을 열고 조용한 복도로 나섰다. 한 걸음, 두 걸음. 복도 끝 202호 문 앞에 서자마자 정확히 8시 정각을 알리는 전자식 차임벨이 복도에 울리지도 않은 채 도어록이 스르륵 풀렸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현관 안쪽에 선 도현은 노란 토끼 가방을 멘 하린의 작은 손을 잡고 있었다. 신발장 앞에는 하린의 운동화가 가지런히 바깥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엄마!”

하린이 윤서를 보자마자 깡총 뛰며 문턱을 넘어왔다.

“계란말이에 당근이랑 시금치 들어갔는데 진짜 맛있었어. 아빠가 타이머 울릴 때까지 기다려야 제일 맛있댔어.”

도현은 현관 문지방을 밟지 않은 채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은 하린의 머리를 한 번 스친 뒤 윤서에게 머물렀다.

“가방 안에 양말이랑 물티슈 그대로 넣었어. 양치는 아까 시켰는데 집에서 한 번 더 헹구는 게 나을 거야.”

“알았어.”

윤서는 하린의 손을 잡으며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의 표정은 차분했고 어떤 과장된 친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서늘한 안도감을 주었다.

“수고했어.”

“조심해서 들어가.”

도현은 짧게 답한 뒤 하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린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자 도현은 문을 천천히 닫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걸렸다.

201호로 돌아온 하린은 욕실에서 입을 헹구고는 곧장 안방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 아빠 집도 좋은데 엄마 집 침대가 제일 푹신해.”

“그래? 다행이네.”

윤서는 아이의 이마를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하린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어 본 뒤 윤서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 식탁으로 나왔다.

내일 오후 2시는 모과 라운지 리모델링 첫 기획 면접이었다.


목요일 오전, 윤서는 하린을 유치원에 등원시킨 뒤 작업 가방을 챙겼다.

가방 안에는 수정된 도면과 자재 샘플 북, 그리고 작은 레이저 줄자가 들어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는 서민재로부터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오세라 대표, 출판사 편집장 출신이라 말 돌리는 거 제일 싫어해. ‘모두가 소통하는 따뜻한 공간’ 같은 두루뭉술한 말 쓰면 3분 만에 하품할걸.

윤서는 씁쓸하게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민재가 전화를 받았다.

“준비는 다 됐어?”

“도면 수정 다 끝냈어. 중앙 테이블 없애고 1인용 독서 벤치랑 유모차 정차 구역 나눴어.”

“잘했네. 세라 대표가 어제 통화에서 그러더라. 기존 인테리어 업체 세 군데가 다 똑같은 카페식 인스타 감성 조감도만 들고 와서 돌려보냈대. 빌라 주민들이 거기서 사진 찍고 놀 일 있냐면서.”

“맞아. 빌라 라운지는 카페가 아니니까.”

윤서는 연필 끝으로 도면의 여백을 톡톡 두드렸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다가 택배 상자 잠시 올려둘 선반, 퇴근길에 윗집 사람 마주쳤을 때 굳이 인사 안 하고도 어색하지 않게 시선 피할 수 있는 파티션, 아이가 갑자기 울 때 달래며 들어갈 수 있는 구석 자리. 그런 게 진짜 필요한 거잖아.”

수화기 너머에서 민재가 짧은 탄성을 냈다.

“바로 그거야, 윤서야. 그게 네 무기야. 화려한 3D 그래픽보다 사람이 실제로 발 딛고 서는 자리를 아는 거. 떨지 말고 네가 본 그대로 말하고 와.”

“고마워, 민재야. 다녀올게.”

통화를 마친 윤서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시계는 오후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2시 정각, 윤서는 1층 모과 라운지 문을 열었다.

공사 전의 라운지는 회색 시멘트 바닥과 낡은 형광등 불빛으로 휑했다. 창가 쪽 낡은 2인용 소파에는 짙은 자주색 재킷을 입은 여성이 서류철을 든 채 앉아 있었다. 단정한 숏컷에 날카로운 뿔테 안경을 쓴 오세라 대표였다.

“한윤서 씨?”

세라는 시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공간 기획자 한윤서입니다.”

세라는 눈빛으로 윤서를 빠르게 훑었다. 과하지 않은 셔츠 차림과 손에 든 도면 통을 본 세라의 입가에 엷은 호기심이 스쳤다.

“앉아요. 201호 입주자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우리 건물에 공간 디자이너가 들어왔다길래 궁금하긴 했지.”

세라는 맞은편 간이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윤서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도면을 꺼내 소파 앞 낮은 탁자 위에 반듯하게 펼쳤다.

세라가 팔짱을 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앞서 면접 본 업체들은 죄다 화려한 원목 바 테이블에 에스프레소 머신 놓자고 하더군요. 북카페니 커뮤니티 살롱이니 하면서. 그런데 윤서 씨, 요즘 사람들이 옆집 사람이랑 차 마시며 수다 떨고 싶어 하나요?”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질문이었다. 윤서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세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대부분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럼 이런 공간을 왜 만듭니까? 관리비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될 텐데.”

“사람들이 마주치기 싫어하는 건 이웃이 미워서가 아니라 퇴근 후나 외출 전의 지친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예요. 억지로 관계를 강요하는 공간은 외면받지만 혼자 머물면서도 고립되지 않는 공간은 필요합니다.”

윤서는 도면의 중앙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래서 저는 중앙의 대형 테이블을 없앴습니다. 대신 벽면을 따라 시선이 겹치지 않는 1인용 포켓 좌석을 두고 입구에서 안쪽이 한눈에 보이지 않도록 반투명 간살 파티션을 설계했습니다.”

세라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시선 차단 파티션?”

“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소파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야 양쪽 모두 편안합니다. 그리고 여기, 우편함 옆에는 장바구니나 택배 상자를 잠시 내려놓고 우편물을 확인할 수 있는 허리 높이의 드롭 바를 배치했습니다. 아이를 안은 보호자가 현관 키를 찾을 때 기댈 수 있는 안전 손잡이도 포함했고요.”

윤서의 설명은 화려한 건축 용어가 아니었다.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고 문을 여닫는 사람들의 실제 동작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세라는 한참 동안 도면의 선들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장바구니 내려놓는 선반이라…… 확실히 장 보고 올라갈 때 비밀번호 누르는 동안 손목 부러질 것 같긴 하지.”

세라의 입가에 처음으로 작은 웃음기가 번졌다.

“여기 창가 쪽 구석 자리는 뭐죠? 의자가 벽을 향해 있네요.”

“소음이나 시선에 방해받지 않고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 5분 동안 머리를 식히고 싶은 1인 가구나 아이가 보챌 때 잠시 들어와 달랠 수 있는 완충 지대예요.”

윤서는 도면 귀퉁이에 적어 두었던 문장을 떠올렸다.

“머무르고 싶을 때와 물러나고 싶을 때를 모두 지키는 공간이어야 주민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세라는 서류철을 탁 덮었다. 라운지 안에 경쾌한 마찰음이 울렸다.


“마음에 드네요.”

세라는 안경을 벗어 셔츠 주머니에 꽂으며 명쾌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공간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전시장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윤서 씨는 여기서 살 사람들의 숨구멍을 뚫어 놨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윤서는 가슴 속에서 묵직하게 차오르는 안도감을 느꼈다. 독립 후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이름과 철학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라는 곧바로 현실적인 조건을 덧붙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요. 입주민 회의에서 배정된 리모델링 예산이 생각보다 빠듯해요. 설계는 훌륭하지만 자재나 조명 단가를 맞추려면 꽤 빡빡할 겁니다.”

“예산 범위 안에서 내구성이 검증된 국산 친환경 합판과 모듈형 집기를 쓰면 충분히 구현할 수 있습니다. 단가 산출 내역도 미리 정리해 왔습니다.”

윤서가 덧붙여 낸 견적 비교표를 본 세라의 표정이 한층 더 만족스러워졌다.

“준비가 아주 철저하네. 좋아요. 이번 주말 주민 투표 안건으로 윤서 씨 기획안을 단독 상정할게요.”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며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라운지 조명이랑 환기, 원격 도어록 같은 스마트 설비 제어 쪽은 예산을 아끼려고 전문 업체 대신 자문을 구하기로 했어요. 마침 우리 빌라 202호 입주자가 그쪽 대기업 엔지니어링 전문가더라고요. 무보수로 설비 설계를 도와주겠다고 해서 윤서 씨 도면 나오면 연계해 줄 생각이에요.”

순간 윤서의 숨이 턱 멎었다.

‘202호…… 도현이?’

세라는 윤서의 미세한 굳어짐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주말 투표 끝나고 월요일에 계약서 작성하러 오세요. 기대 이상이었어요, 한윤서 씨.”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세라가 라운지를 빠져나가고 문이 닫혔다.

텅 빈 라운지 한가운데 윤서만 홀로 남았다. 탁자 위에는 방금 호평을 받은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머무르고 싶을 때와 물러나고 싶을 때를 모두 지키는 공간.’

자신이 설계한 그 공간 안에 도현의 손길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서늘하게 밀려왔다. 하린의 아빠로서 선을 긋기 시작한 남자가 이제는 자신의 첫 독립 프로젝트 문턱 앞에 서 있었다.

윤서는 천천히 도면을 말아 가방에 넣었다. 독립의 첫걸음은 분명히 내디뎠지만 그녀가 넘어야 할 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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