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3화

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AD
스폰서 광고

3화 [계약서에 없던 거리]

월요일 아침, 윤서는 현관문 아래로 밀려 들어온 안내문을 집어 들었다.

모과하우스 입주민 공지와 분리수거 일정이 적힌 종이 사이에 임대차 관리 확인서가 끼어 있었다. 새 입주자들의 계약일과 관리비 자동이체일을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윤서는 무심코 202호 줄을 읽다가 손을 멈췄다.

입주일 옆에는 지난주 금요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했다. 자신과 하린이 201호 계약을 마친 날보다 사흘 뒤였다. 도현은 어제야 파견에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건물을 골랐다는 뜻이었다.

윤서는 종이 모서리를 반듯하게 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는 목요일 면접에 가져갈 모과 라운지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창가 벤치와 낮은 테이블, 유모차가 지날 통로가 연필 선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잠깐 앉아 쉬는 공간에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비켜설 자리도 필요했다. 윤서는 창가 벤치 끝에 작은 파티션을 그렸다가 지웠다. 막아 버리면 답답하고 열어 두면 쉬기 어려울 터였다.

그 선은 자꾸 202호 문 앞에서 끊겼다.

하린이 작은방에서 나와 우유를 찾았다. 윤서는 아이에게 컵을 건네고 휴대폰을 들었다.

  • 오늘 오후 다섯 시에 1층 라운지에서 십 분만 이야기할 수 있어?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가능해. 내가 내려갈게.

윤서는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약속을 지키는 태도와 이웃이 되기로 한 이유는 다른 문제였다.


오후 다섯 시, 1층 라운지는 아직 공사 전의 빈 방이었다.

낡은 소파 두 개와 고장 난 잡지꽂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창문 가까이는 볕이 잘 들었지만 출입문 쪽은 낮에도 어두웠다. 윤서는 입구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대화가 길어지면 언제든 먼저 나갈 수 있는 자리였다.

도현은 정확히 다섯 시에 내려왔다. 작업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소매를 걷은 손목에 얇은 먼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202호의 남은 짐을 정리하다 온 듯했다.

“무슨 일이야?”

윤서는 관리 확인서를 내밀었다.

“202호 계약 날짜 봤어. 내가 계약한 뒤였네.”

도현은 종이를 보지 않았다. 윤서의 눈을 잠시 마주했다가 시선을 내렸다.

“응.”

“회사 근처라서 계약했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빈 라운지에 윤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도현은 바로 변명하지 않았다.

“성수 쪽에 맡은 현장이 많아. 출근 시간이 들쭉날쭉해도 여기서면 대응할 수 있어. 하린이 유치원과도 멀지 않았고.”

“그런 조건의 집은 많아.”

“알아.”

윤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알면서도 결정했다는 말이 가장 불편했다.

도현은 창가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윤서가 선 자리를 비켜 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가까이 있고 싶었어. 하린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갈 수 있는 거리. 네가 갑자기 도움이 필요할 때도.”

“내가 도움을 요청한 적 있어?”

도현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없었어.”

“그런데 왜 내 생활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건데?”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윤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지치게 들렸다.

도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뺐다.

“들어와도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네가 싫다고 하면 202호에서 하린이 만나는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럼 계약 전에 한마디라도 했어야지.”

“말하면 네가 부담스러울 것 같았어.”

“말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야, 도현아.”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윤서는 그가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일 것이라는 걸 알았다. 과거에도 그랬다.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뒤에는 상대가 선택할 자리를 남기지 않았다.

“맞아.”

도현이 낮게 말했다.

“내가 정하고 알려 주는 방식이었어. 이번에도 그랬고.”

윤서는 그 인정이 쉽게 들리지 않았다. 말 한마디가 오래된 빈자리를 메워 주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 네가 가까이 있는 게 편하지 않아.”

“알아.”

“알면 기다려. 하린이한테 필요한 일 말고는 내 일에도 내 집에도 들어오지 말고.”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할게. 설득하려고 한 건 아니야.”

“이웃이 되면 네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그 판단도 네 몫이야. 나는 그걸 믿을지 말지 내 시간을 갖고 결정할 거고.”

도현은 잠시 윤서를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윤서는 그 침묵이 여전히 답답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자신의 요구가 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수요일 약속은 그대로야.”

“응. 여섯 시부터 여덟 시.”

“시간 지나면 내가 데리러 갈게.”

“문 앞에서 보낼게.”

도현은 먼저 라운지를 나갔다. 윤서는 빈 방 한가운데 남아 출입문과 창문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쟀다. 함께 쓰는 공간에도 서로 물러날 곳은 필요했다.


저녁, 민재의 전화가 왔다.

“도면 봤어. 창가 벤치 앞에 테이블을 너무 붙였어. 쉬러 온 사람이 계속 누군가와 마주 봐야 하잖아.”

윤서는 식탁에 팔을 기대고 도면을 내려다봤다.

“그럼 테이블 하나를 빼고 작은 독서등을 둘까?”

“좋지. 면접에서는 예쁜 공간보다 누가 어떤 순간에 쓰는지 말해. 유모차 끌고 들어온 사람도, 택배 기다리며 잠깐 앉는 사람도, 혼자 있고 싶은 사람도 있어야 해.”

윤서는 연필로 테이블 하나를 지웠다. 빈 자리에 낮은 조명과 가벼운 의자를 그려 넣었다. 출입문이 열려도 바로 안쪽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의자 방향을 돌렸다.

“목요일 오후 두 시지?”

“응. 세라 대표가 주민 의견도 몇 개 들려준다더라. 윤서 너는 동선 얘기할 때 제일 설득력 있어. 사는 사람 입장에서 그린 도면이니까.”

윤서는 도면의 여백에 작게 적었다. ‘머무르고 싶을 때와 물러나고 싶을 때를 모두 지키는 공간.’

“오늘은 더 하지 말고 하린이랑 저녁 먹어.”

통화가 끝나자 하린이 방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수요일에 아빠 집 가면 노란 불 켜져 있어?”

“있겠지.”

“그럼 나 아빠 집에서 책도 읽고 계란말이도 먹고 싶어.”

윤서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래. 그런데 여덟 시에는 엄마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왜? 아빠 집도 내 집 같은데.”

윤서의 손이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다 멈췄다. 이 말에 서둘러 아니라고 답하면 하린이 아빠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잘못된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하린이한테 아빠 집은 소중한 집이야. 그렇지만 하린이가 자고 일어나는 집은 지금 엄마랑 사는 201호야. 아빠 집에 가는 시간은 엄마랑 아빠가 약속해서 정하는 거고.”

“두 집 다 내 거면 안 돼?”

“하린이가 두 집에서 사랑받는 건 맞아. 그건 안 바뀌어.”

윤서는 아이의 눈을 보고 천천히 말을 골랐다.

“다만 오래 있을지, 언제 갈지는 어른들이 하린이가 편한지 보고 정해야 해. 하린이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정하는 건 아니야.”

하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요일에는 여덟 시까지 좋아.”

“응. 엄마도 약속 지킬게.”

윤서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약속을 설명하는 일은 기대를 꺾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수요일 오후, 윤서는 하린의 작은 가방에 여벌 양말과 물티슈를 넣었다.

알레르기 약은 평소처럼 지퍼 달린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도현은 약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린이 두 돌 무렵부터 약을 챙긴 사람은 윤서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첫 방문에는 확인할 것이 많았다. 윤서는 모든 준비를 혼자 끝내야 마음이 놓이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도현에게 맡기는 일이 그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린에게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주는 일일 뿐이었다.

윤서는 휴대폰으로 짧은 문자를 보냈다.

  • 하린이 알레르기 약은 가방 안주머니에 있어. 견과류 들어간 간식은 안 돼. 식사 끝나면 일곱 시 사십 분쯤 사진 한 장만 보내 줘. 여덟 시에 내가 문 앞으로 갈게.

도현의 답장은 곧 도착했다.

  • 확인했어. 견과류 없는 재료만 썼어. 일곱 시 사십 분에 보내고 여덟 시에 데려다줄게.

윤서는 마지막 문장을 보고 다시 적었다.

  • 아니. 내가 202호 앞으로 갈게. 하린이가 두 집 사이를 혼자 오가는 느낌 들지 않게.

  • 알겠어. 문 앞에서 기다릴게.

하린은 노란 토끼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 이제 가도 돼?”

“응.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야. 문 열고 들어가면 아빠한테 먼저 약속 말해 줄 수 있어?”

“응. 여덟 시에 엄마가 데리러 와.”

윤서는 아이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202호 앞에서 도현이 문을 열고 서 있었다. 현관 안쪽에서는 소고기국 냄새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도현은 하린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서 와.”

하린이 환하게 웃으며 신발을 벗었다. 윤서는 문턱 밖에 멈췄다.

“여덟 시.”

“응. 약속대로.”

도현의 대답은 짧았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이 닫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 안쪽에서 하린의 환호가 터졌다.

“아빠, 타이머도 있어?”

잠시 뒤 맑은 알림음이 들렸다. 도현은 아마도 국 끓는 시간을 맞춰 둔 모양이었다.

윤서는 복도 끝까지 걸어가다가 멈췄다. 벽 하나 너머의 저녁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기쁨까지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201호로 돌아와 식탁 위 도면을 다시 펼쳤다. 비워 둔 자리 하나에 연필 끝을 올리고 조명 옆에 작은 글씨를 더했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잠깐 머물 수 있는 자리.’

목요일 면접에서 윤서는 그 자리를 지켜 낼 생각이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