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

5화: 뜨거운 이웃의 입주
다음 날 오전 강현우는 새 TV 앞에서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어젯밤 멈춘 게임의 보스가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85인치 화면은 좋았다. 보스의 이빨도 공격 범위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바닥이 진동했다.
쿵.
현우의 손가락이 일시 정지 버튼 위에서 멈췄다. 잠시 뒤 두 번의 진동이 더 이어졌다. 세 번이었다.
수정 패널의 경고창이 화면 구석에 겹쳐 떠올랐다.
[16층 하부 열성 마력 반응 증가]
[15층 냉각선 외벽 온도 상승]
"TV는 멀쩡하네."
청소 골렘이 온도 측정기로 거실 바닥을 살폈다.
"냉각선 외벽 온도 4도 상승. 현재 안전 범위입니다. 반복되면 벽면 고정 구조에 부담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벽에 부담을 주면 안 되지. TV 걸어 놨는데."
현우는 후드티 위에 작업 조끼를 걸쳤다. 슬리퍼를 벗고 안전화를 신은 뒤 열 측정기와 빈 수정 상자를 챙겼다.
"16층 내려간다. 시끄러운 애들 조용히 시키고 올게."
"무장하시겠습니까?"
"집수리에 무장은 왜 해."
그는 16층으로 이어지는 공간문을 열었다.
15층의 따뜻한 공기가 갈라지고 뜨거운 바람이 현우의 얼굴을 스쳤다. 지난밤보다 열기가 강했다. 푸른 수맥이 흐르는 벽 반대편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통로 바닥에는 검은 돌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그 위로 작은 불덩어리 하나가 통통 튀었다.
불덩어리는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납작하게 눌렸다가 다시 부풀었다. 중심에는 노란 눈처럼 보이는 핵이 박혀 있었다.
측정기가 짧게 울렸다.
[개체 분류: 화염 슬라임]
[위험 등급: B급]
[열원 섭취 반응: 강함]
"슬라임이네."
현우가 한 발 다가가자 불덩어리가 튀어 올랐다. 열기가 손등을 스쳤지만 공격이라기보다 냄새를 맡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뒤쪽 균열에서 같은 불덩어리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하나 둘 셋. 잠깐 사이에 열두 마리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화염 슬라임들은 16층 벽 안쪽의 뜨거운 틈으로 몰려갔다. 그곳에는 2호기에서 내려온 냉각선의 바깥쪽으로 미세한 열이 새고 있었다. 슬라임들이 배관을 핥듯 달라붙자 금속 표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기 붙으면 안 돼. 그건 우리 집 냉각선이야."
현우가 손을 들었다.
벽이 접히며 슬라임과 배관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하지만 화염 슬라임 세 마리가 몸을 길게 늘였다. 늘어난 몸체가 틈을 건너뛰며 배관을 다시 감쌌다.
청소 골렘이 수정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열원 개체가 공간 재편의 끝점을 따라 이동합니다. 단순 격리는 어렵습니다."
"그럼 끝점을 바꾸면 되지."
현우는 불덩어리 열두 개를 바라봤다. 열을 꺼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의 물은 여전히 차가웠고 16층 수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보일러로 쓰기에는 반대 방향의 힘이었다.
"잡아서 쓰면 온수 만들 수 있겠네."
"생포 후 용도를 변경합니까?"
"응. 우리 집에 보일러 하나 들이는 거야."
가장 앞의 화염 슬라임이 은빛 배관을 향해 다시 튀어 올랐다.
현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통로 바닥이 세 갈래로 접혔다. 슬라임들이 달려가던 길은 배관이 아니라 빈 암벽 쪽으로 휘었다. 현우는 그 끝에 작은 열판 하나를 띄웠다.
열판은 2호기에서 버려지는 열을 얇게 뽑아내고 있었다.
화염 슬라임들이 동시에 방향을 바꿨다.
"생각보다 단순하네."
그는 열판 뒤쪽에 공간 벽을 세웠다. 슬라임들은 열판을 덮으려다 투명한 벽에 부딪혔다. 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열은 벽 밖으로 새지 않았다.
청소 골렘이 수정 격자를 펼쳤다. 격자 사이의 빈틈은 슬라임 하나가 지나갈 정도였고 마력 흐름은 열을 네 방향으로 분산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한 마리씩 넣어."
"현재 개체가 동시에 접근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열판을 움직여."
골렘이 열판을 왼쪽으로 옮기자 슬라임 무리가 따라 움직였다. 열판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무리도 방향을 틀었다. 현우는 그 사이마다 바닥을 접어 작은 경사로를 만들었다.
첫 번째 슬라임이 격자 안으로 미끄러졌다.
현우가 손을 오므리자 격자 주위의 공간이 고정됐다. 붉은 몸체가 벽을 두드렸지만 격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같은 방식으로 들어갔다. 네 번째 슬라임이 갑자기 몸을 부풀렸다. 격자 틈 사이로 불길이 뻗으며 벽을 태웠다.
"출력 높이지 마."
현우는 번지는 불길을 빈 비상 격실로 밀어 넣었다. 격실 안쪽의 바닥이 열을 넓게 퍼뜨리자 불길은 낮아졌다.
청소 골렘이 수정 상자 안쪽에 얇은 마력판을 세웠다. 한곳에 모인 열이 통로 전체로 나뉘어 퍼졌다.
현우가 열판의 출력을 낮추자 가장 큰 슬라임 하나가 앞으로 미끄러졌다.
"이제 됐어."
현우가 바닥을 한 번 더 접었다. 열판에서 격리실까지의 길이가 짧아졌다. 슬라임 하나가 들어갈 때마다 입구가 닫혔고 다음 개체가 같은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마지막 슬라임이 격자 안으로 들어간 순간 통로의 붉은 빛이 약해졌다.
측정기 화면에 숫자가 떠올랐다.
[열성 마력 외벽 누출 감소]
[배관 온도 안정]
[포획 개체 수: 12]
현우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안 힘드네."
그때 격리실 안쪽에서 열이 세 번 뭉쳤다.
쿵. 쿵. 쿵.
열판의 불빛이 아래쪽으로 흔들렸다. 화염 슬라임 열두 마리가 같은 순간 몸을 부풀렸다가 가라앉혔다.
청소 골렘이 측정기를 들어 올렸다.
"심층부 진동과 열원 개체의 마력 파형이 일치합니다. 세 번 반복 후 안정됩니다."
"따라 하는 건가. 아니면 같이 움직이는 건가."
"판별할 수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일단 집부터 따뜻하게 만들고."
현우는 격리실 출구를 닫았다. 두꺼운 공간층이 겹쳐진 문은 안쪽의 열을 막지 않고 바깥으로 튀는 불꽃만 차단했다.
15층으로 돌아온 현우는 발전실 옆 빈 저장실을 확인했다. 오래된 마석 상자와 사용하지 않는 배관 조각이 쌓여 있었다.
"여기 비워."
청소 골렘이 손을 휘두르자 상자들이 한쪽으로 정리됐다. 현우는 저장실 바닥을 넓히고 천장을 높였다. 방 한가운데에 열두 개의 작은 격실이 생겼다.
각 격실은 투명한 수정판으로 나뉘었다. 화염 슬라임의 불꽃은 통과하지만 몸은 넘지 못하는 간격이었다. 격실 바깥에는 물이 흐를 은빛 관이 둘러졌다.
"물을 바로 닿게 하면 안 됩니다."
"알아. 불 끄는 게 아니라 데우는 거니까."
현우는 16층 수맥에서 올라오는 냉각선의 가지 하나를 이 방까지 끌어왔다. 차가운 물은 수정판 바깥쪽을 돌고 불꽃과 직접 맞닿지 않았다.
열은 수정판을 통과해 물로 넘어갔다. 수맥의 냉기와 화염 슬라임의 열은 사이에서 천천히 섞였다.
그는 벽에 작은 탱크를 설치했다. 탱크는 욕실 급수관과 이어졌고 위쪽에는 온도계와 압력계가 달렸다.
청소 골렘이 부품을 확인했다.
"급수량 조절판과 온도 감지기를 설치했습니다. 열원 투입량은 어떻게 정합니까?"
"한 마리씩 깨어 있게 해. 나머지는 쉬게 하고."
"화염 슬라임에 수면 상태가 있습니까?"
현우는 격실 안의 불덩어리를 바라봤다. 열두 마리 중 네 마리는 작게 웅크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수정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저렇게 작아졌으면 쉬는 거겠지."
그는 저등급 마석 조각 하나를 첫 번째 격실에 넣었다. 화염 슬라임이 마석을 삼키자 몸 안의 불빛이 밝아졌다.
탱크의 온도가 18도에서 31도로 올랐다. 현우가 두 번째 격실에도 마석을 넣자 온도는 44도까지 올라갔다.
"좋네."
세 번째 마석을 넣으려는 순간 경고음이 울렸다.
[급수 온도 상승 속도 과다]
[열원 간격 조정 권장]
현우는 마석을 다시 꺼냈다. 열원실 안쪽의 수정판 세 장이 동시에 붉어지고 있었다.
"붙여 놓으니까 열이 겹치네."
그는 손바닥으로 격실 사이의 공간을 밀었다. 수정판은 그대로였지만 각 격실의 내부 공간이 조금씩 멀어졌다. 열은 유지됐고 서로 겹치던 파장은 약해졌다.
청소 골렘이 압력계를 확인했다.
"온도 상승 속도 정상. 현재 47도입니다."
현우는 욕실 수도를 열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물이 나왔다. 잠시 뒤 관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전해졌다. 따뜻한 물줄기가 손등을 적셨다.
현우는 수도꼭지를 더 열었다. 물은 47도에서 안정됐다. 뜨겁지만 바로 손을 뺄 정도는 아니었다.
"온수 나왔네."
던전의 물은 늘 차가웠다. 세수할 때도 몸을 씻을 때도 마력으로 데우거나 짧게 끝내야 했다.
이제는 버튼 하나면 따뜻한 물이 나왔다.
청소 골렘이 열원실 앞에 새 표지판을 달았다.
[화염 슬라임 보일러 1호기]
[열원 상태: 안정]
[온수 공급: 정상]
현우는 표지판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괜찮네."
그는 욕실에 수건을 걸고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뜨거운 김이 욕실 거울을 뿌옇게 덮었다. 바깥의 던전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이 방만큼은 평범한 아침처럼 따뜻했다.
샤워를 마친 현우가 거실로 돌아오자 새 TV 화면에서 게임 시작 알림이 반짝였다. 통신 수정구에도 서연희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85인치 TV는 잘 작동하나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현우는 새로 붙은 보일러 표지판을 바라봤다.
[TV는 잘 됩니다. 온수 보일러도 만들었어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던전에서 보일러까지 만드셨다고요?]
[슬라임이 열을 내서요.]
[그게 더 놀라운 설명인데요.]
현우는 대화를 끝내고 게임을 켰다. 화면 속 보스가 다시 포효했다.
그 순간 발전실 아래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쿵. 쿵. 쿵.
열원실의 화염 슬라임들이 동시에 몸을 부풀렸다. 탱크의 온도계가 47도에서 51도로 움직였다.
현우는 바로 열원실로 가서 세 번째 격실의 마석을 빼고 열원 간격을 넓혔다. 온도는 다시 47도로 내려갔다.
"진동할 때는 출력도 같이 오르네."
그는 벽면에 심층부 진동 기록을 새로 저장했다. 세 번의 짧은 파동 뒤에는 언제나 슬라임의 열이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네 번째 울림이 이어졌다.
쿵.
짧지 않았다. 벽 안쪽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몸을 뒤척이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욕실 수도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을 바라봤다. 더 큰 탱크를 만들면 욕조를 채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거실로 돌아와 TV 화면을 다시 재생했다.
"다음은 욕조를 키우자."
열원실 안의 슬라임 하나가 붉은 눈을 크게 떴다. 탱크 아래에서 따뜻한 물이 조용히 순환했고 16층보다 더 아래에서 네 번째 진동의 잔향이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