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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4화

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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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85인치의 평화

강현우는 로딩 바가 움직이는 화면 위로 서연희의 메시지를 띄웠다.

[85인치 에스전자 OLED TV입니다. 본체는 가로 189센티미터, 세로 108센티미터입니다. 포장 폭은 210센티미터가 필요합니다.]

화면 아래에는 설치 조건이 붙어 있었다. 벽면 고정용 브래킷과 전용 전원선이 필요하고 설치 기사가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현우의 손가락이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

[설치 기사는 필요 없습니다. 물건만 개찰구 택배함에 넣어 주세요.]

[그럴 줄 알고 제품만 받는 조건으로 협의했습니다. 다만 화면이 커서 현우 씨 집 벽면이 버틸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집 벽이 TV 하나 못 버티면 집이 아니지."

현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벽 앞에 섰다. 기존 홈시어터 화면은 벽 중앙에 매립돼 있었다. 85인치를 들이려면 양옆 선반을 옮기고 뒤쪽의 방음재와 전력선을 함께 손봐야 했다.

그가 벽에 손바닥을 대자 마력 건축구조학이 조용히 펼쳐졌다. 돌벽 안쪽의 골조와 전선이 투명한 선으로 드러났다.

"폭 220. 높이 130. 깊이는 그대로."

벽면이 안쪽으로 한 겹 접혔다가 옆으로 부드럽게 늘어났다. 선반은 부서지지 않은 채 좌우로 밀려났고 방음재는 새로 생긴 공간을 따라 빈틈없이 퍼졌다.

청소 골렘이 줄자를 들고 다가왔다.

"설치 공간 확보. 전원선 길이가 부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2호기에서 새로 빼."

"현재 출력 안정률 97퍼센트 기준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됐네."

현우는 벽면에 예상 화면을 띄웠다. 지금 화면도 쓸 만했지만 새로 그려진 사각형은 거실 한쪽을 거의 채웠다.

게임 속 보스의 발톱이 저만큼 커지면 타격 판정도 훨씬 잘 보일 것이다. 영화 속 어두운 장면도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일 필요 없이 가득 들어올 터였다.

귀찮음이 기대에 밀려났다.

서연희가 암호화된 계약서 초안을 보냈다.

[TV는 마수 부산물 교환으로 처리합니다. 외부 설치와 촬영은 하지 않습니다.]

현우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 거래 상대는 서연희가 관리하는 협회 물류 채널 하나로 제한돼 있었다. 반입 장소는 미궁의 정원 1층 개찰구 택배함이고 물품 검수는 차폐 구역 안에서 끝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가 먼저 물었다.

[대가는 뭘로 하죠?]

잠시 뒤 서연희의 설명이 도착했다.

[85인치 제품은 일반 가전 교환으로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상태 좋은 S급 마수 가죽 한 장이면 됩니다. 추가 물류비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현우는 창고 안쪽을 바라봤다.

지하 3층 창고에는 그동안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이 종류별로 정리돼 있었다. 팔아도 되는 것과 집에서 써야 하는 것과 아직 용도를 찾지 못한 것이 선반마다 나뉘어 있었다.

S급 마수 가죽도 있었다. 오래전 혼자 사냥한 검은 마수의 가죽이었다. 마력은 대부분 빠졌지만 물을 튕겨 냈고 칼날이 스쳐도 쉽게 흠집이 나지 않았다.

[가죽 상태 확인이 먼저입니다. 사진과 영상 촬영은 안 됩니다.]

[개찰구 택배함의 비접촉 감정 장치만 사용하겠습니다. 결과는 수치로 전달하겠습니다.]

[좋아요. 거래는 단독으로요. 다른 가전 영업은 받지 않습니다.]

[그 조항을 계약서에 넣겠습니다.]

서연희는 곧바로 수정본을 보냈다. 현우의 이름과 던전 내부 위치를 공개하지 않을 것. 수령을 위해 대면을 요구하지 않을 것. 허가받지 않은 연락과 방문은 거래 위반으로 처리할 것.

현우는 마지막 페이지에 손가락을 대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비대면 단독 거래 승인]

청소 골렘이 문구를 확인했다.

"계약 유효. 추가 방문 요청은 차단 대상으로 등록합니까?"

"응. TV 말고 사람 보내면 반송해."

"서연희 매니저도 포함합니까?"

"연희 씨는 물류 표식이 있잖아."

현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집 안까지는 오지 말라고 해."


창고의 보관함이 열리자 검은 가죽이 바닥 위로 떠올랐다. 펼치면 성인 두 명이 덮일 만큼 넓었다.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붉은 선이 남아 있었다.

청소 골렘이 마력 측정기를 가져왔다.

"잔류 공격성 마력 12퍼센트. 택배함 차폐막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낮추면 되지."

현우는 가죽을 바닥에 펼쳤다. 표면에 손을 대자 죽은 마수의 부산물이 주인을 찾듯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네 귀퉁이에 수정 못을 박았다. 공간이 고정되면서 가죽은 팽팽하게 펴졌다. 이어 얇은 절연선을 격자처럼 올렸다.

"마력은 빼내되 가죽 결은 건드리지 마."

"정화 속도를 높이면 품질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천천히 해. TV가 내일 와도 상관없으니까."

절연선이 연결되자 가죽에 남은 붉은 빛이 실처럼 빠져나왔다. 빛은 수정통 안에서 소용돌이치다가 공격성을 잃고 어두운 보랏빛으로 가라앉았다.

현우가 쓰던 공간 재편 기술은 벽과 배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죽을 접어도 표면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 공간 자체를 보관 틀로 만들었다.

그때 통신 수정구가 울렸다.

[오늘 외부 검수 인원은 두 명입니다. 협회 물류 담당자와 감정사입니다. 둘 다 차폐선 밖에서 대기합니다.]

현우는 바로 답했다.

[차폐선 안으로 들어오면 거래 취소입니다.]

[전달하겠습니다. 대면하지 않는 조건을 최우선으로 두겠습니다.]

서연희의 대답은 짧았다. 현우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과의 거래는 피곤하지 않았다.

마력 측정기가 낮은 소리를 냈다.

[잔류 공격성 마력 2퍼센트]

현우는 가죽을 보관 틀 안으로 접어 넣었다. 일반적인 접기라면 두꺼운 재료가 갈라질 수 있었지만 접힌 공간 안에서는 표면이 새것처럼 매끈했다.

"포장 완료."

"아직 외부 이동이 필요합니다."

청소 골렘의 말에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현관에서 개찰구까지는 집 밖이 아니야."

그가 공간문을 열자 15층 거실 바닥과 1층 개찰구의 차폐 구역이 겹쳐졌다. 현우는 가죽을 든 채 문을 통과했다.

개찰구 바깥에는 검수 인원 두 명이 서 있었다. 모두 차폐선 밖이었고 장비도 작은 상자 하나뿐이었다. 카메라나 드론은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시선이 닿기도 전에 가죽을 택배함 안쪽에 내려놓았다.

푸른 빛이 검은 가죽을 훑었다.

[물품 분류: S급 마수 가죽]

[계약 표식 확인]

[비접촉 검수 대기]

차폐선 밖의 감정사가 장비를 작동했다. 빛이 택배함 벽을 통과해 가죽의 마력 결을 읽었다.

통신 수정구에서 서연희의 목소리가 흘렀다.

[품질 등급 S급 상위. 계약 대가로 승인됐습니다.]

[그럼 TV 보내 주세요.]

[이미 이동 중입니다. 오늘 저녁 도착 예정입니다.]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공간문을 닫았다. 택배함 소리와 외부 사람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끊겼다.


저녁이 되자 개찰구 택배함의 도착 알림이 15층까지 올라왔다. 이번에는 송곳니토끼 세 마리가 먼저 현관으로 달려갔다.

청소 골렘이 상자의 표식을 확인했다.

"계약 물품. 85인치 OLED TV. 포장 폭 210센티미터."

"크네."

현우는 상자를 일반 통로로 옮기는 일을 잠깐 상상했다. 14층 환기 통로의 굴곡을 통과하기 어려웠고 벽면을 다시 넓힐 생각은 없었다.

그는 상자 주변을 네모나게 접었다. 길이만 줄어든 상자가 가볍게 떠올랐다. 거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상자는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무게는?"

"포장 포함 68킬로그램입니다."

"그 정도면 들 수 있지."

현우가 손을 들자 상자가 거실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골렘이 포장을 벗기는 동안 그는 벽면 전원선을 새로 연결했다.

화면을 고정할 브래킷은 벽 안쪽 수정 골조에 맞춰 접혔다. 전용 전원선은 변환기 2호기의 안정된 출력을 받아 흔들림 없이 빛났다.

마지막 나사가 조여졌다.

[설치가 끝났나요?]

서연희의 메시지였다.

[지금 켭니다.]

[화면이 커서 눈이 아플 수 있으니 밝기는 낮춰 두세요.]

[그럴 리가요.]

현우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거실 한쪽 벽이 검은 화면으로 변했다. 이어 게임 시작 화면이 펼쳐졌고 작은 몬스터의 눈동자가 이전보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면에서 번진 빛은 방음재에 부드럽게 흡수됐다.

현우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화면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몸을 뒤로 기대기만 해도 게임 속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좋네."

송곳니토끼들이 화면을 향해 귀를 세웠다. 청소 골렘은 밝기와 전력 수치를 확인했다.

"변환기 2호기 출력 안정률 97퍼센트. 영상 출력 이상 없음."

"오늘 거래는 성공이다."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올라왔다.

쿵.

현우의 시선이 화면에서 내려갔다. 마력 전력 변환기 패널 한쪽에 새로운 경고가 떠 있었다.

[16층 하부 열성 마력 반응 감지]

쿵. 쿵.

세 번의 진동 뒤 바닥 틈에서 뜨거운 바람이 스쳤다. 기존 수맥의 냉기와는 정반대였다. 송곳니토끼들은 현관 쪽으로 몰려갔고 청소 골렘의 측정기에는 작은 붉은 점들이 여러 개 찍혔다.

"16층에 뭐가 있지?"

"다수의 소형 열원. 이동 중입니다."

현우는 새 TV를 바라봤다. 화면 속 보스는 막 등장했고 게임을 멈추면 시작 보상을 놓칠 수도 있었다.

바닥 아래의 소란이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현우는 리모컨을 들어 밝기를 한 단계 낮췄다.

"오늘은 TV부터 써. 내일 내려가서 조용히 시키자."

거실에는 커다란 화면의 빛이 가득 찼다. 그 아래 16층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벽을 긁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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