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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4화

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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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서툰 보호자

오후 네 시의 은솔동 골목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한서윤은 유나의 손을 잡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었다. 유치원에서 받아 온 가방에는 색칠 놀이 종이가 가지런히 접혀 들어가 있었다. 유나는 담장 아래 핀 노란 민들레를 볼 때마다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 이건 공룡풀 색깔이야."

"노란색이라서?"

"응. 노랑 모둠이니까 노란 꽃 보면 인사해야 해."

유나는 진지한 얼굴로 민들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걸음에는 어제보다 한결 여유가 묻어났다. 유치원 첫날 아침 현관 앞에서 불안해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옅어져 있었다.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가 아이의 세상을 빠르게 넓히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낡은 나무 간판이 보였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주황색 조명이 흘러나오는 독립 책방 '페이지 사이'였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종이와 말린 국화 향이 섞인 공기가 서윤의 코끝을 스쳤다.

"어머, 유나 왔네."

카운터 안쪽에서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배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지혜는 쓰고 있던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모, 나 유치원에서 노랑 모둠 됐어요."

유나가 먼저 카운터 앞으로 달려가 가슴에 붙인 명찰을 보여 주었다. 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진짜? 노랑 모둠이면 엄청 중요한 모둠인데. 무슨 일 맡았어?"

"공룡풀 물 주는 거랑 그림책 상자 정리요."

"대단하다. 그럼 유나가 새싹반 대장이네."

유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책방 한쪽에 놓인 어린이용 낮은 의자로 가 앉았다. 의자 옆 바구니에 담긴 그림책들을 능숙하게 뒤적이는 품이 벌써 이곳을 제 공간처럼 편안해하고 있었다.

지혜는 서윤에게 따뜻한 옥수수차 한 잔을 내밀었다.

"얼굴 보니까 오늘도 잠 못 잤지? 출판사 마감에 이사 정리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

서윤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은은한 온기가 손끝을 녹였다.

"그래도 유나가 유치원에 잘 적응해서 한시름 놨어요. 생각보다 친구도 금방 사귀고요."

"그것 봐. 애들은 어른 생각보다 단단하다니까. 서윤이 너만 네 몸 챙기면 돼.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 거야?"

"대충 챙겨 먹죠. 오늘은 장 봐서 달걀말이라도 해 주려고요."

지혜는 서윤의 어깨를 툭 쳤다.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힘들면 유나 잠깐 여기 맡겨도 된다고 했잖아."

"언니도 바쁘잖아요."

"동네 살이가 뭐 별거야? 서로 기댈 언덕 되려고 이사 온 거 아니었어?"

지혜의 말은 늘 직설적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끈끈한 다정함이 있었다. 서윤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나무 유치원에서 도현을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서윤은 조용히 차만 한 모금 더 마셨다.


책방을 나와 동네 어귀의 작은 마트로 향했다.

은솔 마트는 채소 바구니가 가게 밖까지 나와 있는 전형적인 동네 슈퍼였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주민들로 좁은 통로가 제법 북적였다.

서윤은 장바구니를 들고 채소 매대 앞에 섰다. 당근과 시금치를 고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재야, 그건 매운 고추장이라 안 돼. 안 매운 간장 양념으로 사자."

"엄마는 고추장도 조금 먹어도 된다고 했어."

"그건 작년에 네가 안 매워할 때 얘기고. 지난주에 떡볶이 먹고 배 아팠잖아."

서윤은 손에 쥐고 있던 당근을 내려놓고 천천히 돌아섰다.

통로 반대편 조미료 코너에 강도현이 서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그는 한 손에는 휴대폰 메모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양념장 성분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밑 바구니에는 즉석밥과 포장 국, 냉동 너겟 따위가 담겨 있었다.

그 곁에서 민재가 공룡 인형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샐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민재야!"

유나가 먼저 큰 소리로 외쳤다.

민재가 홱 돌아봤다. 안경 너머의 눈이 커지더니 반가운 빛이 돌았다.

"유나야."

도현도 고개를 들었다. 서윤과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들려 있던 양념병이 멈췄다. 도현은 서둘러 병을 선반에 올려놓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윤 씨."

"도현 씨도 장 보러 오셨어요?"

서윤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멋쩍은 듯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눈 밑이 퀭했고 셔츠 깃도 조금 구겨져 있었다.

"응. 저녁거리 좀 사려고."

도현이 자신의 바구니를 슬그머니 가렸다. 가공식품으로 찬 바구니가 멋쩍었던 모양이었다. 서윤은 모른 척하며 민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민재 안녕. 유치원 끝나고 삼촌이랑 장 보러 왔구나?"

"네. 오늘 저녁에 불고기 해 먹기로 했어요."

민재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러고는 도현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삼촌이 고기를 못 골라요."

도현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못 고르는 게 아니라 기름이 너무 많은 부위는 질길까 봐 살피는 중이었어."

서윤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흘릴 뻔했다. 도현은 무엇이든 설명서대로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이 입맛에 맞는 고기를 두고 슈퍼 통로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묘했다.

"아이들 불고기감은 앞다리살 얇게 썬 거나 우둔살이 덜 기름지고 부드러워요. 정육 코너에 아이 먹을 거라고 얇게 썰어 달라고 하면 돼요."

서윤이 담담하게 조언을 건넸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고마워."

"달걀도 사 가실 거면 저쪽 냉장고 아래 칸에 유통기한 넉넉한 거 있어요."

도현은 서윤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바구니를 고쳐 잡았다. 유나와 민재는 그사이 과자 매대 앞으로 가 저마다 좋아하는 과자 상자를 가리키며 조잘거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는 평범한 이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조심스러운 거리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마트 밖으로 나오자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트 옆 공터에는 동네 주민들이 쉬어 가도록 마련된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산 어린이 음료수를 손에 쥐고 벤치 앞 공터에서 개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민재야, 개미도 공룡처럼 힘이 세?"

"개미는 자기 몸무게보다 쉰 배나 무거운 걸 들 수 있대."

두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속닥거리는 동안 서윤과 도현은 벤치 양 끝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서윤은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는 도현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솔동에는 언제까지 계시는 거예요?"

서윤이 먼저 침묵을 깼다. 도현은 캔 뚜껑을 따지 않은 채 손안에서 굴렸다.

"아마 꽤 오래 있을 것 같아. 우리 회사가 은솔동 일대 보행 안전 특화 거리 조성 사업을 맡았거든. 내가 프로젝트 총괄로 현장 관리를 맡아서 내려왔어. 두 달 전에."

"어린이 통학로 개선 사업 같은 거요?"

"응.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주변 위험 도로 재설계하고 보도블록이랑 가로등 동선 다시 짜는 일이야. 현장이 은솔동 주민센터 근처에 있어서 출퇴근하기 편하려고 이쪽에 방을 얻었지."

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수진 씨는요? 갑자기 외국으로 간 거예요?"

여동생 오수진의 이름을 꺼내자 도현의 표정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수진이가 다니는 엔지니어링 회사가 중동 플랜트 현장에 급하게 인력을 파견해야 했어. 원래 가기로 했던 선배가 다치는 바람에 대체 인력으로 수진이가 지목됐지. 거절하면 회사에서 입지가 곤란해지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민재를 맡은 거고요?"

"응. 수진이 시댁도 지방에 계시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다른 데 맡기느니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마침 내 현장도 이쪽이라 유치원 보내면서 통근하면 될 줄 알았는데."

도현은 말끝을 흐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아이 밥 챙기고 옷 입히고 밤마다 엄마 찾는 애 달래는 게 도면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더라."

"도현 씨 성격에 오죽하겠어요. 모든 걸 완벽하게 챙겨 주려고 하니까 더 힘들죠."

서윤의 말에 도현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서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보여?"

"도현 씨는 늘 그랬으니까요. 일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랬고. 문제가 생기면 혼자 다 해결해 놓고 결과만 통보하듯 버텼잖아요."

서윤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없었다. 그저 지나온 사실을 담담히 서술하는 어조였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도현의 가슴을 더 깊게 찔렀다.

도현은 캔커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맞아. 그때는 그게 책임지는 건 줄 알았어. 힘들다는 말을 꺼내면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말을 아꼈는데 결국 그게 너를 더 외롭게 만들었지."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날카로운 모서리를 품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서리를 마주 보고도 다투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에요. 나도 도현 씨가 힘든 걸 알면서 먼저 묻지 않고 문을 닫았으니까요. 알아서 이해해 주겠지 하고 기대하다가 혼자 실망하고."

도현은 서윤을 응시했다. 석양빛이 서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민재한테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중이야. 그런데도 민재가 가끔 저렇게 엄격하게 굴 때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덜컥 겁이 나."

"민재는 불안해서 그러는 거예요."

서윤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엄마가 멀리 가 있고 낯선 삼촌이랑 낯선 동네에 살게 됐잖아요. 자기가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이 생활마저 무너질까 봐 더 또박또박 굴고 고집을 부리는 거죠. 유나도 이사 오고 나서 한동안 그랬어요."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조카의 마음을 서윤의 말을 통해 비로소 들여다본 듯했다.

"그랬구나. 나는 그냥 민재 성격이 깐깐해서 그런 줄만 알았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예민하게 공기를 읽어요. 그러니까 도현 씨도 너무 완벽한 보호자가 되려고 애쓰지 마요. 어른이 숨이 차면 아이도 숨이 막히니까요."

서윤의 조언은 따뜻하면서도 명확한 경계를 품고 있었다. 전남편을 향한 간섭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동료 학부모로서 건네는 담백한 격려였다.

도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마워, 서윤아. 정말로."

그 짧은 감사 속에는 오랜 시간 전하지 못했던 진심이 조용히 녹아 있었다.


골목 갈림길에 다다르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민재야, 내일 유치원 갈 때 공룡 카드 가져와. 내가 토끼 스티커 보여 줄게."

"응. 내일은 물조리개 같이 잡는 거 잊지 마."

"알았어. 내일 봐!"

유나가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도현은 장바구니를 든 채 서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들어가."

"네. 도현 씨도 저녁 맛있게 드세요."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골목 가로등이 켜지며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서윤은 유나의 손을 씻기고 작은 식탁에 저녁을 차려냈다. 따뜻한 밥과 된장국, 노릇하게 부쳐낸 달걀말이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유나는 달걀말이 한 조각을 숟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달걀말이가 제일 맛있어."

"많이 먹어. 우리 유나 오늘 하루 종일 씩씩하게 잘 놀았으니까."

서윤이 유나의 밥 위에 시금치나물을 얹어 주었다. 유나는 오물거리며 밥을 씹다가 턱을 괴고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

"응?"

"민재 삼촌은 민재 아빠가 아니지?"

서윤은 숟가락을 멈칫했다.

"응. 민재 외삼촌이야. 민재 엄마의 오빠."

"그렇구나. 민재가 삼촌 손을 엄청 꽉 잡고 다니길래."

유나는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맑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 마트에서 엄마랑 아빠가 화 안 내서 좋았어."

서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담담한 문장은 어떤 꾸짖음보다 서윤의 가슴을 아프게 울렸다. 어른들은 헤어지고 나서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지만 일곱 살 아이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부모가 마주쳤을 때 다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은 떨리는 손을 숨기며 유나의 부드러운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엄마랑 아빠는 화낼 일 없어. 유나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짜지? 그럼 내일도 안 싸울 거지?"

"그럼. 절대로 안 싸워."

유나는 그제야 안심한 듯 배시시 웃으며 남은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는 서윤의 마음속에 무겁고도 따뜻한 파도가 밀려들었다. 은솔동이라는 생활권 안에서 앞으로 많은 마주침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아이에게 불안을 건네지 않는 어른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만은 더없이 분명해졌다.

그날 밤 서윤은 잠든 유나의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 주며 창밖의 은솔동 밤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서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려는 어른들의 저녁이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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