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3화: 놀이터까지
한서윤은 유나의 물병 뚜껑을 두 번 확인했다.
분홍색 물병 안에는 보리차가 반쯤 들어 있었다. 작은 수건과 여분 양말도 가방 안쪽에 넣었다. 놀이터에 가는 시간은 십오 분뿐이었지만 유나는 아침부터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오늘 민재랑 바로 가는 거지?"
유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한쪽이 삐죽 솟아 있었다. 서윤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눌렀다.
"공룡풀에 물을 주고 나서.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민재가 늦으면 기다려 줘야 해?"
"응. 약속한 친구니까."
유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엄마도 아빠를 기다려 줘?"
서윤의 손가락이 유나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아이에게는 같은 문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두 가지 기다림이었다. 친구를 기다리는 일과 아빠를 기다리는 일. 어른의 기다림에는 날짜와 시간과 지키지 못한 약속이 따라붙었다.
"오늘은 민재를 기다리는 날이야. 어른들은 시간을 미리 맞춰 두는 거고."
서윤은 유나의 머리카락을 다시 눌렀다.
"그러니까 유나는 친구랑 놀 시간만 생각해."
유나는 안심한 듯 운동화 끈을 당겼다.
"십오 분이면 미끄럼틀 두 번 탈 수 있어?"
"사람이 없고 안전하면 두 번."
서윤은 오전 원고 수정 메일을 점심 뒤로 미뤄 두었다. 미룬 일은 다시 돌아오겠지만 유나의 첫 약속은 오늘 한 번뿐일 수도 있었다.
햇살나무 유치원에 도착하자 현관 앞에는 아직 보호자가 많지 않았다. 서윤은 유나의 손을 잡고 담장 옆에서 잠시 멈췄다. 창문 안으로 노랑 모둠 명찰 두 개가 보였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도착했습니다. 민재가 교실에서 물 주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요.
강도현 - 민재 보호자.
서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답장을 보냈다.
저희도 도착했어요. 하원 후 아이들 먼저 확인하고 움직일게요.
유나는 현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엄마는 열두 시에 여기로 와. 늦으면 안 돼."
"안 늦을게."
유나가 교실 쪽으로 달려가자 서윤은 아이의 토끼 가방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돌렸다.
새싹반 교실 안에서는 작은 물조리개 하나가 두 아이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내가 먼저 물을 줄 거야."
민재가 손잡이를 잡았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만큼 힘을 준 모습이었다.
유나는 화분 옆의 흙을 살폈다.
"어제도 민재가 물 줬어?"
"아니. 오늘은 내가 공룡풀을 찾아야 하니까."
"공룡풀은 여기 있잖아."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물을 잘못 주면 공룡풀이 아플 수도 있어."
교사는 가까이 왔지만 바로 손을 뻗지는 않았다.
"노랑 모둠은 순서를 정해도 되고 같이 들어도 돼. 공룡풀이 원하는 건 필요한 만큼의 물이야."
민재가 유나를 바라봤다.
"같이 들면 네가 너무 많이 줄 수도 있어."
유나는 물조리개 손잡이 아래에 손을 넣었다.
"그럼 민재가 기울이고 내가 밑을 잡을게. 물이 많으면 내가 말할게."
민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유나는 재촉하지 않고 손을 그대로 두었다.
"공룡풀은 조금만 먹는다고 했잖아."
"내가 알아."
"그러면 알려 줘."
민재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는 화분 쪽으로 몸을 돌렸고 유나는 옆에서 아래를 받쳤다.
처음 물줄기는 가늘었다. 두 아이가 동시에 흙이 젖는 모습을 지켜봤다. 물이 한쪽으로 쏠리자 유나가 말했다.
"잠깐만. 여기 말고 옆에도 줘야 해."
민재가 손목을 돌렸다. 그 순간 물조리개가 기울어졌고 남은 물의 절반이 화분 밖으로 쏟아졌다.
바닥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망쳤어."
"뭘?"
"약속. 공룡풀을 잘 돌보기로 했는데 물이 바닥에 다 나왔어."
민재는 물조리개를 내려놓고 한 발 물러났다. 교사가 수건을 가져오려 했지만 유나가 먼저 마른 걸레를 집었다.
"다 나온 건 아니야. 흙도 젖었고."
"그래도 바닥이 젖었잖아."
"그럼 닦으면 돼."
유나는 걸레를 민재에게 내밀었다. 민재가 받지 않자 걸레의 한쪽 끝을 잡았다.
"같이 잡아도 돼."
민재가 손을 뻗었다. 두 아이가 걸레를 양쪽에서 잡고 물웅덩이를 밀었다. 물기는 금세 사라지지 않았지만 회색 얼룩은 조금씩 옅어졌다.
교사가 말했다.
"약속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게 아니야. 실수한 다음에 같이 돌보는 것도 약속을 지키는 일이야."
민재는 걸레를 내려다봤다.
"그럼 공룡풀 안 아파?"
"오늘은 더 주지 않으면 돼."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내가 물조리개를 똑바로 잡을게."
"내일은 내가 밑을 잡을래."
두 아이는 나란히 그림책 상자 앞으로 갔다. 민재가 책등을 맞춰 세우면 유나가 빈칸을 찾아 책을 밀어 넣었다. 공룡이 나오는 책을 두고 손이 겹쳤지만 이번에는 둘 다 먼저 놓지 않았다.
"이건 공룡풀이 읽을 책이야."
"공룡은 글자 못 읽어."
"민재가 읽어 주면 되지."
민재는 책을 상자 안쪽에 넣었다.
"그럼 다음에 읽어 줄게."
교실 밖에서 하원 준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유나는 현관으로 나오자마자 서윤을 찾았다. 민재도 한쪽 손에 노랑 모둠 명찰을 쥔 채 도현에게 달려갔다.
"엄마, 공룡풀에 물 줬어. 조금 쏟았는데 닦았어."
"민재가 물을 잘못 줬어. 유나가 같이 닦아 줬어."
민재가 먼저 말했다. 유나의 양말 끝에는 물이 조금 튀어 있었고 민재의 안경 한쪽에는 물방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둘이 다시 돌봤구나. 잘했어."
도현은 민재의 안경을 닦아 주며 물었다.
"많이 쏟았어?"
"절반. 그런데 공룡풀은 안 아파."
"그럼 다행이네."
도현은 더 묻지 않고 손수건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유나는 현관문 밖을 가리켰다.
"이제 놀이터 가도 돼?"
서윤은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가 조금 넘었다. 도현도 같은 시계를 확인했다.
"십오 분만이야. 열두 시 십오 분에는 돌아와야 해."
서윤이 먼저 말했다.
"응."
도현은 민재의 가방을 들려 하지 않고 아이 옆에 섰다. 두 아이는 현관 계단을 먼저 내려갔다가 뒤를 돌아봤다.
"같이 와요."
유나가 말했다.
서윤과 도현은 동시에 한 걸음 내디뎠다가 서로의 움직임을 보고 멈췄다. 누가 먼저 앞설지 정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민재가 계단 아래에서 소리쳤다.
"유나가 빨리 오면 안 돼. 바닥에 물 있어."
두 아이는 작은 웅덩이를 피해 보폭을 맞췄다. 서윤과 도현도 한 줄 뒤에 섰다.
"놀이터 바닥이 젖었을 수 있어."
도현이 낮게 말했다.
"아이들이 모래밭에 들어가면 옷이 더러워질 거예요."
"미끄럼틀 쪽부터 보자."
"안전하면요."
"응."
대화는 그뿐이었다. 오늘 도현은 아이들이 멈추는 곳마다 함께 멈췄다. 먼저 갈 곳을 정하지도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작은 놀이터가 보였다. 전날 내린 비가 모래밭 곳곳에 진한 얼룩을 남겼고 미끄럼틀 계단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네 한쪽에도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유나가 미끄럼틀을 올려다봤다.
"두 번 탈 수 있어?"
"한 번 타고 상태를 보자."
서윤이 말했다. 민재는 놀이터 한쪽의 낮은 나무 울타리를 가리켰다.
"저기는 공룡 구조대 할 수 있어."
민재는 가방에서 작은 공룡 그림 카드 몇 장을 꺼냈다. 카드마다 색연필로 그린 공룡이 있었다.
"이걸 숨겨 놓고 찾는 거야."
"그럼 내가 구조대장 할래."
"나는 지도 담당."
두 아이가 울타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윤은 놀이터 입구에 서고 도현은 젖은 바닥과 계단을 확인했다.
유나가 카드 한 장을 낮은 돌 옆에 놓았다. 민재가 다른 카드를 들고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민재야. 너무 안쪽으로 가지 마."
도현이 말했다.
"여기까지만 갈 거야."
그 순간 민재의 손에 있던 카드가 바람에 날아갔다. 카드는 젖은 모래밭 쪽으로 미끄러지다 낮은 철제 난간 아래에 걸렸다.
민재가 곧바로 달려갔다.
"잠깐!"
유나가 민재의 소매를 잡았다.
"거기는 물 있어."
"카드가 젖으면 안 돼."
민재가 소매를 뿌리쳤다. 유나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가지 말랬잖아."
"네가 내 카드 가져가려는 거잖아."
민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윤은 유나에게 다가갔고 도현은 난간 쪽을 살폈다.
"민재야. 카드는 저기 있는데 발이 들어가면 신발이 젖어."
도현이 말했다.
"내가 꺼낼 거야."
민재가 한 발을 내밀자 서윤은 아이의 앞을 막지 않고 옆으로 몸을 낮췄다.
"카드가 꼭 지금 필요해?"
"응. 내가 지도 담당이라서."
"맡은 일을 끝내고 싶어서 속상한 거구나."
민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현이 난간 아래를 보더니 입구 쪽의 긴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저걸로 끌어오면 발을 안 넣어도 돼."
민재가 나뭇가지를 집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유나가 먼저 달려가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내가 잡아 줄게."
민재가 유나를 보았다.
"내 카드 안 가져가?"
"안 가져가. 민재가 끌어와."
유나는 나뭇가지 한쪽을 들고 난간 밖에 섰다. 도현은 젖은 쪽으로 더 다가가지 않도록 발끝으로 경계를 그었다.
"여기까지만. 더 가면 내가 받을게."
민재가 나뭇가지 끝을 카드 옆으로 밀었다. 카드는 한 번 밀렸다가 다시 멈췄다.
"조금만 왼쪽."
유나가 말했다.
"내가 알아."
민재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숨을 고른 뒤 나뭇가지를 다시 움직였다.
카드가 난간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현이 손을 뻗어 카드를 주웠다. 모서리 한쪽이 젖었지만 그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민재는 카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나가 안 가게 해 줬어."
서윤이 말했다.
"응. 미안해. 네가 카드 가져간다고 말해서."
민재가 고개를 숙였다.
유나도 잠시 입술을 내밀었다.
"나도 미안해. 민재가 찾게 두지 않고 먼저 잡았어."
민재는 젖은 카드 모서리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구조대장은 위험한 데 가면 안 돼."
"지도 담당도 혼자 가면 안 돼."
"그럼 같이 가야 해?"
"응."
유나가 손을 내밀었다.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서윤은 두 아이를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이들이 싸우지 않게 하는 일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싸움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다시 손을 내밀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도현이 시계를 확인했다.
"십오 분 거의 됐어. 이제 돌아가야 해."
유나가 아쉬운 얼굴로 미끄럼틀을 보았다.
"한 번도 못 탔어."
"오늘은 카드 구조했잖아."
민재가 말했다.
"그건 놀이였고 미끄럼틀도 놀이야."
유나의 진지한 반박에 서윤은 웃음이 날 뻔했다.
"다음에 미끄럼틀 타자. 오늘은 약속한 시간까지 놀았어."
유나는 입술을 내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십오 분 말고 이십 분이면 안 돼?"
서윤은 도현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다음 시간은 엄마들이 다시 확인해야 해."
도현이 곧바로 덧붙였다.
"민재 일정부터 보고 가능한 날을 말할게. 서윤 씨가 괜찮은 날인지 먼저 물어볼게."
서윤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 도현은 결정을 내린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답을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유나와 민재는 손을 잡은 채 유치원 쪽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두 어른이 아이들보다 앞서지 않았다. 아이들이 멈추면 같이 멈췄고 물웅덩이를 돌아가면 그 뒤를 따랐다.
유나가 민재에게 물었다.
"내일 공룡풀 물 주는 건 누가 먼저 할 거야?"
민재가 젖은 카드 모서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내일은 같이 잡고 해."
"약속?"
"약속."
두 아이의 목소리가 작은 골목 안에서 겹쳤다. 서윤은 그 약속이 또 다른 시간을 데려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그 시간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