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선언하자 에러가 발생했다

2화: 디버터의 눈
[상태 정보 열람 가능]
카일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푸른 글자가 한 번 더 깜박였다.
에밀리아는 손을 뻗지 못한 채 그 문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멈춰 있었고 보이지 않던 균열이 서재 벽과 천장을 기어 다녔다. 눈앞의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이 글자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카일의 손에는 구겨진 이혼 청구서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가락도 찢어진 종이의 모서리도 얼음 조각처럼 멈춰 있었다.
에밀리아는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열람.”
낯선 단어가 입술을 떠나는 순간 푸른 글자가 풀렸다. 잔글자가 실처럼 늘어나더니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개체명: 카일 로젠버그]
[분류: 주요 인물]
[관계: 배우자]
[에밀리아 호감도: -63]
[에밀리아 소유 인식: 고정]
[행동 가중치: 통제 82 / 압박 76 / 배려 3]
[외부 수정 이력: 잠김]
에밀리아는 첫 줄부터 천천히 읽었다.
개체명. 분류. 행동 가중치.
사람의 이름 옆에 붙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말들이었다. 카일이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보이던 오만한 눈빛이 숫자와 문구로 정리되어 있는 듯했다.
호감도는 마이너스였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아래의 소유 인식은 고정되어 있었다.
싫어하면서 제 것이라고 여긴다.
에밀리아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굳었다.
카일은 늘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바꿨다. 약속을 취소했고 편지를 읽었으며 누구를 만나도 되는지 정했다. 그러면서도 에밀리아가 공작부인의 요구를 거절하면 배신당한 사람처럼 분노했다.
‘내 아내니까.’
그 말은 한 번도 애정이 아니었다. 잠긴 문에 채우는 자물쇠의 이름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장 오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행동 가중치였다.
통제 82. 압박 76. 배려 3.
이 숫자가 카일의 손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붙든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욕과 냉대가 처음부터 누군가의 계산으로 정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밀리아는 그 생각을 곧바로 밀어냈다.
무언가가 카일을 밀어붙였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무고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번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비웃었다. 공작부인이 유품을 빼앗으라 말했을 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들은 카일의 것이었다.
에밀리아는 마지막 줄을 눌렀다.
[외부 수정 이력: 잠김]
글자가 붉게 물들었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경고: 안정성 저하 구간에서 잠긴 정보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에밀리아는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 아래에서 목재가 낮게 울렸다. 바닥을 가르던 붉은 금이 조금 더 굵어졌다. 움직이지 않던 벽난로의 불꽃마저 검게 흔들렸다.
[핵심 시나리오 무결성 저하 지속]
[추가 접근은 주변 레이어 오류를 확대할 수 있습니다.]
‘레이어.’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집 전체가 멈춰 선 것과 관련 있다는 감각은 들었다. 그녀가 방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했을 때 균열은 분명히 넓어졌다.
에밀리아는 손을 떼었다.
통증은 물러났지만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글자들은 문을 열어 주는 대신 문턱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가 카일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푸른 창이 조용히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관찰 대상 변경: 가능]
에밀리아는 망설이다가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순간 시야가 물속처럼 일렁였다. 카일의 이름이 있던 자리에 검은 머리칼과 보랏빛 눈을 닮은 희미한 윤곽이 나타났다.
[개체명: 에밀리아 로젠버그]
[분류: 메인 NPC]
[상태: 이탈 의사 활성]
[복종 반응: 저하]
[권한: 디버그 관찰자]
에밀리아의 손이 펜던트 위에서 멎었다.
다시 메인 NPC라는 문구였다. 자신을 사람의 이름이 아닌 어떤 역할로 부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NPC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그녀의 삶을 설명해 줄 리 없었다.
그녀는 ‘복종 반응’을 눌렀다.
[복종 반응]
[카일 로젠버그의 명령에 대한 거부 지연: 4.2초]
[공작부인의 질책에 대한 자기 검열: 활성]
[위협 상황에서의 반박 문장 생성: 제한]
[권장값: 정상화]
글자들이 한 줄씩 눈에 박혔다.
카일이 명령할 때마다 심장이 먼저 움츠러들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분명 머릿속에는 거절할 말이 있었는데 입을 열기까지 이상할 정도로 오래 걸렸다. 그사이 카일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고 그녀는 결국 사과를 택하곤 했다.
그것이 겁 많은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는 뜻일까.
에밀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순종해야 하는 반응을 넣어 두었다는 해석은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글자는 그녀가 겪어 온 순간들을 너무 정확하게 짚었다.
‘위협 상황에서의 반박 문장 생성 제한.’
그녀는 방금 카일에게 처음으로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혼하겠다고 말했다. 그 뒤 세상이 멈추고 이 창이 나타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기묘한 순서였다.
에밀리아가 권장값을 눌렀다.
[권장 조치: 복종 반응을 정상 범위로 복구하십시오.]
[예상 결과: 시나리오 안정성 일부 회복]
[승인 / 거절]
승인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것을 누르면 붉은 균열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카일은 서류를 찢을 것이며 공작부인은 내일 아침 또다시 펜던트를 내놓으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에밀리아는 그 모든 일에 익숙했던 사람처럼 고개를 숙일지 모른다.
그 대가는 너무 분명했다.
에밀리아는 거절을 눌렀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요.”
[응답 기록됨.]
[이탈 의사 활성 상태가 유지됩니다.]
[권한 등급 확인 중…]
마지막 줄은 끝까지 나타나지 못했다. 창 전체가 마치 젖은 종이처럼 구겨졌다.
천장의 붉은 금이 번쩍였다. 서재의 공기가 아래로 꺼지는 듯한 압박이 밀려왔다. 에밀리아는 벽에 손을 짚고 버텼다.
무언가를 더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그녀가 그렇게 판단한 순간, 멈춰 있던 불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짧은 소리와 함께 시간이 돌아왔다.
카일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멈춰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얼굴로 이혼 청구서를 찢으려 했다. 종이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에밀리아는 즉시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놓아.”
카일의 푸른 눈이 그녀를 향했다. 방금 전까지 굳어 있던 손목은 따뜻했고 맥박은 거칠었다. 모든 것이 다시 현실의 감각으로 돌아왔다.
“그 서류는 제 것입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허락이 아니라 절차가 필요합니다.”
카일이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법을 입에 올려?”
“공작부인이라고 법 바깥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에밀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종이를 끌어당겼다. 구겨진 서류는 카일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찢긴 곳은 없었다. 그녀는 서명란과 청구 사유가 적힌 첫 장을 확인한 뒤 품 안쪽에 깊이 넣었다.
카일이 한 발 다가왔다.
“누가 네게 이런 말을 가르쳤지?”
에밀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제가 제게 가르쳤습니다.”
“웃기지 마. 넌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어.”
그 말은 예전의 그녀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카일의 손이 다시 들릴 때면 다음 고통을 피할 방법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에밀리아는 방금 눈앞에 떠 있던 문구를 기억했다.
거부 지연 4.2초.
그 숫자가 그녀의 공포를 없애 주지는 않았다. 카일의 손이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두려움이 그녀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결정하겠습니다.”
카일의 손끝이 그녀의 뺨 앞에서 멈췄다. 그가 때리지 않은 것은 자비가 아니었다. 갑자기 낯설어진 에밀리아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손을 거칠게 내렸다.
“베른!”
잠시 후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베른은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방 안에 감도는 긴장을 알아챘지만 묻지 않았다.
“내일 아침 소식당에 나오라고 해.”
카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단했다.
“어머니 앞에서 제대로 사과시킬 테니.”
베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에밀리아는 곧바로 말했다.
“저는 참석하겠습니다.”
카일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과하겠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그녀는 베른을 향해 돌아섰다.
“제 어머니의 유품을 지키겠다고 한 일에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그 뜻을 공작부인께도 전해 주십시오.”
집사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베른은 대답하지 못한 채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감히 내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하겠다는 건가.”
“제가 할 말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에밀리아는 문을 열었다. 복도 끝 창문에 빗물이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멈춰 있던 분수와 하녀들의 발소리도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평범한 저택의 밤이었다.
하지만 에밀리아에게는 더 이상 평범한 집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글자가 카일의 생각과 그녀의 망설임에 이름을 붙였다. 그 글자가 진실인지 누가 만든 규칙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그 규칙은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편을 원한다.
등 뒤에서 카일이 차갑게 말했다.
“에밀리아. 네가 이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을 거다.”
에밀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말씀도 내일 들으십시오.”
문이 닫힌 뒤 그녀는 펜던트를 감싼 손을 천천히 폈다. 보랏빛 보석 위로 복도 조명이 흔들렸다.
그때 시야 한쪽에 푸른 글자가 아주 작게 떠올랐다.
[디버그 관찰자]
[관찰 기록 저장됨: 카일 로젠버그]
[다음 관찰 가능 시점: 미확정]
에밀리아는 그 문구를 놓치지 않았다.
관찰자.
아직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보아야 했다. 카일이 어떤 규칙으로 그녀를 옥죄는지 이 집의 사람들이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내일 소식당은 그 첫 번째 장소가 될 것이다.
에밀리아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