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선언하자 에러가 발생했다

1화: 이혼 서류와 붉은 에러
은제 수저가 접시 위에서 맑게 울렸다.
그 작은 소리 뒤로 소식당은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공작부인은 국물을 한 모금 삼킨 뒤 흰 장갑 낀 손으로 냅킨을 접었다. 시선은 맞은편의 에밀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목에 걸린 자줏빛 펜던트에 고정돼 있었다.
“그 목걸이. 아직도 하고 있었니?”
에밀리아는 반사적으로 펜던트를 감쌌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손에 쥐여 준 유일한 유품이었다.
“제 어머니의 것입니다.”
“알지. 그래서 더 거슬리는 거란다. 로젠버그의 안주인이라면 죽은 친정의 물건보다 가문의 문장을 달아야지.”
카일은 와인잔을 기울인 채 웃었다. 말릴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새 장신구를 맞춰 주지. 그 정도 물건에 매달릴 필요가 있나.”
그의 말은 호의가 아니라 처분 통지였다. 에밀리아가 싫다고 말하면 하녀가 밤사이 펜던트를 가져갈 것이다. 다음 날 카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그녀의 목에 공작가 문장이 박힌 목걸이를 걸어 줄 터였다.
지난 삼 년 동안 모든 일이 그랬다.
머리 장식 하나부터 외출할 시간, 친정에 보낼 편지의 문장까지. 카일은 에밀리아의 삶을 고를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에밀리아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보관하겠습니다.”
공작부인의 입가가 가늘게 비틀렸다. 카일은 귀찮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제 물건을 보관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중한 문장이었지만 식탁 위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카일이 잔을 내려놓았다.
“에밀리아.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좋지 않은 것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확신이었다.
더는 이 집에서 죽은 사람처럼 살 수 없다는 확신.
에밀리아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은 무릎 위에서 접힌 서류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변호사에게 몰래 받아 둔 이혼 청구서였다.
서명은 이미 끝나 있었다.
소식당을 나서자 집사 베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서 서재로 오시랍니다.”
에밀리아는 그 말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어디에도 숨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서재의 문이 닫히자 카일은 벽난로 앞에 기대 섰다. 불빛이 그의 금발을 번지르르하게 비췄다.
“어머니에게 사과해.”
“싫습니다.”
카일의 미소가 지워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 유품을 지키겠다고 한 일에 사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카일은 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이 에밀리아의 턱을 거칠게 붙들었다.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조차 그에게는 순종의 표시가 될 테니까.
“네가 이 집에서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잊었나 보군.”
에밀리아는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누린 적 없습니다.”
카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내 이름을 달고 내 집에 살면서?”
“제 이름을 빼앗기고 당신의 집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녀는 카일의 손목을 밀어 냈다. 전에는 감히 하지 못했던 동작이었다. 카일이 놀란 얼굴로 손을 내렸다.
에밀리아는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러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종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떨어졌다.
카일은 첫 장을 읽었다. 처음에는 비웃었다. 이내 이마의 핏줄이 불거졌다.
“이혼?”
“네.”
“허락하지 않겠다.”
“허락을 구한 적 없습니다.”
카일이 서류를 움켜쥐었다. 찢어 버리려는 손끝이 종이를 구겼다.
“네 친정은 이미 힘을 잃었다. 누가 네 편을 들지? 이 문을 나가면 네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이 예전 같았으면 그녀를 무너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목을 조르던 손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펜던트를 탐내던 시선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약속처럼 들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고르면 된다.
“그럼 아무것도 없이 나가겠습니다.”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널 방에 가둬 두면 그만이야.”
“그렇게 하십시오.”
에밀리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문이 잠겨도 제 의사까지 잠기지는 않으니까요.”
카일이 서류를 찢으려던 순간이었다.
세상이 멎었다.
벽난로에서 튄 불씨가 허공에 멈췄다. 장작이 타는 소리도 끊겼다. 창밖을 흔들던 나뭇가지와 유리창을 때리던 빗방울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의 손끝은 종이를 찢기 직전의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고요가 귓속을 짓눌렀다.
에밀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만이 이 방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눈앞에 붉은 빛이 번졌다.
[서버 접속 오류]
[메인 NPC의 이탈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핵심 시나리오 무결성 저하. 안정성 12% 감소.]
글자는 공중에 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것이 아니었다.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글자도 시야를 따라왔다.
“메인… NPC?”
낯선 음절이 입안에서 납작하게 굴렀다. 뜻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가리킨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그녀가 손을 뻗자 붉은 글자 아래로 희미한 줄이 더 나타났다.
[권장 조치: 이탈 의사 철회]
[실패 시 주변 레이어 오류가 확대됩니다.]
에밀리아는 서류와 카일을 번갈아 보았다. 누군가가 그녀의 선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집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렇다면 이혼을 막으려는 것도 카일 하나가 아닐지 몰랐다.
겁이 났다. 손바닥이 식었고 심장은 너무 크게 뛰었다.
그러나 붉은 창이 내민 권고문은 카일의 명령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돌아가라. 참아라. 네 몫은 여기까지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그 순간 붉은 창의 가장자리가 찢어진 듯 흔들렸다.
[응답값 오류]
[권한 확인 실패]
서재 바닥이 아주 작게 울렸다. 벽난로 위 초상화의 금박 틈으로 붉은 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멈춘 카일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에밀리아는 문을 열었다.
복도에도 사람이 멈춰 있었다. 은촛대를 든 하녀는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었고 촛농은 기울어진 채 떨어지지 않았다. 창문 밖 정원의 분수도 하얀 물줄기를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공작가 전체가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멈춘 것 같았다.
에밀리아는 하녀의 어깨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탈 의사 철회.’
붉은 글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이 세계가 정한 명령이었다.
에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보석의 감촉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은 이 작은 물건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그것마저 제 것이 아니라 말했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그녀가 이혼할 생각마저 거두라 했다.
그녀는 하녀의 손에 들린 촛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상한 현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포 때문에 다시 카일의 곁으로 돌아가면 그가 옳았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의지도 삶도 누군가의 허락 아래 놓여 있다는 뜻이 된다.
에밀리아는 서재로 돌아왔다.
에밀리아는 본능적으로 카일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고 있는 이혼 서류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지한 손가락 사이에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
서류를 빼앗아 올 수도 있었다. 카일의 손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에밀리아는 조심스럽게 종이의 모서리를 잡았다.
순간 손끝을 타고 얼음장 같은 통증이 번졌다. 붉은 창이 짧게 튀어 올랐다.
[고정 오브젝트에 대한 접근이 제한됩니다.]
[현재 권한: 확인 불가]
에밀리아는 이를 악물고 손을 뗐다. 허공에서 본 글자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멈춘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서류는 사라지지 않았다. 카일이 찢으려 했어도 그녀가 서명한 이름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머리 위로 가느다란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카일 로젠버그]
[에밀리아 소유 인식: 고정]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카일의 머리 위에 적어 놓은 저 한 줄이 그가 저질러 온 모든 일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에밀리아는 처음으로 알았다.
이 집의 문을 여는 열쇠가 카일의 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멈춘 세상 속에서 카일의 푸른 글자가 한 번 깜박였다.
[상태 정보 열람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