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4화: 삭제된 숲
“사흘이다.”
현우의 목소리가 성벽 위로 낮게 깔렸다.
바람이 검은 망토를 후려쳤다. 아래쪽 성문에서는 교대하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이어졌지만 성벽 위의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서쪽 숲에 박혀 있었다.
하얀 공백은 조금 전보다 넓어져 있었다. 능선의 소나무 세 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달빛보다 밝은 빈 공간이 남았다. 눈이 시릴 만큼 하얀데 그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르엘이 성벽 난간을 움켜쥐었다.
“저 속도라면 성벽까지 닿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모르지.”
현우는 시계를 찾듯 하늘을 훑었다. 게임에는 늘 시간이 표시됐다. 퀘스트 제한 시간과 버프 지속 시간이 화면 한쪽에 떠 있었다.
이곳에는 그런 숫자가 없었다.
대신 눈앞에서 나무 하나가 사라졌다.
쓰러지는 소리도 뿌리가 뽑힌 흔적도 없었다. 흰 경계가 줄기와 가지를 지나가자 나무와 그림자가 한꺼번에 끊겼다.
현우는 성벽 아래의 경계병을 불렀다.
“돌멩이 하나 던져 봐.”
병사가 작은 돌을 던졌다. 돌은 어둠 속을 날아가 바닥에 닿기 직전 흰 경계에 걸렸다. 튀지도 굴러가지도 않았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횃불은?”
꺼져 가는 횃불이 숲으로 날아갔다. 불씨가 몇 번 흔들렸다. 공백에 닿은 불꽃은 꺼진 것이 아니었다. 타고 있던 시간 자체가 지워진 듯 연기조차 남지 않았다.
제르엘이 낮게 말했다.
“불도 흔적도 남기지 않는군요.”
“지금 확인한 건 닿은 게 사라진다는 것뿐이야.”
말이 끝나자 공백 너머의 바람 소리가 끊겼다. 성벽 위의 깃발은 흔들렸지만 저쪽의 나뭇잎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현우는 지휘실에서 보았던 깨진 감시 거울을 떠올렸다. 백지화는 숲의 낮은 지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방향에는 성 안으로 물을 끌어오는 수로가 있었다.
식수 열흘치.
곡물 사흘치.
수로까지 사라지면 식량을 구하러 나갈 힘조차 남지 않는다.
“성벽을 비울 수 있는 병사는 몇 명이지?”
“정상적인 경계라면 여덟 명입니다. 하지만 동문에 다시 적이 나타나면 부족합니다.”
“그럼 한 명도 빼지 마.”
제르엘이 눈을 들었다.
“폐하께서 직접 나가시겠다는 뜻입니까?”
“숲의 가장자리만 확인한다. 길을 찾고 돌아와.”
“위험합니다.”
“안 나가면 더 위험해.”
게임 속에서는 지도를 열면 안전 구역과 몬스터 위치가 보였다. 지금은 발밑의 길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현우는 성벽 아래의 검은 숲을 바라봤다.
“지휘실로 가자. 바크가 그린 수로 약도를 본다.”
제르엘은 더 말리지 않았다. 그는 경계병들에게 서쪽을 계속 감시하라고 명령한 뒤 현우를 따라 내려갔다.
지휘실에는 바크와 모르칸 그리고 그롬이 모여 있었다. 바크는 다친 다리를 의자 옆에 세운 채 수로 약도를 펼쳐 놓았고 모르칸은 사람 장부의 빈칸을 메우고 있었다. 그롬은 부서진 쇠붙이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현우가 들어서자 바크가 급히 일어나려 했다.
“앉아.”
“성 밖으로 나가실 겁니까?”
“네가 그린 길을 확인하러 간다.”
“그럼 저도 안내하겠습니다.”
제르엘이 고개를 저었다.
“네 다리로 숲을 오갈 수 없다.”
“수로 북쪽 갈림길 뒤에는 오래된 순찰로가 있습니다. 제가 아니면 그 위치를 찾기 어렵습니다.”
바크의 손가락이 양피지 가장자리를 눌렀다. 다친 병사로 남는 대신 자신이 아는 것을 증명하려는 얼굴이었다.
“순찰로 끝에는 뭐가 있지?”
“집수정입니다. 예전에 보급 수레가 드나들던 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가 여기서 지도를 갱신해. 내가 돌아오면 네 기록과 실제 길을 맞춰 본다.”
바크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폐하.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싸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네가 지금 할 일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거야.”
바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르엘이 나섰다.
“호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성벽에서 두 명을 더 데려가겠습니다.”
“안 돼. 성벽은 그대로 둔다. 우리 둘만 간다.”
“마왕께서 홀로 나서시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홀로 안 간다. 네가 있잖아.”
짧은 말에 제르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더 고집하지 않았다.
그롬이 얇은 철못과 고리를 내밀었다.
“돌 틈에 박으면 밧줄을 걸 수 있습니다. 새것은 아니지만 사람 하나의 무게는 버틸 겁니다.”
“좋아. 모르칸은 배급을 예정대로 진행해. 우리가 늦어져도 식량을 아끼려고 굶기는 일은 없다.”
모르칸이 힘껏 고개를 숙였다.
현우는 횃불 하나와 밧줄을 챙겼다. 광염으로 길을 밝힐 수 있었지만 마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 탐사는 싸움이 아니라 확인을 위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성문 대신 서쪽 내성 아래의 무너진 배수로로 향했다. 제르엘이 반쯤 남은 철창을 들어 올리자 축축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이곳은 성벽 아래 협곡으로 이어집니다.”
“적이 이 길을 알고 있을까?”
“마왕성의 옛 병사라면 알았겠지만 지금 남은 자 중에는 기억하는 이가 없습니다.”
제르엘이 먼저 몸을 낮췄다.
문을 닫자 성 안의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협곡 바닥에는 물이 말라붙은 흔적이 길게 남아 있었다. 검은 바위 사이로 가느다란 풀이 자랐지만 숲 가까이 갈수록 색이 흐려졌다.
제르엘이 손을 들었다.
“발자국입니다.”
흙 위에 작고 세 갈래로 갈라진 발톱 자국이 겹쳐 있었다.
그 순간 흰 경계가 협곡 위쪽을 스쳤다.
발자국이 먼저 사라졌다.
흙이 지워진 것도 아니었다. 발자국만이 남아 있던 시간을 잃은 것처럼 사라졌다. 주변의 흙과 풀은 그대로였다.
현우는 밧줄 한쪽을 철못에 걸고 다른 쪽을 허리에 감았다. 손끝에 작은 검은 불꽃을 띄워 바위에 점을 찍었다.
“돌아올 때 기준점으로 쓴다.”
두 사람은 흰 경계에서 거리를 두고 전진했다. 경계는 소리 없이 숲을 먹어 치웠다. 나무가 사라질 때마다 먼지가 일지 않았고 바위가 사라진 자리에는 구멍도 남지 않았다.
현우는 기억 속의 지형을 떠올렸다. 협곡을 지나면 낡은 순찰탑이 나오고 그 뒤로 서쪽 보급로가 이어져야 했다. 게임에서는 장식용 지형이라 찾아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협곡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왼쪽은 바크의 지도에 표시된 수로 방향이었다. 오른쪽은 나무뿌리와 바위가 뒤엉킨 비탈이었다.
제르엘이 왼쪽을 가리켰다.
“수로로 가야 합니다.”
“순찰로는 오른쪽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지형을 보면 알 수 있어.”
제르엘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밧줄을 잡고 비탈을 먼저 올랐다.
경사는 가팔랐다. 현우의 갑옷이 낮은 가지에 걸릴 때마다 검은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몸 안의 마력은 성벽에서부터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비탈 중간에서 제르엘이 멈췄다.
“폐하. 뒤를 보십시오.”
흰 경계가 협곡 입구까지 내려와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온 길의 절반이 사라졌고 철못에 찍어 둔 검은 불꽃도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은 불꽃이 바위 표면에 번졌다. 사라진 길의 가장자리를 붙들 듯 힘을 누르자 바위가 잠시 모습을 되찾았다.
“길을 되돌리실 수 있습니까?”
“지워지는 걸 늦추는 것뿐이야.”
이마에 땀이 맺혔다. 불꽃 아래의 바위에는 흰 선이 계속 번졌다.
“폐하. 이제 그만하십시오.”
“조금만 더.”
“돌아갈 길을 지키는 것보다 폐하의 힘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성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합니다.”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게임에서는 마력 게이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면 됐다. 이 몸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람이 굶고 수로가 사라진다.
그는 불꽃을 거두었다.
“앞으로 간다.”
제르엘이 밧줄을 당겼다.
비탈 꼭대기에는 무너진 석탑의 잔해가 있었다. 탑 아래에는 잡초가 덮은 좁은 돌길이 남아 있었다.
제르엘이 돌 하나를 닦았다. 표면에는 세로로 긴 선 두 개 사이에 작은 원이 찍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보급 표식입니다. 옛 마왕성 수레에 같은 문양을 찍었습니다.”
돌길은 숲 안쪽으로 이어졌다. 멀리 어둠 속에 둥근 돌벽이 보였다. 바크가 말한 집수정으로 보였다. 그 옆에는 수레가 드나들 만큼 넓은 길이 끊긴 채 남아 있었다.
하얀 공백은 집수정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곳까지 가야 합니다.”
제르엘이 말했다.
“집수정이 살아 있다면 수로를 복구할 수 있습니다. 보급 시설이 남아 있다면 식량도…”
“오늘은 여기까지다.”
현우는 돌길의 가장자리에 철못을 하나 더 박았다.
그때 공백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누구… 있습니까?”
사람의 목소리인지 바람이 울린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제르엘이 검을 뽑았다.
“누가 거기 있습니까?”
외침은 흰 경계에 닿는 순간 잘린 듯 끊겼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마왕님…”
현우의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났다. 광염이 어둠을 밀어냈지만 공백 안쪽에는 빛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르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폐하.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 지금은 돌아간다.”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돌아가야 해.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가면 구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사라질 수 있어.”
제르엘은 공백 너머를 노려보다가 검을 내렸다.
두 사람은 밧줄을 따라 협곡으로 내려갔다. 뒤쪽에서 흰 경계가 돌길의 첫 부분을 덮었다. 방금까지 남아 있던 보급 표식 하나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바크가 지휘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의 흙 묻은 망토와 제르엘의 갈라진 장갑을 본 그는 곧장 지도를 펼쳤다.
“찾으셨습니까?”
현우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옛 보급로가 남아 있다. 집수정도 확인했다.”
모르칸이 숨을 들이켰다.
“그럼 식량이 있는 겁니까?”
“아직 모른다.”
목소리의 정체도 확인하지 못했다. 게임의 지형과 실제 숲이 달라진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 안에 남은 사흘은 기다리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해가 뜨면 사람을 모은다.”
제르엘이 무릎을 꿇었다.
“어떤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현우는 지도 안쪽의 오래된 보급 표식을 바라봤다.
“서쪽 숲으로 다시 간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길만 확인하지 않아. 먹을 것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