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3화: 창고에는 먼지만 남았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벽돌이 사라진 칠흑의 틈새 너머에서 떨리는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제르엘의 검이 번쩍였다. 은발의 군단장은 즉시 현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창고 모퉁이를 등졌다. 붉은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적의 척후일 수 있습니다. 성벽과 지휘실이 혼란한 틈을 타 내성 깊숙이 파고든 간자라면 즉각 베어야 합니다.”
“기다려.”
현우는 제르엘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눈앞의 벽은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었다. 마력등의 빛과 함께 벽돌 서너 장이 그대로 지워져 있었다. 단면은 마치 허공에 먹물을 칠한 것처럼 매끄럽고 차가웠다.
그 틈새로 스며 나오는 냄새가 있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쇳가루 냄새 그리고 오래 굶주린 사람 특유의 거친 숨결이었다.
적의 암살자나 특공대라면 이런 좁은 틈새에 갇혀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거기 누구냐.”
현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틈새 너머로 울리자 안쪽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폐, 폐하의 목소리…?”
“마왕 폐하께서 살아 계신다!”
우는 소리에 가까운 외침이 연달아 들려왔다.
“저희는 제4공방의 무기 수리공들과 하역부들입니다! 사흘 전 용사들이 성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통로가 무너져 구 하역장에 갇혔습니다!”
제르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4공방? 그곳은 1차 방어선이 뚫렸을 때 전멸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아닙니다, 군단장님! 퇴로가 막혀 비상 통로로 숨었는데 상층부가 통째로 무너졌습니다! 마력이 끊기고 벽이 하얗게 녹아내려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현우는 머릿속으로 마왕성의 지도를 펼쳤다.
아카샤의 최종 레이드 던전 구조. 1페이즈 진입로 우측에는 잡몹들이 리젠되던 폐쇄된 하역장 구역이 있었다. 유저들은 보스 방으로 최단거리로 질주하기 위해 광역 마법으로 그곳의 기둥을 부수고 길을 막아버리곤 했다.
그 잔해 속에 NPC들이 실제로 갇혀 있었던 것이다.
“벽을 부수지 마라.”
현우는 제르엘이 검기를 끌어올리려는 것을 제지했다.
“저 틈새 주변은 이미 지워진 상태다. 충격을 주면 공백이 더 넓어질 수 있어.”
현우는 장갑을 낀 손을 틈새 가장자리에 댔다.
몸 안에서 검은 마력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성문을 막을 때처럼 거친 불꽃이 아니라 부서진 벽돌의 잔해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형상으로 힘을 억눌렀다. 칠흑의 기운이 틈새 주변을 지탱하자 돌무더기 사이로 사람 하나가 빠져나올 만한 구멍이 벌어졌다.
“한 명씩 기어나와.”
어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드워프 하나가 기어 나왔다.
그을린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헝클어진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임프 둘과 쇠약해진 오크 일꾼 셋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드워프는 바닥에 엎드리며 현우의 발치를 향해 이마를 찧었다.
“대장장이 그롬,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저희 같은 천한 목숨을 꺼내 주실 줄은…”
“일어나.”
현우는 그롬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노인의 팔뚝은 뼈마디만 앙상했다. 손톱 밑에는 흙과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안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스무 명이 넘게 숨어들었지만… 굶주림과 무너진 바위에 깔려 이제 남은 건 저희 여섯뿐입니다.”
그롬의 눈가가 붉게 젖어 들었다.
“구 하역장의 비축 곡물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침략자 놈들이 상자란 상자는 모조리 쪼개고 씨앗 한 톨까지 털어갔더군요. 남은 건 먼지와 부서진 궤짝뿐이었습니다.”
현우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침략자 놈들.’
그들이 말하는 침략자는 다름 아닌 현우를 포함한 플레이어들이었다.
상자를 열어 아이템을 파밍하고 쓸모없는 잡템은 바닥에 버리거나 파괴했다. 그저 인벤토리를 채우고 골드를 벌기 위한 루틴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주민들에게 그것은 생존을 뿌리째 짓밟힌 재앙이었다.
현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모르칸.”
“예, 예! 폐하!”
장부를 들고 구석에 웅크려 있던 늙은 오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 여섯 명을 사람 장부에 올려라. 이름과 기술을 적고 물부터 조금 먹여.”
“명 받들겠습니다!”
현우는 몸을 돌려 창고 안쪽을 바라봤다.
“제르엘, 모르칸. 성안의 모든 창고를 지금 당장 확인한다.”
제르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휘실에 보고된 장부로는 부족하십니까?”
“글자로 적힌 숫자는 믿을 수 없어. 내 눈으로 직접 남은 게 뭔지 봐야겠다.”
현우의 발걸음은 빨랐다.
내성 지하 통로를 따라 이어진 물자 저장고들이 차례로 열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제1식량고의 거대한 철문은 빗장이 부서진 채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석실 바닥에 쥐조차 갉아먹을 것 없는 마른 먼지만 흩날렸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곡물 자루들은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뒹굴었다.
“여기도 털렸군.”
현우는 찢어진 마포 자루를 집어 들었다.
자루 모서리에 새겨진 낯익은 문양. 그것은 게임 시절 유저들이 제작해 들고 다니던 대용량 배낭의 상징이었다. 고위 랭커들이 레이드를 돌며 보급품 창고를 청소선처럼 훑고 지나간 자국이었다.
제2무기고는 더 심했다.
무기 거치대에는 칼자루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값비싼 마검이나 희귀 방어구는 고사하고 훈련용 목검과 찌그러진 철제 투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쓸모없다고 내팽개쳐진 부러진 단검 조각 몇 개만 뒹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제르엘이 떨리는 손으로 빈 무기대를 쓸어내렸다.
“마왕성의 무기고는 백 년 치 전쟁을 버틸 무구가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설마 그 수많은 보물과 무구가 단 한 자루도 남지 않았단 말입니까?”
“놈들은 가치가 있는 건 모조리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부수고 갔으니까.”
현우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게이머들은 효율의 화신이었다. 보물상자는 열쇠로 따는 시간조차 아까워 스킬로 부숴 열었고 장비는 분해해 강화 재료로 챙겼다. 던전의 모든 방을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고인물의 미덕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의 폐허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지하 보존 창고 구석에서 겨우 찾아낸 것은 거친 귀리 세 자루와 소금에 절인 질긴 건육 반 통이 전부였다.
모르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깃펜을 놀렸다.
“현, 현재 성안의 총인원은 구출된 여섯을 더해 백스물아홉 명입니다. 식수는 수로가 막히지 않는다면 열흘치지만… 곡물과 건육은 아껴 먹여도 사흘을 넘기지 못합니다.”
사흘.
현우의 머릿속에 시한폭탄 같은 숫자가 새겨졌다.
사흘 안에 새로운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성안의 백스물아홉 명은 굶어 죽기 시작한다. 부상병들은 상처가 곪아갈 것이고 하인들과 병사들은 탈진해 쓰러질 것이다.
마왕의 권능으로 불꽃을 뿜어낼 수는 있어도 없는 빵을 허공에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제르엘이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쥐었다.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무슨 결단?”
“사흘치 식량이라면 마왕군 병사 마흔둘에게만 집중 배급해야 합니다. 병사들이 힘을 유지해야만 성벽을 지키고 다음 전투를 치를 수 있습니다. 하인들과 노약자들에게는 물만 지급하여 버티게 하고…”
“군단장님!”
모르칸이 비명을 지르듯 무릎을 꿇었다.
“그, 그것은 하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발 자비를…”
“입 닥쳐라, 모르칸!”
제르엘의 호통이 창고를 울렸다.
“지금은 마왕성의 존망이 걸린 전시 상황이다! 병사가 쓰러지면 성문이 열리고 성문이 열리면 결국 모두가 도륙당한다! 감상으로 군대를 굶길 수는 없다!”
제르엘의 눈에는 냉혹함과 함께 깊은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군대를 지키지 못하면 마왕을 지킬 수 없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과거의 수많은 패배와 파멸의 기억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창고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구출된 그롬과 일꾼들도 숨을 죽인 채 마왕의 입술만 바라봤다.
현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제르엘.”
“예, 폐하.”
“네 말대로 병사만 배급을 주면 사흘 뒤에는 어떻게 되지?”
제르엘이 멈칫했다.
“병사들의 힘으로 성 밖을 정찰하고 적을 격퇴하여…”
“사흘 뒤에 남은 병사 마흔둘로 성을 지킬 수 있나? 무기를 고칠 대장장이도 없고 붕대를 감을 하인도 없고 밥을 지을 사람도 없는데?”
현우의 시선이 제르엘의 붉은 눈을 똑바로 꿰뚫었다.
“병사만 살아남은 성은 요새가 아니라 무덤이다. 싸우는 놈만 남겨두면 그놈들도 결국 지쳐서 죽어.”
제르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현우는 몸을 돌려 모르칸을 내려다봤다.
“식량은 오늘부터 전원 균등 배급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병사든 하인이든 똑같이 한 끼 분량으로 줄여서 나눈다.”
“폐, 폐하…”
모르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대신 그냥 먹이지 않는다.”
현우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해. 모르칸, 사람 장부에 적힌 기술대로 일손을 재배치해. 그롬.”
드워프 대장장이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부서진 무기고에서 쓸 만한 쇠붙이를 전부 모아. 칼을 벼릴 필요는 없다. 수로를 파고 흙을 나를 곡괭이와 삽 그리고 부서진 문을 막을 덧판부터 만들어.”
“명을 받들겠습니다!”
“바크.”
문가에서 목발을 짚고 서 있던 임프 병사가 몸을 바짝 세웠다.
“예, 폐하!”
“너는 지금 당장 지휘실로 가서 수로의 약도를 그려라. 물길이 어디서 들어오고 어디가 좁아지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현우는 다시 제르엘을 쳐다봤다.
“제르엘, 너는 성벽 수비를 지휘하되 병사들의 훈련 강도를 절반으로 줄여.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경계망만 유지한다. 사흘 안에 내가 성 밖에서 길을 열겠다.”
제르엘은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왕 아스타로트는 파괴와 군림의 화신이었다. 약자를 짓밟고 강자만을 취하며 패배한 자에게는 가차 없는 죽음을 내리는 것이 그가 알던 군주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마왕은 굶주린 하인의 손을 잡고 부서진 쇳조각을 모아 생존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그것은 잔혹한 지배가 아니라 모두를 살려내겠다는 굳건한 맹세였다.
제르엘은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이 제르엘, 폐하의 뜻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현우는 대답 대신 성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서늘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성벽 꼭대기에 올라서자 검은 산맥의 험준한 능선과 성문 앞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동문을 감싸고 있는 검은 불꽃은 여전히 맹렬하게 타오르며 적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의 시선은 불꽃 너머 숲의 서쪽으로 향했다.
“저것 좀 보십시오…”
뒤따라 올라온 제르엘이 숨을 들이켰다.
밤하늘의 붉은 달빛 아래 숲의 한 구역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것도 아니었다. 나무도 바위도 흙도 사라진 채 순백의 허공만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람조차 그 경계선에 닿으면 소리를 잃고 흩어졌다.
그 하얀 공백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
달빛을 받으며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왕성 쪽으로 능선을 갉아먹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왕성 안에는 사흘치 곡물과 먼지만 남았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멸망의 백지화가 밀려오고 있었다.
현우는 검은 장갑을 쥔 주먹을 꽉 쥐었다.
“사흘이다.”
바람이 현우의 검은 망토를 거칠게 흔들었다.
“사흘 안에 저 숲을 뚫고 먹을 것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