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7화: 백합 향이 나는 복도
종이 조각에서 밴 백합 향은 새벽이 밝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로제트는 황태자 침실 창가에 앉아 쪽지를 은제 핀셋으로 뒤집었다. 검은 재로 쓴 글자가 종이 결을 따라 번져 있었다. 썩은 장미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그 아래에 차갑고 맑은 백합 향이 얇게 깔려 있었다.
카이엔은 침대 곁에 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밤새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은 얼굴이었다.
“향료실에서 쓰는 향인가.”
“아니요. 향료실 백합은 단맛이 더 강해요. 이건 백합 뿌리를 말려서 만든 향유예요. 높은 곳의 예배실이나 황후궁에서 쓰죠.”
로제트는 말을 멈췄다. 황후궁이라는 이름을 너무 쉽게 꺼낸 것 같았다.
카이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후궁.”
“정확히는 아직 몰라요. 백합 향을 쓴다고 다 저주에 가담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확인하면 된다.”
“전하께서 직접 가시면 온 궁이 알게 됩니다.”
“내 침실에 누군가 들어와 협박을 남겼다. 숨길 일도 아니다.”
로제트는 종이 끝을 살폈다. 검은 재 사이에 아주 작은 수지 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손톱만 한 조각을 유리병에 넣자 향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이건 향유만이 아니에요. 오래된 봉인판에 바르는 수지예요. 물기가 있는 돌에 붙일 때 쓰는.”
카이엔이 탁자 위 지도를 끌어당겼다. 황성의 내부 도면에는 오래전에 막힌 수로가 옅은 선으로 남아 있었다. 황후궁 뒤편 복도와 황태자궁 침실 아래가 그 선으로 이어졌다.
로제트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수로예요.”
“레온.”
문 밖에서 대기하던 레온 기사장 대리가 즉시 들어왔다. 카이엔은 그에게 낡은 수로와 황후궁 주변의 출입 기록을 확인하라고 명했다. 인원은 최소로 하되 누구에게도 목적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로제트는 조용히 쪽지를 내려놓았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어요. 저쪽은 절 노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네가 가야 한다.”
“전하.”
“네가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다.”
카이엔은 종이를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로제트 앞에 놓인 유리병을 가리켰다.
“다만 내 시야 밖으로는 보내지 않는다.”
로제트는 웃었다.
“그 말씀은 경호처럼 들리지만 감금처럼도 들리네요.”
“오늘은 경호다.”
“오늘만요?”
카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간다.”
황후궁 뒤편의 복도는 해가 든 뒤에도 눅눅했다.
회색 돌벽에는 오래된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벽 아래를 따라 난 좁은 배수구는 황동 격자로 막혀 있었고 그 위에는 백합 무늬가 새겨진 봉인판이 걸려 있었다.
향은 그곳에서 가장 짙었다.
“황태자 전하.”
복도 끝에서 황후궁 시녀 둘이 급히 다가왔다. 그들은 로제트의 앞치마와 카이엔의 검을 번갈아 보더니 창백해졌다.
“이 구역은 황후마마의 휴식 시간에는 통행이 제한됩니다.”
“그 제한이 내 침실의 침입자보다 우선하나.”
카이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했다.
시녀들은 곧장 고개를 숙였다. 레온이 뒤에서 황태자 인장이 찍힌 수색 명령서를 내보였다.
“봉인판만 확인하겠습니다.”
로제트는 배수구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은 마른 돌이었다. 그런데 격자 아래에서는 물비린내 대신 탄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그녀가 손등으로 돌바닥을 쓸자 검은 가루가 묻어났다.
아이 발자국과 같은 재였다.
발자국은 격자 안에서 시작해 벽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사람 눈높이쯤에서 사라져 있었다.
“물이 아니라 꿈의 잔재예요.”
로제트가 낮게 말했다.
“수로를 타고 나온 게 아니라 수로를 출입구처럼 쓰고 있어요.”
카이엔은 봉인판을 살폈다. 백합 문양 한가운데에 검은 장미 가시가 얇게 덧그어져 있었다. 누군가 황후궁의 표식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저주의 문양을 올린 것이다.
“누가 손댄 흔적이군.”
“최근에요. 수지가 아직 굳지 않았어요.”
로제트는 시녀들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만 꼭 잡은 채 배수구 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주가 궁의 표식을 빌렸다고 해서 이들이 공범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 복도의 출입 기록을 확인해야 해요. 누가 향을 썼는지가 아니라 누가 봉인을 만졌는지요.”
로제트가 더 가까이 몸을 숙인 순간 배수구 안이 출렁였다. 물 한 방울 없던 검은 틈에서 아이의 그림자가 기어 나왔다.
얼굴 없는 아이였다.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검은 손이 뻗었다.
로제트의 손목을 잡으려는 손가락 끝에 장미 가시가 돋았다.
카이엔의 검이 먼저 격자 사이에 박혔다. 검은 손은 검날을 피해 벽 안으로 물러났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반스의 딸아. 여기까지 청소하러 왔어?
로제트의 숨이 얕아졌다. 발밑 돌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검은 재가 틈 사이에서 솟아오르며 그녀의 신발을 감쌌다.
“아래를 보지 마라.”
카이엔이 말했다.
그는 로제트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손아귀는 단단했지만 아프지 않았다.
“저게 원하는 건 네가 겁먹는 거다.”
“알아요.”
“그럼 내가 할 일은.”
로제트는 잠깐 눈을 감았다. 꿈속의 가짜 서재에서 카이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확인과 투신은 다르다.
그녀는 봉인판을 가리켰다.
“판을 떼어 내면 통로가 더 크게 열릴 수 있어요. 대신 그 위에 새 문양만 지울 수 있다면요.”
“할 수 있나.”
“작게요. 완전한 정화는 무리예요.”
“작은 것으로 충분하다.”
로제트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흰 분필을 꺼냈다. 평범한 청소용 분필처럼 보였지만 끝에는 희미한 분홍빛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반원을 그리고 배수구와 봉인판을 그 안에 넣었다.
“전하께서는 저 격자를 눌러 주세요. 그림자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요.”
카이엔은 말없이 검을 비틀어 격자 위에 가로로 걸쳤다. 검은 손이 다시 솟자 검날에서 붉은 빛이 번졌다. 그림자는 닿지 못한 채 흔들렸다.
로제트는 분필 끝을 봉인판의 검은 가시에 댔다.
“지저분한 낙서는 지워야죠.”
가시가 꿈틀거렸다. 장미 문양이 분필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로제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
그때 아이 그림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제트.
아버지는 네가 오길 기다려.
손이 흔들렸다.
카이엔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 이름으로 널 부를 자격이 있는 것은 네가 고른 사람뿐이다.”
로제트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 말만 붙잡고 다시 분필을 밀었다.
검은 가시가 하나씩 지워졌다. 백합 문양 아래 숨겨져 있던 은색 선이 드러났다. 수로 봉인의 원래 문장이었다.
물은 지나가되 악의는 머물지 못한다.
마지막 가시가 사라지는 순간 배수구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검은 그림자가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을 감싸던 재도 갈라진 틈 안으로 쓸려 내려갔다.
봉인판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백합 한 송이의 꽃잎이 반쯤 깨져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검은 얼룩이 남았다.
그러나 복도에 고여 있던 썩은 장미 향은 한결 옅어졌다.
로제트가 뒤로 물러나자 다리가 풀렸다. 카이엔이 팔을 받쳤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전하도 검에 힘을 너무 많이 주셨어요.”
“나는 멀쩡하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목의 검은 실금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로제트는 그 손목을 흘끗 보다가 유리병을 레온에게 건넸다.
“이 수지와 재를 따로 보관해 주세요. 태우거나 씻어 내면 안 돼요. 누가 다시 봉인을 건드렸는지 찾으려면 흔적이 필요하니까요.”
레온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황후궁의 출입 기록도 확보하겠습니다.”
카이엔은 시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복도는 수색이 끝날 때까지 봉쇄한다. 황후궁 사람을 함부로 심문하지 마라. 기록과 증거부터 가져와라.”
로제트는 그 말에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저주는 사람의 얼굴을 훔쳐 쓰는 데 능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손에 남은 재와 수지였다.
침실로 돌아온 뒤 카이엔은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다음 침투의 규칙을 정한다.”
로제트는 소파에 기대 앉은 채 눈을 깜빡였다.
“지금요? 저는 방금 수로 바닥과 한판 싸웠는데요.”
“그래서 지금이다. 다음에는 더 늦기 전에 정한다.”
그의 태도는 협상할 때의 황태자처럼 단호했다. 로제트는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제가 쓸 의자와 담요는 제가 고릅니다. 향이나 봉인이 섞이지 않은 것을 써야 해요.”
“좋다.”
“둘째, 제가 꿈에 들어간 뒤에는 누구도 제 몸을 만지지 못해요. 억지로 흔들면 꿈속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까요.”
카이엔의 시선이 잠깐 굳었다.
“예외는.”
“숨이 멎거나 피를 토하거나 몸에 저주 흔적이 번질 때요.”
“그 기준은 내가 판단한다.”
“전하께서 너무 걱정하시면 저주 흔적 아닌데도 깨우실 것 같은데요.”
“그럼 네가 깨울 신호를 정해라.”
로제트는 잠시 생각했다. 꿈속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손의 온기는 조금 달랐다.
“현실에서는 제 오른손에 은실을 묶어요. 전하께서 세 번 당기면 저는 돌아올 준비를 할게요. 꿈속에서는 전하가 제 이름을 한 번만 부르세요. 두 번 부르면 저주가 따라 할 수 있어요.”
카이엔은 그녀의 오른손을 보았다.
“세 번.”
“그리고 셋째.”
로제트는 말끝을 흐렸다.
“전하도 혼자 꿈에 들어가지 마세요. 저주가 문을 열어도요.”
카이엔의 눈빛이 낮아졌다.
“명령인가.”
“청소 규칙이에요.”
“그 규칙은 지키겠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로제트는 잠깐 망설이다가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장갑 너머의 손은 차가웠지만 힘은 일정했다.
“레온에게는 침실 밖 경호를 맡기세요. 출입 기록은 직접 확인하시고요.”
“이미 명했다.”
카이엔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덧붙였다.
“네 의자는 내가 보이는 곳에 둔다. 담요는 네가 고르고 은실은 내가 묶는다.”
“너무 자연스럽게 제안을 가로채지 마세요.”
“거절할 건가.”
로제트는 그의 손목 실금을 보았다. 자신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그에게도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요. 대신 매듭은 너무 세게 묶지 마세요.”
그날 밤 로제트는 창가에서 가장 먼 안락의자를 골랐다. 레온이 확인한 새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카이엔은 침대에 앉아 그녀의 오른손에 가는 은실을 세 번 감았다.
“불편하면 말해라.”
“전하께서 이 정도로 섬세하신 분인 줄은 몰랐네요.”
“네가 모르는 것이 많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은실 매듭이 완성되는 순간 침실 공기가 차가워졌다.
탁자 위 유리병 안에서 낮에 모은 수지가 흔들렸다. 백합 향이 방 안에 번졌다. 그 향은 창문과 문이 모두 닫힌 침실 바닥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로제트의 눈이 커졌다.
수로 봉인판에 남은 것과 같은 향이었다. 그것이 현실의 틈을 타고 들어오자 꿈속에서 위험 물품 보관함으로 바꾸었던 두 번째 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쿵 하고 울렸다.
카이엔이 은실을 감은 손을 단단히 쥐었다.
“아직 들어가지 마라.”
로제트는 숨을 죽였다.
이번에는 문 너머 아이가 울지 않았다.
대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백합 향을 뿌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