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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5화

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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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검은 회랑의 첫 청소

검은 장미가 로제트의 성을 부른 뒤 회랑은 숨을 죽였다.

대리석 바닥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만 길게 흔들렸다. 양옆으로 늘어선 문에는 똑같은 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문은 손잡이까지 검게 타 있었고 어떤 문은 안쪽에서 누군가 두드리는 듯 미세하게 떨렸다.

카이엔은 로제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에반스 드림워커가 누구지.”

로제트는 가장 가까운 문을 보았다. 가문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문틈마다 검은 연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그 이름을 부른 것이 네 적인가.”

“아마도요.”

카이엔의 손가락이 더 단단히 맞물렸다. 그는 회랑 끝의 어둠을 노려봤다.

“그럼 여기서 나간다.”

“그럴 수 있으면 진작 나갔죠.”

로제트는 손바닥에 남은 인장 조각을 펼쳤다. 현실에서는 깨진 밀랍이었던 조각이 이곳에서는 검은 장미 꽃잎처럼 얇게 펴져 있었다. 꽃잎 끝이 한 문을 향해 느리게 기울었다.

“저 문이 우리를 불렀어요.”

“그래서 들어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들어가지 않으면 저쪽이 먼저 나올 것 같은데요.”

문 안쪽에서 둔탁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피가 찬 목으로 짐승이 숨 쉬는 소리였다.

카이엔은 검을 뽑았다. 검날에 번진 붉은 빛이 회랑 벽을 가르자 문 위의 장미가 꿈틀거렸다.

“내 뒤에 있어.”

“싫어요. 그럼 전하가 또 혼자 다 뒤집어쓰시잖아요.”

카이엔이 고개를 돌렸다. 로제트는 겁이 나서 마른침을 삼켰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문을 열면 같이 들어가요. 손도 놓지 말고요.”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알겠다.”

문이 열리자 쇠 냄새가 밀려왔다.

안쪽은 카이엔이 악몽에서 보았던 전장을 어설프게 흉내 낸 병영이었다. 무너진 천막과 피 묻은 깃발이 바람 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병사들이 걸친 갑옷은 서로 다른 시대의 것이었고 깃발의 문양도 카이엔이 아는 군기가 아니었다.

“여긴 전장이 아니에요.”

로제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있던 곳과 닮았다.”

“닮게 만든 거예요. 전하가 가장 싫어하는 장면을 흉내 내서요.”

“가짜라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다.”

카이엔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로제트는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가짜 칼날이라도 같은 상처를 찌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회랑의 문은 기억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문 안의 풍경을 그럴듯하게 칠하고 꿈 주인이 가장 피하고 싶은 감정을 그 안에 가두는 덫이었다. 문을 닫는다고 끝날 리 없었다. 안에 쌓인 감정이 넘치면 저주는 현실의 밤으로 다시 흘러나올 것이다.

“그래도 전하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면 저쪽은 오래 못 버텨요.”

“네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가짜는 디테일을 싫어하거든요. 사람 마음은 대충 흉내 내면 바로 티가 나요.”

로제트는 무너진 천막을 가리켰다. 천막 기둥에는 레반티아 군의 표식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전하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을 진짜로 알았다면 저런 실수는 안 했을 거예요.”

바닥의 시체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흐린 얼굴들이 카이엔을 향했다.

살려 주세요.

카이엔의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검을 쥔 채 움직이지 못하자 로제트는 그의 옆으로 섰다.

“전하. 그때 전쟁 깃발은 파란색이었다고 하셨죠.”

“그렇다.”

“여긴 검은색이에요. 그리고 저분들은 전하를 부르면서도 전하 이름을 몰라요.”

시체 하나가 입을 벌렸다.

“황태자여. 우리를 버린 자여.”

카이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병영 가장 깊은 곳에서 웃음이 흘렀다.

드림워커의 딸아. 네 아버지도 그렇게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지.

로제트의 숨이 멎었다. 검은 장미는 얼굴도 없이 천막 그림자 속에 피어나 있었다.

“제 아버지를 알아요?”

대답 대신 피웅덩이가 들끓었다. 검은 장미의 목소리는 다정한 척 낮아졌다.

너는 몰라도 된다. 문을 닫고 나가라. 그러면 이 남자의 밤만은 남겨 주마.

“거래할 생각 없어요.”

로제트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카이엔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네 아버지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 지금은 저것부터 치운다.”

그 말에 로제트는 그를 돌아보았다. 캐묻지도 않고 믿어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당장 그녀를 위협하는 목소리를 먼저 베겠다는 뜻이었다.

피웅덩이에서 짐승이 솟구쳤다.

붉은 살점으로 이루어진 몸이었다. 머리에는 병사들의 투구가 여러 겹 박혀 있었고 입 대신 수십 개의 송곳니가 달려 있었다. 놈이 포효하자 병영 바닥의 시체들이 모두 피로 녹아 짐승에게 달라붙었다.

카이엔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짐승의 앞발을 잘랐다. 그러나 잘린 살점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작은 짐승이 되어 로제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베면 늘어나요!”

“알고 있다.”

카이엔은 검끝을 돌려 작은 짐승들을 바닥에 박아 두었다. 죽이지 않고 움직임만 묶는 검술이었다. 붉은 빛이 바닥에 선을 그으며 놈들의 다리를 얽었다.

로제트는 은반지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 모인 빛이 검은 실금에 닿는 순간 찌르는 통증이 손목을 훑었다.

짐승이 웃었다.

네 힘은 우리 것이었다.

“제 힘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제 특기예요.”

로제트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붉은 피가 공중에서 멈췄다. 끈적한 살점은 하얀 설탕 구름으로 부풀었다. 송곳니는 둥글고 말랑한 이빨이 되었고 병사들의 투구는 작은 분홍 귀로 바뀌었다.

거대한 짐승은 눈 깜짝할 사이 솜사탕처럼 통통한 토끼가 되었다.

토끼는 제 앞발을 들여다보더니 카이엔의 부츠에 코를 비볐다.

카이엔의 검끝이 멎었다.

“이걸 베지는 마세요.”

“전장에 왜 토끼가 있지.”

“이제 전장이 아니니까요.”

토끼 가슴팍에서 검은 장미 문양이 다시 꿈틀거렸다. 로제트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저 문양을 떼어 내야 해요.”

카이엔은 잠깐 토끼와 로제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검을 거두고 토끼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토끼는 발버둥치지 않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카이엔이 죄책감에 휩쓸려 검을 겨눴다면 문양은 다시 피를 불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로제트가 고른 방식을 믿고 악몽의 먹이가 되기를 거부했다.

“지금이다.”

로제트는 두 손을 토끼의 가슴에 얹었다. 이번에는 피도 괴물도 바꾸지 않았다. 검은 문양만 뽑아내듯 빛을 끌어당겼다.

문양이 꽃잎 조각으로 갈라지며 그녀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병영의 천막이 바람에 흩어졌다. 가짜 시체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검은 깃발은 흰 천 조각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이엔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가 한 말은 믿지 마라.”

“전하도요.”

로제트는 손바닥의 검은 꽃잎을 내려다봤다. 꽃잎 한가운데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은색 실 두 줄이 서로 마주 보는 눈 모양이었다.

에반스 드림워커의 옛 문장이었다.

로제트는 꽃잎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가문이 무너지기 전까지 은반지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는 문장이다. 어머니는 그 문장을 함부로 보여 주지 말라고만 했고 로제트는 너무 어려서 이유를 묻지 못했다.

“아는 문양인가.”

카이엔이 물었다.

“제 가문의 것이에요. 적어도 이 꽃잎은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목소리도 네 가문을 쫓는 자라는 뜻인가.”

“그건 아직 몰라요.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한 자가 저주와 연결됐을 수도 있고 누군가 그 흔적만 훔쳐 썼을 수도 있어요.”

로제트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가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마다 자신이 다시 쫓기게 될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그때 카이엔이 검을 든 손으로 꽃잎을 가리지 않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모를 때는 추측하지 마라.”

“전하께서 할 말씀은 아닌데요.”

“나는 지금부터 확인할 생각이다.”

그는 꽃잎을 빼앗지 않았다. 로제트가 쥔 것을 지키듯 손등만 덮었다.

“네가 허락하는 만큼만 듣겠다. 대신 혼자 확인하려고 사라지지는 마라.”

그 말은 명령처럼 들렸지만 로제트는 이상하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혼자여야 안전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저주는 이미 그녀의 이름과 가문의 문장을 알고 있었다. 숨는 것만으로는 카이엔도 자신도 지킬 수 없었다.

“그럼 전하도 약속하세요.”

“무엇을.”

“가짜 목소리가 병사들을 들먹여도 혼자 검을 들고 뛰어들지 않겠다고요. 정리는 같이 하는 겁니다.”

카이엔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까다로운 청소 담당이군.”

“비싼 값 받을 예정이라서요.”

“얼마든지 주지.”

그 대답이 너무 망설임 없어서 로제트는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더 살피려는 순간 병영 전체가 기울었다. 문 밖 회랑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힘이 빠졌어요.”

카이엔은 말없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현실의 몸까지 아파 오는 탓에 로제트는 잠깐 그의 어깨에 기대고 말았다.

“다음 문은 다음에 연다.”

“전하가 먼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네가 쓰러지는 것보다 느린 게 낫다.”

첫 문이 닫히며 검은 장미 문양이 산산이 부서졌다. 분홍 토끼는 그 틈에서 작은 꽃잎이 되어 흩어졌다. 로제트의 손바닥에는 검은 꽃잎 하나만 남았다.

그때 회랑 저편의 두 번째 문 안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로제트는 숨을 삼켰다. 그 울음은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을 불편하게 긁었다.

두 번째 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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