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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등선자(登仙者)11화

출근길의 등선자(登仙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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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잿빛 밭의 미세 분무

새벽의 찬 공기가 외문 북쪽 비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한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돌계단을 올랐다. 연기기 1성의 단전은 여전히 잔물결처럼 가늘게 흔들렸고 허벅지 근육은 뻐근했다. 무리한 걸음은 금물이었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비탈 끝자락에 이르자 잿빛 안개 속에서 작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영영이었다. 그녀는 흙투성이가 된 도포 소매를 걷어붙인 채 쪼그리고 앉아 메마른 땅을 매만지고 있었다. 발치에는 반쯤 빈 나무 물통과 부러진 괭이자루가 뒹굴었다.

"일찍 오셨네요."

임영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이 또 안 빠집니까?"

"네. 바닥이 굳은 돌처럼 딱딱해서 물을 부어도 고이기만 하고 아래로 스며들질 않아요. 잎은 타들어가는데 뿌리는 썩어가고 있어요."

한리는 그녀가 가리킨 밭고랑으로 다가갔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는 은백색 줄기를 지닌 풀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달빛을 머금고 자란다는 희귀 영약 월광초(月光草)였다. 본래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야 할 잎맥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한리는 밭 흙을 한 줌 쥐어 으깨 보았다. 겉은 물기로 질척거렸지만 손가락 마디 사이로 부서지는 흙 알갱이는 시멘트 가루처럼 굳어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푸른 커널 로그가 깜빡였다.

`토양 매질 분석: 석회질 침전물 78%`

`수분 유효 침투율: 12.4%`

`근계(根系) 산소 결핍 경고: 84%`

`영기 패킷 전달 손실: 68.2%`

"흙의 숨구멍이 다 막혔군요."

"상급 제자들이 버리고 간 폐토예요. 석회 성분이 굳어서 물길이 통하지 않는 자리만 제게 떠넘겼어요."

임영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을 안 주면 바싹 마르고 물을 주면 웅덩이가 져서 숨이 막혀 죽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절망이 묻어 있었다. 영로원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이번 달 말까지 최소 다섯 뿌리의 월광초를 납품해야 했다.

한리는 시야에 떠오른 로그의 하위 데이터를 빠르게 훑었다.

`월광초 구조적 특성:`
- 엽면 기공(Stomata) 수분 흡수율: 74%
- 근계 직수 주입 시 부패 계수: +3.2x
- 권장 공급 프로토콜: 50~70μm 미세 기화 분무

대기업 마케팅팀 시절 신제품 스마트팜 제안서를 검토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배수 불량 토양에서 고부가가치 작물을 살리는 방식은 물을 퍼붓는 것이 아니었다.

"물을 붓지 마세요."

"네? 물을 안 주면 당장 오늘 낮에 다 말라버려요."

"흙에 물을 쏟아부으니까 막히는 겁니다. 흙을 거치지 않고 잎과 공기로 직접 먹이면 됩니다."

한리는 밭두렁 옆에 버려진 굵은 대나무 대롱을 집어 들었다. 마디 안쪽에 영기가 통하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폐자재였다.

"임영영 씨는 목(木) 속성 영기를 다룰 줄 알지요?"

"아주 약해요. 겨우 새싹을 조금 달래는 정도예요."

"충분합니다. 강한 힘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일정한 압력이 필요하니까요."

한리는 대나무 대롱의 표면을 손끝으로 훑으며 커널 로그의 구조 분석을 띄웠다.

`재질: 묵죽(墨竹) 잔재`

`미세 균열점(Vulnerability) 스캔 완료`

`권장 천공 좌표: 7개소 (직경 0.3mm 내외)`

`압력 분산비: 1:4.8`

"여기, 그리고 여기. 제가 짚는 자리에 바늘구멍만 한 영기 구멍을 뚫어 보세요."

한리가 가리킨 일곱 군데 지점은 대나무 섬유질이 가장 얇게 교차하는 맹점이었다.

임영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연녹색 영기가 피어올라 대나무 표면을 찔렀다. 찌르르하는 미세한 파열음과 함께 정확한 크기의 미세 구멍 일곱 개가 뚫렸다.

"이제 물통에 물을 채우고 대롱 끝을 막은 뒤 영기로 물을 밀어내 보세요. 뿜어내는 게 아니라 잘게 부순다는 느낌으로요."

임영영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대롱 뒤편으로 맑은 지하수를 밀어 넣으며 목 속성 영기로 수압을 걸었다.

피익—!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대나무 구멍에서 물줄기가 아닌 뽀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새벽바람을 타고 퍼진 물안개는 흙탕물을 만들지 않고 밭 위를 잔잔하게 뒤덮었다. 안개 알갱이들이 월광초의 누런 잎사귀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스며들었다.

`초극세 분무 프로토콜 가동`

`엽면 기공 흡수율: 81.6% (정상 회복)`

`영기 패킷 증발 손실: 4.8% (극소)`

`월광초 활성도: 14% → 62% 급상승`

시들어 축 늘어져 있던 월광초 줄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잎맥을 따라 서늘한 은빛 형광이 다시 차올랐다.

"세상에……."

임영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이 흙에 고이지 않는데 잎이 살아나요."

"월광초는 뿌리보다 잎으로 밤이슬을 마시는 약초입니다. 굳은 흙에 억지로 물을 밀어 넣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한리는 차분하게 설명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스템 로그가 제시한 물리적 계산이 이 세계의 약초에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임영영은 대나무 대롱을 품에 꼭 안은 채 한리를 쳐다보았다.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맑은 눈동자였다.

"한리 사형,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원리만 알면 어렵지 않습니다. 공급 방식을 최적화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약초를 수십 년 키운 노잡역들도 밭에 물을 들이붓기만 해요. 이런 방식은 문파 장서각 비급에도 없어요."

임영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하게 포권을 취했다.

"사형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번 달에 쫓겨났을 거예요. 앞으로 이 밭에서 나오는 모든 영약은 사형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기르는 약초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영약 공급원을 확보한 것은 외문 생존에 있어 거대한 자산이었다.

하지만 만족감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미세 분무로 피어오른 안개가 지표면을 적시며 흘러내리다 밭 한쪽 구석의 갈라진 바위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한리의 품속에서 외문 명패가 다시 미약하게 진동했다.

`지하 미세 영류(靈流) 감지`

`주파수 일치율: 49%`

`동기화 경로: 북쪽 배수 암반 → 분배대 지하 공동`

한리는 바위틈으로 다가갔다.

"이 아래에 물길이 있습니까?"

임영영이 다가와 바위틈을 살폈다.

"네. 예전에는 외문 상류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공동 수로가 이 밑을 지나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몇 해 전에 물길이 막히면서 버려졌다고 들었습니다."

"막힌 게 아니라 누군가 막아둔 것 같은데요."

한리는 바위틈 사이에 낀 검은 이끼를 긁어냈다. 물이 흐르지 않아 말라붙은 암반 틈새로 인위적으로 쐐기를 박아 넣은 흔적이 선명했다.

시야에 붉은 경고 로그가 떴다.

`인위적 차단 밸브 감지`

`하중 집중점: 상단 우측 편석`

`차단 시점: 약 3년 전`

`연결망: 외문 영기 분배대 하부 코어`

누군가 고의로 이 수로를 막아 북쪽 밭을 메마르게 만들고 그 영기를 분배대 하부의 특정 공간으로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보았던 서도진 패거리의 장부 조작과 무관하지 않은 구조였다.

한리는 임영영을 돌아보았다.

"이 쐐기를 조금만 젖혀 보겠습니다. 소리가 날 수 있으니 주변을 살펴봐 주세요."

"네, 조심하세요."

한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하중이 집중된 편석의 균열점에 손가락을 얹었다. 연기기 1성의 맑은 영기를 한 줄기 흘려보내자 쐐기돌의 무게 중심이 어긋나며 덜컥하고 틈이 벌어졌다.

솨아아—

깊은 지하에서 막혀 있던 맑은 영수가 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품 안의 명패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세그먼트 노드 Tower-01 경로 갱신`

`공명원 2개소 연결 확인`

`좌표 보정률: 2/3 (66%)`

`최종 진입점: 태을봉 제한구역 외곽 암반실`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고 있었다.

동부 지하의 첫 번째 봉인석, 외문 분배대의 두 번째 공명원, 그리고 이 영약 밭 지하를 관통하는 고대 수로가 모두 하나의 거대한 회로로 묶여 있었다.

그때 한리의 눈에 암반 틈새 돌벽이 들어왔다.

습기가 걷힌 돌벽 표면에 날카로운 칼끝으로 긁어 새긴 듯한 기하학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제 동부 뒤편에서 보았던 검은 실밥의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흔적이었다.

`미확인 표식 스캔`

`생성 시각: 약 6시간 전`

`데이터 형식: 시스템 노드 바이패스 코드`

`경고: 제3자의 노드 추적 진행 중`

한리의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창명종의 평범한 수선자라면 결코 새길 수 없는 시스템의 명령어 코드였다.

이 세계에 갇힌 관리자, 혹은 천도의 집행자 중 누군가가 자신과 똑같은 경로를 밟아 Tower-01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형, 왜 그러세요?"

임영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한리는 표식을 흙먼지로 덮어 가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물길이 잘 통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품속의 명패를 단단히 쥐었다.

"영영 씨, 월광초 분무 재배는 매일 새벽과 해 질 녘에만 진행하세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명심할게요. 사형도 몸조심하세요."

비탈길을 내려오는 한리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계산식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두 번째 공명원까지의 경로는 확보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추적자가 한 발 앞서 움직이고 있다. 놈이 노드를 먼저 장악하거나 봉인해 버린다면 현실로 돌아갈 탈출구는 영영 닫히고 만다.

'시간이 없다.'

한리는 단전의 미세한 기운을 다시 한번 끌어올리며 동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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