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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18화

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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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검은 찌꺼기의 값

문밖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세리아는 빗장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소매에서 장부 조각을 꺼냈다. 붉은 줄과 둥근 기호가 남은 부분이었다. 세리아는 기호를 손끝으로 누르고 서준의 옷 안쪽을 가리켰다.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기호를 다시 누른 뒤 손을 펼쳤다. 내놓으라는 뜻인지 보여 달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서준은 가족사진이 든 안주머니를 먼저 눌렀다. 사진은 꺼내지 않았다.

르네가 세리아의 손목을 가볍게 밀었다. 그리고 문 아래를 가리켰다.

복도 끝에서 종이가 쓸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기록실을 다시 찾고 있었다.

세리아는 잠깐 르네를 노려봤다. 이내 책상 아래에서 작은 종이 조각을 꺼내 서준 앞에 밀었다. 종이에는 둥근 기호의 절반만 찍혀 있었다. 찢긴 가장자리에는 검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세리아는 종이와 바닥을 번갈아 가리켰다.

아래라는 뜻처럼 보였다.

르네가 종이 조각을 낚아채 접었다. 그녀는 서준의 팔을 잡고 기록실 뒤쪽의 좁은 문으로 끌었다.

서준은 세리아를 돌아봤다.

세리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두 개를 펴고 자기 눈을 가리킨 뒤 문을 가리켰다. 보고 있겠다는 뜻인지 지켜보라는 뜻인지 모호했다.

문이 닫혔다.

뒤쪽 계단은 아래로 내려갔다. 벽에는 검은 물이 말라붙은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맡던 잉크 냄새가 사라지고 젖은 쇠와 썩은 천 냄새가 올라왔다.

서준은 목덜미의 표식을 만졌다.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열이 올라왔다.

르네는 뒤를 돌아보며 검지를 입술에 세웠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계약 원본은?"

서준의 말에 르네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서준은 방금 받은 종이 조각을 꺼내 손바닥 그림을 흉내 냈다. 이어 종이를 접고 손가락으로 길게 당기는 동작을 했다.

르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기 주머니를 가리키고 손바닥을 뒤집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다음 아래 계단을 가리키고 두 손가락으로 걷는 시늉을 했다.

먼저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였다.

서준은 종이 조각을 다시 옷 안에 넣었다.

계단 끝에는 낮은 아치형 통로가 있었다. 통로 아래로 작은 수레가 오갔다. 수레에는 깨진 판과 검은 자루가 실려 있었다. 안쪽 작업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래로 흘러나온 폐품처럼 보였다.

르네는 벽에 붙은 낡은 쇠고리를 잡아당겼다. 아치 한쪽의 판자가 들리며 사람 하나가 지나갈 틈이 생겼다.

그녀는 서준을 보며 빈 손바닥을 폈다. 그다음 물통을 가리키고 배를 문질렀다.

물과 음식이었다.

"돈이 필요하다는 거지."

르네는 말뜻을 모르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판자 뒤는 폐광 아래로 이어지는 버려진 수로였다. 바닥에는 검은 찌꺼기와 젖은 쇠편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멀리서 작업자들이 자루를 뒤집고 쓸어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르네는 손가락으로 더미를 가리켰다. 아무거나 집지 말라는 듯 손을 세게 저었다. 이어 서준의 손목패를 누르고 목덜미를 가리켰다.

표식이 있는 사람이 폐품에 손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경고였다.

서준은 바닥에 놓인 검은 조각을 바라봤다. 가슴 안쪽이 천천히 조여 왔다.

이번에도 느낌만으로 움직이면 안 됐다.

그는 손을 뻗지 않고 주변부터 봤다. 더미 오른쪽에서는 검은 물이 낮은 홈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 위에 얇은 막이 떠 있었다. 기름 같았다. 가슴 안쪽의 떨림은 그쪽에서 더 크게 울렸다.

서준은 몸을 낮췄다.

붉은 찌꺼기 옆의 자루가 뒤집혀 있었다. 자루 안쪽에서 젖은 쇠편이 흘러나왔고 그 아래에 검은 물이 고였다. 르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서준은 손을 멈췄다.

기름막이 아주 늦게 흔들렸다. 동시에 자루 밑 쇠편이 서로 부딪혔다. 가슴의 떨림은 강했지만 물과 쇠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르네는 재촉하듯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멀리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준은 자루 더미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검은 판 조각과 붉은 찌꺼기가 서로 겹쳐 있었다. 가슴 안쪽의 떨림은 이번에도 있었지만 더 짧았다.

그는 먼저 먼지를 봤다. 먼지는 더미에서 바깥쪽으로 흐르지 않고 한 점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물은 그 점을 피해 돌아갔다. 작은 쇠고리 하나가 판 조각 옆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세 가지가 같은 곳을 가리켰다.

서준은 천 조각으로 손을 감싼 뒤 판 조각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저렸다. 검은 판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안쪽에는 금이 간 둥근 홈이 있었다. 붉은 찌꺼기 한 덩이가 홈 안에 박혀 있었다.

르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물건을 버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터졌다.

서준이 고개를 들자 회색 앞치마를 입은 남자가 통로 끝에 서 있었다. 남자는 서준의 손에 있는 판 조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르네가 서준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르네의 손목패를 보더니 손가락 두 개로 판 조각을 가리켰다. 가져가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통로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서준의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르네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둘은 폐품 수로 아래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남자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서준은 판 조각을 버릴까 생각했다. 손에 쥔 물건 하나 때문에 다시 붙잡히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컸다.

그런데 손을 펴려는 순간 판 안쪽의 둥근 홈이 보였다.

마르코의 외투 깃에 달린 장식과 닮았다.

서준은 판 조각을 옷 안쪽에 밀어 넣었다.

수로 끝에는 천막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천막 앞의 넓은 판자 위에 폐품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한쪽에는 쇠편을 저울에 올리는 늙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르네를 보자 손을 들었다.

르네는 판 조각을 가리킨 뒤 남자를 가리켰다.

서준은 그가 값을 정하는 사람임을 알아챘다.

늙은 남자는 토반이라고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서준의 목패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이어 판 조각을 내놓으라는 손짓을 했다.

서준은 바로 건네지 않았다.

토반은 평범한 쇠편 하나를 저울 위에 올렸다. 손가락 하나를 펴고 동전 한 닢을 내보였다. 그리고 서준의 판 조각을 가리켰다.

평범한 쇠편과 같은 값으로 치겠다는 듯했다.

르네가 토반의 손을 밀었다. 토반은 웃으며 검은 판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홈에 닿자 표정이 굳었다. 토반은 곧바로 판을 떨어뜨리고 손끝을 털었다. 그는 붉은 찌꺼기를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서준은 자신이 찾은 세 가지 징후를 토반에게 보여 주었다. 물이 돌아간 자리와 먼지가 가라앉은 점 그리고 작은 쇠고리를 차례로 가리켰다.

토반의 눈이 달라졌다.

그는 판 조각을 저울에 올렸다. 바늘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토반은 저울 옆의 작은 물통에 쇠가루를 한 줌 넣었다. 쇠가루가 판 조각 쪽으로 느리게 모였다.

토반은 동전 네 닢을 꺼내 판자 위에 놓았다.

르네가 서준을 봤다. 그녀는 동전을 가리키고 입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물과 빵을 살 수 있는 양인지 묻는 것 같았다.

서준은 동전 네 닢을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돈은 누군가가 던져 주거나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이건 자신이 손으로 찾아낸 물건의 값이었다.

토반은 판 조각을 다시 뒤집었다.

둥근 홈 안쪽에서 검은 기호가 드러났다. 장부 조각의 기호와 닮은 모양이었다. 토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동전 네 닢을 거두려 했다.

서준이 먼저 동전 한 닢을 토반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판 조각의 기호를 가리킨 뒤 고개를 저었다. 이 부분은 넘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조각의 일부를 손가락으로 가렸다.

토반은 한참 서준을 보다가 고정편을 쪼개는 작은 망치를 꺼냈다. 그는 기호가 있는 부분을 따로 떼어 바닥에 놓고 나머지를 품에 넣었다. 동전 네 닢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토반은 기호 조각을 가져가지 않았다.

서준은 그제야 판 조각을 놓았다.

르네는 동전 두 닢을 바로 물통 담당자에게 가져갔다. 토반은 손을 내저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잠시 뒤 르네는 물이 든 작은 병과 딱딱한 빵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서준은 빵을 보는 순간 손을 뻗었다. 르네가 그의 손등을 쳤다. 그녀는 먼저 동전 두 닢을 서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나머지 두 닢은 자기 손에 쥐었다.

나누자는 뜻이었다.

서준은 동전의 차가운 무게를 확인했다. 네 닢 중 두 닢이 아직 자신에게 있었다. 르네가 전부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직접 세고 있다는 사실이 더 낯설었다.

그는 빵을 반으로 나눴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물은 한 모금씩 마셨다. 목덜미의 열이 조금 가라앉았다.

토반은 천막 뒤에서 기호 조각을 멀리 밀어 놓고 있었다. 그는 서준 쪽을 보지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둥근 모양을 그린 뒤 위쪽을 가리켰다.

그 물건이 아래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처럼 보였다.

서준은 옷 안쪽의 종이 조각을 꺼냈다. 종이의 찢긴 모서리를 판자 위에 대자 둥근 기호의 반쪽과 기묘하게 이어졌다.

그 순간 목덜미의 푸른 표식이 다시 뜨거워졌다.

서준은 종이를 재빨리 접었다. 동전 두 닢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돈을 얻었다.

동시에 세리아가 보여 준 장부와 마르코의 외투에 이어지는 물건도 손에 넣었다.

르네가 출구 쪽을 가리켰다. 서준은 빵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수로 위쪽에서 낯익은 막대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그들이 내려온 길을 찾고 있었다.

서준은 동전을 숨기지 않았다. 대신 판자 아래의 기호 조각을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첫 이익은 손에 남았다.

그 이익이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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