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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17화

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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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기록실의 문턱

르네는 골목 끝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서준의 목에 걸린 나무패를 옷깃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목덜미를 덮으려 옷깃을 끌어올리자 막 새긴 표식이 뜨겁게 쑤셨다.

서준이 손을 떼자 르네는 접수소 옆의 낮은 문을 가리켰다. 문틈에서는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새어 나왔다.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유리판 위에 올려놓고 피를 본 곳이었다. 하역장 인부들이 물러났다고 해도 이 안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손이 그의 이름을 적었을 뿐일 수도 있었다.

르네는 대답 대신 골목 입구를 봤다.

검은 장화를 신은 두 남자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역장에서 보던 작업복은 아니었다. 하지만 허리에 단 막대와 손에 든 나무패가 낯익었다. 한 명은 지나가는 사람의 목과 손목을 훑었다. 다른 한 명은 창구 쪽을 향해 짧게 소리쳤다.

르네의 손이 서준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낮은 문 안으로 먼저 몸을 밀었다. 서준은 잠깐 버텼다. 어두운 골목으로 돌아서 달아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숨을 곳도 물을 구할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검은 장화들이 이미 그쪽을 막고 있었다.

그는 르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좁고 길었다. 한쪽 벽에는 낡은 나무 서랍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서랍마다 글자가 붙어 있었지만 서준에게는 전부 같은 검은 긁힘처럼 보였다.

르네는 걸음을 늦췄다. 복도 끝의 창문 하나를 보더니 서준을 벽 쪽으로 밀었다. 창문 안쪽에는 잉크 묻은 손이 보였다.

그 손이 멎었다.

잠시 뒤 창문이 열렸다. 푸른빛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낡은 회색 조끼 소매에는 잉크가 번져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종이 베인 자국이 여러 개였다.

여자는 서준의 얼굴보다 목깃을 먼저 봤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창문 틈으로 내밀었다.

서준은 받지 않았다.

종이에는 붉은 줄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글자는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적힌 낯익은 모양은 알아봤다. 접수원이 방금 전 종이에 적었던 것과 같은 글자였다.

한서준.

자기 이름이 낯선 글 사이에 박혀 있는 광경이 이상하게 목을 조였다. 이곳에서 그 이름을 입으로 말한 것은 겨우 한 번이었다. 그런데 벌써 종이 위에서는 제법 오래된 흔적처럼 보였다.

여자는 자기 가슴을 짚었다.

"세리아."

이름만은 들렸다.

세리아는 종이의 붉은 줄을 짚었다. 이어 서준의 옷깃 안쪽 나무패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복도 너머의 큰 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손짓에 초대가 아니라 확인의 기색이 있었다.

르네가 창문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세리아는 잠시 그녀를 살폈다. 그러고는 작은 옆문을 열었다.

안쪽은 기록실이라기보다 종이 상자 속에 파묻힌 방이었다. 장부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고 가운데 책상에는 풀과 밀랍과 얇은 칼이 놓여 있었다. 창문은 하나뿐이었다. 복도 쪽 문에는 빗장이 달려 있었다.

서준은 문턱을 넘지 않았다.

세리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의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한 장은 얇고 새것 같았다. 방금 접수소에서 본 임시 등록지와 같은 종이였다. 다른 한 장은 누렇게 바랬고 가장자리가 거칠게 뜯겨 있었다. 검은 장부에서 억지로 떼어 낸 것처럼 보였다.

두 종이의 구석에는 같은 기호가 찍혀 있었다.

세리아가 그 기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음에는 붉게 얼룩진 부분을 가리켰다.

서준은 손바닥을 감쌌다.

마르코가 빵과 물값을 늘어놓던 탁자가 떠올랐다. 낯선 글을 앞에 두고 손을 내밀었던 순간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는 종이가 자신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다만 이 얼룩이 자신의 피나 인주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세리아는 작은 장부를 펼쳤다. 그 안에는 줄마다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몇 줄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서준의 이름 아래에도 붉은 선이 하나 있었다.

르네의 표정이 굳었다.

세리아는 서준을 가리킨 뒤 자기 입을 가리켰다. 이어 손바닥을 펼쳐 문 밖을 향했다. 마지막에는 종이를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여 누군가에게 내미는 흉내를 냈다.

서준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 서라는 뜻이었다. 손바닥과 목덜미를 보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어느 문을 지나왔는지 말하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 무엇이든 싫었다.

하역장에서는 입을 열려는 사람에게 줄이 더해졌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름을 불러 세웠다. 길드에서는 손바닥을 내밀자 목에 새 표식이 남았다.

여기서 자기 일을 더 말하면 무엇이 남을까.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세리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빠르게 몇 마디를 뱉었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르네는 끝부분만 들은 듯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그때 복도에서 막대가 벽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문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접수원 목소리도 섞였다. 말뜻은 모르지만 누군가가 기록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세리아가 입술을 다물었다.

르네는 서준의 손목을 잡아 장부 아래로 숨기려 했다. 그 손길이 거칠었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팔을 빼려다가 멈췄다.

문 아래 틈으로 그림자가 멎었다.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낯익은 억양이 섞였다. 하역장 감독이 인부들에게 내리던 짧고 딱딱한 소리였다.

서준의 등이 차가워졌다.

그들은 길드 패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남겨진 자기 흔적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세리아가 빗장을 걸었다.

문밖에서 손잡이가 한 번 돌아갔다. 빗장이 가볍게 울렸다. 르네는 책상 옆 좁은 틈을 가리켰다. 숨으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는 곳은 늘 더 깊은 곳이었다. 자루 밑에 숨었다가 하역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종이 더미 뒤로 들어가면 또 다른 장부에 이름이 묻힐 것 같았다.

세리아는 그를 보다가 장부 한 장을 재빨리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종이들은 평범한 접수 기록 사이에 섞었다.

문밖의 손잡이가 다시 움직였다.

세리아가 문을 손바닥 너비만큼 열었다. 서준은 틈 너머로 검은 장화를 봤다. 인부 하나가 서 있었다. 그의 손목에는 회색 끈이 묶여 있었고 패 뒤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은 서준에게도 있었다.

인부가 안쪽을 훑었다. 세리아는 손에 든 일반 접수 기록을 들어 보이며 빠르게 말했다. 인부는 종이를 빼앗아 몇 장 넘겼다. 그러더니 서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르네가 빈 물병을 발로 찼다.

병이 책상 다리와 부딪혀 굴러갔다. 인부의 시선이 소리 쪽으로 옮겨 갔다. 르네는 물병을 줍는 척 몸을 숙였다. 그 사이 세리아는 문을 닫고 빗장을 다시 걸었다.

막대가 문을 세게 쳤다.

서준은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든 누군가가 나무패를 들고 있었고 그 패는 사람을 가르고 밀어 넣었다.

세리아가 그를 향해 손을 폈다.

이번에는 장부가 아니었다. 손바닥 크기의 낡은 종이 조각이었다. 조각 한가운데에는 손바닥 모양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검은 줄이 이어졌고 끝에는 작은 상자 그림과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세리아는 손바닥 그림을 가리켰다. 다음에는 서준의 손을 봤다. 이어 화살표 끝을 두드렸다.

르네가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 살폈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책상 위의 뜯긴 장부 조각을 가리켰다. 손가락 두 개를 맞물렸다가 떼어 냈다.

원래 종이.

서준은 그렇게 짐작했다.

마르코가 내민 계약의 원본. 자신이 무엇을 갚아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찍었던 손도장의 원본.

세리아는 이번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흉내를 내지 않았다. 대신 종이 조각을 서준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짚고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거래를 하자는 얼굴이었다.

서준은 종이를 잡지 못했다.

증언을 하면 표적이 된다. 원본을 찾는다고 해도 길드와 하역장 양쪽의 장부를 건드리는 일이다. 세리아가 왜 그걸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녀가 문을 잠가 준 이유가 자신 때문인지 종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사진이 든 안주머니를 눌렀다.

사진 속 얼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걸 잃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선명했다. 다시 끌려가면 사진도 나무패도 자기 이름도 전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것이다.

서준은 세리아가 내민 손을 밀어 내지는 않았다. 대신 종이 조각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된다.

그 뜻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세리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예상했다는 얼굴에 가까웠다.

문밖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세리아는 소매 안에서 아까 숨긴 장부 조각을 꺼냈다. 그녀는 붉은 줄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맨 아래의 작은 기호에서 멈췄다.

기호는 둥근 단추 모양이었다. 마르코의 외투 깃에 달려 있던 금속 장식과 닮아 있었다.

세리아가 그 기호를 가리키고 서준의 얼굴을 봤다.

서준은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의 손이 멎었다.

증언은 거절했다.

하지만 종이 위의 붉은 줄은 이미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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