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당하고 주식으로 대박 났다

3화: 붉은 노이즈
"아뇨. 그 돈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통화가 끊긴 뒤에도 강현우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리지 않았다.
새벽의 원룸에는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낮게 울렸다. 현우는 통화 기록을 캡처하고 메모장을 열었다.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서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좋게 끝내자.]
좋게 끝내자는 말은 왜 늘 돈을 내놓으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까.
현우는 유리에게 보내려던 답장을 지웠다. 욕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감정이 담긴 문장은 상대에게 쓸모 있는 재료가 될 뿐이었다. 그는 통화 기록과 유리의 메시지를 증거 폴더에 옮긴 뒤 외장 메모리에도 복사했다.
거래 내역도 저장했다. 진입 시각과 청산 시각을 적고 수수료를 뺀 실현 손익을 확인했다. 잔고는 오천만 원을 조금 넘었다. 숫자는 분명했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은 없었다.
현우는 거래소 앱을 켰다.
비트코인 차트 위에는 여전히 붉은 선이 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급락 구간은 현재 캔들 뒤로 사라졌고 남은 선은 짧게 출렁였다. 이더리움으로 화면을 넘기자 전혀 다른 선이 나타났다. 큰 폭락 없이 오르내리는 파형이었다.
현우는 주문창을 열었다. 비트코인 주문 금액을 백만 원으로 입력하자 붉은 선은 그대로였다. 오백만 원으로 바꾸자 선의 중간이 아주 조금 위로 올라갔다. 오천만 원을 입력하는 순간에는 끝부분이 흐려졌다.
그는 금액을 지웠다.
미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시장에 돈을 밀어 넣으면 그 돈까지 포함한 미래가 다시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현우는 오전 아홉 시 삼십 분으로 법률 상담을 예약했다. 준석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가진 권리와 잃을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호텔 계단의 난간과 유리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그 장면 위로 붉은 선이 겹쳐졌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숫자를 봐야 했다. 숫자는 적어도 웃으면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법률사무소는 지하철역에서 두 블록 떨어진 건물에 있었다.
상담실 안의 박민석 변호사는 현우가 내민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보증금 송금 내역과 송금 메모, 유리와 주고받은 메시지, 부동산 중개인과 나눈 통화 기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체 금액은 총 천오백만 원이고 송금 메모에는 신혼집 계약금이라고 적혀 있네요."
"네. 계약금과 중도금 일부입니다. 유리도 제가 그 돈을 낸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은 유리합니다. 다만 계약서 명의가 서유리 씨라는 사실은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은 결혼을 전제로 한 증여였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증여라면 돌려받을 방법이 없습니까?"
"곧바로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대가 없이 준 돈인지 공동생활을 위해 분담한 돈인지가 쟁점입니다. 송금 메모와 두 분이 나눈 대화가 중요합니다."
박 변호사는 유리의 메시지에서 계약 명의를 편한 쪽으로 두자는 부분을 짚었다.
"이런 문장은 결혼 준비를 위한 분담금이었다는 정황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증명 하나로 돈이 바로 돌아오는 건 아닙니다. 상대가 버티면 민사 절차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까지 그는 억울하면 당연히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차트보다도 복잡했다.
"예식장 위약금도 같이 청구할 수 있습니까?"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합니다. 보증금 반환과 예식 취소 비용은 근거를 나눠 적으세요. 감정적인 표현은 빼고 금액과 기한을 명확히 하시면 됩니다."
박 변호사는 내용증명 초안을 열었다.
반환 요구 금액. 송금 일자. 송금 목적. 반환 기한. 불응할 경우 취할 절차.
현우의 모욕감이 다섯 줄의 숫자와 문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윤준석 씨가 만나자고 했습니다. 서유리 씨도 같이 나올 겁니다."
"합의서를 내밀 수 있습니다. 바로 서명하지 마세요. 추가 청구를 포기한다는 문장이 있으면 어떤 명목으로든 서명하면 안 됩니다."
"대화를 녹음해도 됩니까?"
"본인이 참여한 대화라면 기록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원본을 편집하지 말고 보관하세요."
현우는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확인했다.
상담이 끝날 무렵 박 변호사가 말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건 화가 난 상태로 큰 결정을 하는 겁니다. 상대에게 돈을 보여 주거나 협박성 말을 하시면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거래 화면의 경고문과 닮아 있었다. 예상 청산가에 닿으면 다시 생각할 기회가 없다는 문장.
"큰 결정은 이미 한 번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기준을 세우고 움직이겠습니다."
준석이 보낸 장소는 결혼식을 준비하던 호텔의 라운지였다.
창가 쪽 소파에는 준석과 유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유리는 현우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무엇을 말하는 거지?"
"오빠가 보증금 때문에 계속 일을 크게 만들잖아. 우리도 결혼이 깨져서 힘들어."
현우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건 준석 씨였는데."
준석이 유리의 말을 막으며 테이블 위에 얇은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감정적으로 굴지 맙시다. 서로 책임을 묻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면 됩니다."
"서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게 뭡니까?"
"이백만 원을 더 얹어서 오백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보증금과 예식 비용을 포함해 더는 청구하지 않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하세요."
유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한테는 큰돈이잖아. 이 정도면 서로 좋게 끝낼 수 있어."
현우는 봉투를 열었다. 첫 페이지 아래쪽에 굵은 문장이 있었다.
[본 합의 이후 당사자들은 민형사상 어떠한 청구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현우가 이미 오백만 원을 받았다는 문장까지 적혀 있었다. 현우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건 정산이 아니라 입막음이네요."
준석의 미소가 사라졌다.
"말이 심하군요. 현우 씨가 원하는 게 돈이면 돈을 주겠다는 겁니다."
"천오백만 원을 보냈는데 오백만 원을 받으라고요?"
"계약 명의는 유리입니다. 돈을 보냈다고 전부 돌려받는 건 아니죠.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같이 쓴 비용도 있고요."
현우의 시선이 준석에게 고정됐다.
"그 내역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준석은 잠깐 말을 멈췄다.
"유리에게 들었습니다."
"유리는 제가 보낸 금액이 천오백만 원이라는 말까지 했습니까?"
유리가 불쾌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게 지금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 계약을 정리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내 돈과 서류를 두고 이야기했다는 뜻이니까."
현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아래에 둔 채 녹음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작은 붉은 점이 떴다.
준석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현우 씨가 일을 키우면 곤란해집니다. 유리와의 관계를 회사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면 명예훼손으로 대응할 수도 있어요."
"사실을 말하는 게 명예훼손인지부터 확인해 보죠."
"지금 협박합니까?"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 상담한 변호사에게 내용증명 초안을 받았습니다. 천오백만 원의 반환과 결혼 비용 정산을 따로 요구하겠습니다."
유리의 얼굴이 굳었다.
"변호사까지 만났어?"
"너희가 먼저 합의서를 준비했잖아."
현우는 봉투를 준석 쪽으로 밀어 보냈다.
"이건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반환 기한은 내용증명에 적겠습니다. 돈을 돌려주고 정산 내역을 공개하면 그때 끝낼 일을 논의하죠."
준석이 종이를 움켜쥐었다.
"현우 씨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감당하지 못할 사람에게 왜 합의서를 들고 왔습니까?"
준석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현우는 그가 자신을 아직도 돈도 없고 변호사도 없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용증명은 오늘 보내겠습니다. 연락은 서류로 하세요."
유리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현우 오빠. 잠깐만."
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호텔 문이 닫히자 뒤에서 준석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자식이 뭘 믿고 저러는 거야."
호텔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현우는 방금 녹음한 파일을 원본 그대로 저장하고 내용증명 초안의 금액과 기한을 확인했다. 유리에게 보낼 메시지는 한 줄이면 충분했다.
[보증금 1,500만 원 및 결혼 비용 정산을 서면으로 요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용증명으로 보내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그는 택시를 기다리며 거래소 앱을 열었다.
비트코인 차트는 잠잠했다. 이더리움은 완만하게 위로 움직였다. 현우는 검색창에 며칠 전부터 호재가 돌던 가상 바이오 코인의 이름을 입력했다.
메디큐어 토큰의 차트가 열리는 순간 붉은 선이 나타났다.
현재가에서 조금 올라간 선은 가파르게 솟았다. 임상 결과가 곧 발표된다는 기사와 같았다. 그러나 스물네 시간 뒤를 향하는 끝부분에서 선은 갑자기 꺾였다. 이번 낙폭은 비트코인보다 깊었다.
현우는 주문창을 열고 수량을 아주 작게 입력했다.
붉은 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수량을 열 배로 늘리자 급락의 시작점이 몇 분 뒤로 밀렸다. 다시 열 배를 입력하자 선의 바닥이 흐려지며 끝부분에 붉은 점들이 번졌다.
현우는 주문을 모두 지웠다.
차트는 정답지가 아니었다. 시장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미래는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조급함도 시장을 건드리는 손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메디큐어 토큰의 차트를 캡처하고 메모장에 적었다.
[첫째. 거래 전 손실 기준을 정한다.]
[둘째. 주문은 나눈다.]
[셋째. 차트가 흔들리면 욕심부터 의심한다.]
현우는 휴대폰을 끄려다 차트 끝을 다시 바라봤다. 깊은 골짜기 주변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가느다란 붉은 노이즈가 미래의 표면을 긁은 것처럼 불규칙하게 번졌다.
노이즈 사이로 짧은 선 하나가 위로 튀었다가 곧장 아래로 꺾였다.
"이건 또 뭐야."
택시 문이 열렸지만 현우는 바로 타지 않았다. 박 변호사의 말과 준석의 표정이 차례로 스쳤다.
화가 난 상태로 큰 결정을 하지 않는다.
현우는 아직 주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