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을 깨부수고 돌아왔다

2화: 덮어씌우기
00:08:39.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강태현은 회색 화면을 가만히 보았다. 탑에서는 숫자가 줄어드는 순간을 수도 없이 봤다. 보스의 체력. 방어식의 내구도. 무너지는 성벽의 잔존 시간.
저것도 숫자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줄어드는 쪽이 적이 아니었다.
목구멍 안으로 미지근한 액체가 흘렀다. 삼키라는 몸의 명령은 느렸고 혀는 둔하게 식어 있었다. 들이마실 공기는 얇았다. 폐 바닥이 조금씩 찌그러지는 감각만 또렷했다.
태현은 공포를 밀어냈다.
공포는 판단을 늦춘다. 탑에서 배운 가장 값비싼 규칙이었다.
그는 회색 파형을 한 줄씩 좁혔다. 불규칙하게 뛰는 심박. 가슴께를 지나가는 산소 압력. 목으로 흘러드는 영양액의 속도. 후두부에서 시작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굵은 신경 접속선.
각각의 신호는 다른 장치에서 출발했지만 끝은 하나였다.
캡슐 옆면에 붙어 있을 관제 모듈.
그 모듈이 산소를 조절했다. 영양액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잠금은 단순히 뚜껑을 붙드는 장치가 아니었다. 신경 접속이 끊길 조건까지 함께 물고 있었다. 힘으로 문을 열면 접속선이 끊길 수 있었다. 의식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겠다고 뇌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비인가 접근 감지]
붉은 문장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태현은 지우듯 손을 저었다.
문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현실의 기기는 아카샤처럼 그의 생각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방향을 정해 줬다.
기계를 바로 바꾸지 못한다면 기계에 닿는 쪽부터 바꾼다.
아카샤에서 신위는 불꽃을 만들고 바위를 부수는 권능으로 보였다. 하지만 본질은 달랐다. 눈앞의 데이터가 무엇인지 읽고 그 상태를 다른 상태로 바꾸는 권한.
현실의 관제 모듈은 멀다.
그러나 자신에게 꽂힌 신경 접속선은 멀지 않았다.
태현은 푸른 룬 하나를 끌어냈다. 100층 신전에서라면 검 하나를 만들고도 남을 빛이었다. 지금은 실 한 가닥만큼 가늘었다.
그 빛을 자신의 뇌파에 밀어 넣었다.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 아팠다.
회색 파형이 푸른 선을 밀어냈다. 마치 두꺼운 유리벽에 이마를 부딪친 것 같았다. 뒤통수에서는 차가운 침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감각이 이어졌다.
[현실 기기 접근 불가]
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기기가 아니다.’
푸른 선을 다시 세웠다.
‘내 신경망이다.’
가상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지금 금속 관 안에서 버티는 의식을 붙들고 있는 것도 이 신호였다. 관제 모듈이 신호를 읽는다고 해서 주인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태현은 명령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회색 파형의 박자를 읽었다. 심장이 한번 수축할 때마다 접속선에 전류가 흐르는 시간. 영양액 펌프가 멎는 짧은 틈. 산소 압력이 바뀌는 간격.
그 틈에 생각을 겹쳤다.
푸른 선이 회색 신호 위에 포개졌다.
[신경 접속 상태: 유지]
문장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태현은 그 글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신경 접속 상태: 유지]
그 아래에 새 줄이 생겼다.
[운동 신경 우선권: 강태현]
딸깍.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척추 끝까지 금속의 진동이 전해졌다.
보조 래치 하나가 풀렸다.
태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가능하다.
그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신경 동기화 이상]
[안정화 절차를 시작합니다.]
목 오른쪽에서 냉기가 번졌다. 영양액 관과는 다른 선이었다. 차갑고 묵직한 무언가가 혈관을 향해 움직였다.
진정제.
관제 모듈은 그가 깨어나려는 순간을 이상으로 판단했다. 환자를 살피는 장치라면 경고부터 보냈을 것이다. 이 장치는 망설임 없이 그를 다시 재우려 했다.
태현은 주입기 회로를 찾았다.
손으로 관을 뽑을 수는 없었다. 몸은 아직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주입량을 0으로 바꾸는 것도 기기에 직접 명령하는 일이라 막혔다.
그는 한 단계 물러났다.
주입기는 약을 넣는 장치다. 지금 상태는 ‘주입 준비’다.
상태를 읽었다.
그리고 바꿨다.
[진정제 자동 주입: 준비]
푸른 빛이 한 글자씩 표면을 덮었다.
[진정제 자동 주입: 대기]
관 속의 냉기가 멎었다.
태현은 숨을 내쉬려 했지만 기침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단어 하나를 바꾸는 동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타는 듯했다.
신위는 공짜가 아니었다.
가상에서는 생각만으로 수문장의 갑각을 벗겼다. 현실에서는 접속선 하나를 비트는 데도 자신의 감각이 닳았다. 이 상태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00:04:26.
태현은 다음 회로를 살폈다.
캡슐 문은 세 겹으로 잠겨 있었다. 보조 래치는 이미 풀었다. 주 잠금은 관제 모듈의 인증을 요구했다. 마지막 안전 고리는 문이 열릴 때 산소관과 영양액 관이 빠지는 순서를 제어했다.
안전 고리를 건드리지 않고 문을 열면 관이 목과 팔에서 찢겨 나갈 수 있었다.
태현은 무감각한 육체를 억지로 느꼈다.
오른쪽 목. 영양액 관 하나.
왼팔 안쪽. 정맥 주입선 둘.
콧속 깊이. 산소관 하나.
후두부. 신경 접속선 하나.
누군가는 이 선들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태현에게 이 관들은 쇠사슬이었다.
그는 먼저 영양액 펌프의 속도를 낮췄다.
[순환 압력: 저하]
푸른 문장이 떠오른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10년 동안 멈춰 있었을 몸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손가락 끝에 티끌만 한 감각이 스쳤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
움직여라.
의식에서 전류가 흘렀다. 회색 벽에 부딪힌 신호가 흔들렸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현은 다시 명령했다.
움직여라.
이번에는 검지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몸을 얻었다고 부르기에도 모자란 반응이었다. 하지만 탑에서도 가장 높은 벽은 첫 번째 금이 갈 때 무너질 운명이 정해졌다.
그가 세 번째 명령을 준비하는 순간 회색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보관 자산 119번 안정화 조치 시행]
보관 자산.
태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문장은 온도를 갖고 있었다. 차갑고 건조했다.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남은 분류표의 온도.
수면 보관소.
그 이름도 이제 다르게 들렸다. 병실이 아니라 창고였다. 자신의 몸은 환자가 아니라 비용과 회수 효율을 따지는 물건이었다.
분노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태현은 분노를 힘으로 쓰지 않았다. 힘으로 쓰면 흔들린다. 그는 그 감정을 계산으로 눌렀다.
관제는 안정화를 원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정한 안정 상태를 관제에 보여 주면 된다.
그는 접속선의 신호를 다시 읽었다. 관제 모듈은 뇌파가 일정 범위에서 벗어나면 진정제를 주입하고 주 잠금을 강화한다. 반대로 신경 접속이 유지된 채 캡슐 내부 압력이 정상이라면 문을 여는 절차를 허용한다.
태현은 상태를 하나씩 바꿨다.
[영양액 순환: 정지]
[산소 공급: 유지]
[신경 접속: 유지]
마지막 줄에서 푸른 빛이 크게 흔들렸다.
후두부를 잡아당기는 감각이 찾아왔다. 접속선을 건드린 대가였다. 탑의 신전이 무너질 때도 이만큼 선명한 통증은 없었다. 눈앞의 푸른 하늘이 검게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끊지 않는다.
의식이 현실의 몸을 붙잡을 수 있도록 연결은 남긴다. 문이 열린 뒤에야 직접 뽑는다.
00:01:18.
주 잠금의 회색 선이 시야 가운데 떠올랐다.
[캡슐 주 잠금: 관리자 인증 필요]
이번에는 메시지를 지우지 않았다.
태현은 그 문장을 오래 봤다.
탑의 마지막 문도 비슷했다. 수문장의 피와 수십 개의 열쇠가 있어야 열린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문은 결국 규칙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규칙은 읽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면 바꿀 수 있다.
그는 신위를 접속선 깊은 곳으로 끌어내렸다.
푸른 룬이 하나씩 부서졌다. 빛은 회색 회로에 닿을 때마다 사라졌다. 태현의 의식도 함께 멀어졌다. 손끝에 생겼던 작은 감각마저 흐려졌다.
00:00:36.
태현은 마지막 빛을 움켜쥐었다.
‘관리자 인증.’
그가 조용히 생각했다.
‘권한을 확인한다.’
회색 화면이 흔들렸다.
어떤 장치가 그를 거부했다. 외부 관리자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벽은 신경 접속선을 통해 그의 의식에 닿아 있었다.
닿아 있다는 것은 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덮어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태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잠금 상태를 개방 상태로 덮어쓴다.’
푸른 빛이 회색 글자를 삼켰다.
[캡슐 주 잠금: 개방]
쿵.
금속 전체가 한 번 울렸다.
태현의 몸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밀폐된 공간 안의 압력이 바뀌었다. 이마 위 어딘가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들었다.
[관제 호출까지 00:00:12]
경고음이 캡슐 밖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신경을 타고 온 진동이 아니었다.
희미했지만 분명한 소리였다.
현실의 소리.
금속 문이 위쪽으로 한 뼘 열렸다.
어둠 사이로 낯선 공기가 흘러들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였다. 탑에서 수없이 맡았던 피와 불꽃과 비의 냄새가 아니었다. 먼지와 소독약, 오래된 금속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태현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려 했다.
아직 제대로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캡슐 바깥에 현실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