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을 깨부수고 돌아왔다

1화: 신이 된 순간
검은 거인의 가슴이 갈라졌다.
균열 사이로 흘러나온 빛이 신전 바닥을 핥았다. 타오르는 빛이 아니라 밤바다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빛이었다.
강태현은 무너지는 거인의 어깨를 밟고 더 높이 뛰었다.
수문장의 손이 뒤늦게 그를 움켜쥐려 했다. 손가락 하나가 성문만 했다. 손바닥 위에는 그가 지나온 아흔아홉 개 층의 문양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태현은 피하지 않았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허공에 푸른 선이 그어졌다. 선은 검이 되었고 수문장의 손목을 지나 가슴 한가운데까지 곧게 파고들었다.
쿵.
거인의 손이 신전 바닥에 떨어졌다. 백색 대리석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그 충격 속에서도 태현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슴 깊숙이 박힌 마력핵을 향해 몸을 날린 그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카각.
수문장의 심장부를 덮고 있던 검은 갑각이 벗겨졌다. 안쪽에서 뛰던 붉은 구체가 드러났다. 탑의 마지막 수문장을 지탱하는 핵이었다.
10년.
그 숫자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처음 탑에 떨어졌을 때의 공포도, 아래층에서 함께 올랐다가 사라진 얼굴들도 오래전에 모래처럼 닳아 있었다.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올라간다.
끝까지 올라간다.
태현이 붉은 구체를 움켜쥐었다.
수문장이 포효했다. 소리는 귀가 아니라 정신을 찢었다. 신전의 기둥이 부러지고 천장 너머의 가짜 하늘에 금이 갔다.
그래도 손은 놓이지 않았다.
“끝이다.”
태현의 손안에서 푸른 룬이 피어났다.
룬은 붉은 핵의 표면을 한 겹씩 벗겨 냈다. 방어식이 뜯겨 나가고 재생식이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심장 소리가 한 번 울렸다.
그 뒤에는 침묵만 남았다.
쩌적.
붉은 핵이 손가락 사이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검은 거인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산처럼 거대한 육체가 신전 바깥의 구름 바다로 떨어졌다. 추락하는 몸을 따라 수천 개의 검은 조각이 하늘로 흩어졌다.
태현은 무너지는 제단 위에 홀로 섰다.
잠시 후 하늘의 균열이 열렸다.
[튜토리얼 탑 100층을 공략했습니다.]
[최종 수문장 ‘무명왕’을 처치했습니다.]
[아카샤의 최상위 권한을 판정합니다.]
문자들은 거대한 빛의 띠가 되어 그를 감쌌다. 태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수없이 보아 온 보상창과는 다르게 빛의 밀도가 손에 잡힐 듯 진했다.
이곳에서 시스템은 언제나 보상보다 대가를 먼저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완등자 강태현을 유일 적합자로 승인합니다.]
[권한명: 신위(Godhood)]
[권한 범주: 데이터 재구성 / 원소 제어 / 창조 / 소멸]
[아카샤 전역의 우선 제어권을 부여합니다.]
빛이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태현의 시야가 한순간에 넓어졌다. 100층 신전의 돌 하나하나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보였다. 구름 바다 아래에서 움직이는 바람의 흐름도 보였다. 멀리 아흔아홉 층의 거대한 문이 닫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마력 회로가 잠드는 모습까지 선명했다.
그는 손을 들어 허공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푸른 불꽃이 태어났다. 불꽃은 곧 작은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가 그의 생각 하나에 따라 가느다란 검으로 바뀌었다. 검은 다시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권능은 거창한 선언이나 주문을 기다리지 않았다.
생각이 곧 명령이었다.
태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마침내 끝났다.
그 순간이었다.
목구멍 안으로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 왔다.
태현의 몸이 굳었다.
푸른 신전도, 구름도, 빛의 띠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혀끝에 닿은 감각만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금속 맛이 섞인 미지근한 액체였다.
그는 입을 다물려고 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액체가 넘어왔다. 이번에는 목 안쪽이 저리도록 차가웠다. 들이마셔야 할 공기가 없었다. 폐의 바닥이 천천히 주저앉는 느낌이 따라왔다.
[축하합니다.]
축하 문구 아래로 낯선 글자가 겹쳐 떠올랐다.
[산소 포화도 저하.]
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카샤는 감각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피 냄새도, 비의 온도도, 뼈가 부러질 때의 충격도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보는 없었다.
탑은 공략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도 남은 체력이나 산소량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시스템 오류인가.”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오른쪽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머리 안쪽에 꽂힌 차가운 바늘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어서 목덜미와 팔, 허리와 종아리에서 가느다란 통증이 번졌다.
태현은 본능적으로 신위를 펼쳤다.
세상이 멈췄다.
신전의 파편이 허공에 뜬 채 멎었다. 구름의 흐름도, 빛의 잔상도 멈췄다. 태현의 의식만이 끝없이 가라앉는 감각을 따라갔다.
손에 잡히는 정보는 아카샤의 데이터와 전혀 달랐다.
푸른 문자들 사이로 거친 회색 파형이 흘렀다. 일정하지 않은 심장 박동. 낮게 흔들리는 산소 수치. 유체 순환 압력. 신경 접속 유지율.
그것들은 전투 보조 수치가 아니었다.
생체 기록이었다.
[대상자: 강태현]
[신경 접속 상태: 유지]
[영양액 잔량: 3%]
[산소 공급 효율: 경고]
[장기 수면 경과: 3,842일]
태현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3,842일.
숫자를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해한 뒤에도 받아들이는 데는 더 오래 걸렸다.
열 해가 넘는 시간이었다.
탑 안에서 그가 세었던 계절은 열 번 남짓이었다. 그러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접속자에게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말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 말이 현실의 몸을 버려 둘 정도의 차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태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은 여전히 100층 신전이었다. 그러나 그 위로 겹친 회색 파형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선이 드러났다.
‘7구역. 수면 보관소.’
좌표처럼 짧은 기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름 없는 항목이 하나 더 있었다.
[유지 비용 대비 회수 효율: 기준 미달]
천천히 심장이 식었다.
그 문장은 너무 계산적이어서 오히려 선명했다. 누군가가 그의 몸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장부의 한 줄처럼.
태현은 접속 종료 명령을 찾았다.
아카샤의 기본 메뉴는 손짓 하나면 열렸다. 예전 같았으면 탑을 나가기 위해 수없이 들여다봤을 메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목록은 푸른 빛을 잃고 절반쯤 깨져 있었다.
[강제 종료: 권한 없음]
[현실 생체 연결: 외부 관리자 보호]
외부 관리자.
태현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신위를 얻은 완등자에게 강제 종료 권한이 없었다. 그보다 우선하는 무언가가 현실의 몸과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액체가 한 번 더 넘어왔다. 이번에는 삼키는 감각조차 흐릿했다. 몸 어딘가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그는 오래전 잊었던 몸을 떠올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왼쪽 무릎이 먼저 아팠다. 밤을 새우면 손끝이 저렸다. 차가운 캔 음료를 쥐면 손바닥에 물기가 맺혔다.
사소하고 쓸모없는 감각들이었다.
지금은 그 어떤 감각보다 절실했다.
움직일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면.
태현은 의식을 좁혔다. 신전도, 보상창도, 천장을 가르는 빛도 밀어냈다. 남은 것은 회색 파형과 그 뒤에 묻힌 자신의 신경 신호뿐이었다.
첫 번째 손가락.
그는 오른손 검지를 떠올렸다.
명령은 내려갔다. 의식의 끝에서 아주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그러나 그 전류는 무언가 단단한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팔의 근육은 응답하지 않았다.
[근육 반응: 미약]
[운동 신경 지연: 심각]
태현의 턱이 굳었다.
탑에서의 열 해 동안 그는 수없이 강해졌다. 맨손으로 갑옷을 찢었고 불길 속을 걸었고 마지막 수문장의 심장을 손으로 부쉈다.
그런데 현실의 그는 손가락 하나도 들지 못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태현은 그것을 억눌렀다. 화가 난다고 공기가 생기지는 않는다. 수문장을 상대할 때도 그랬다. 상대가 거대할수록 먼저 꺼내야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구조였다.
그는 회색 파형을 다시 읽었다.
영양액을 순환시키는 관. 산소를 밀어 넣는 미세 펌프. 심장 박동을 읽는 전극. 그리고 후두부에서 시작해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두꺼운 신경 접속선.
모든 선은 한 지점으로 모였다.
잠금장치였다.
정확히는 잠금장치의 관제 모듈이었다. 수면 관이 열리는 조건과 신경 접속을 유지하는 조건이 같은 회로 안에서 엉켜 있었다. 누군가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설계했을 법한 구조였다.
하지만 태현에게는 족쇄였다.
그는 신위를 통해 그 회로에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닿지 않았다.
아카샤의 데이터는 푸른 강물처럼 순순히 갈라졌다. 반면 회색 회로는 두꺼운 유리벽 너머에 있었다. 손을 댈수록 관자놀이의 통증이 깊어졌다.
[권한 충돌 감지]
[현실 기기 접근 불가]
태현은 메시지를 지웠다.
‘접근 불가’는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권한이 닿는 범위를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뇌파를 향해 신위를 되돌렸다. 아카샤에 접속한 의식은 가상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의식을 전달하는 선은 현실에 존재한다.
현실의 기기는 멀다.
하지만 자신에게 연결된 신경망은 멀지 않았다.
푸른 빛 하나가 회색 파형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신전이 흔들렸다.
아니, 신전이 아니라 다른 곳이 흔들렸다. 견고한 금속 상자 안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진동이었다. 태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신경 접속선을 통해 진동의 형태가 전해졌다.
딸깍.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태현은 확신했다.
잠금장치의 보조 래치가 움직였다.
회색 화면 한쪽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수면 보관소 7구역]
[캡슐 119번: 폐기 절차 대기]
[관제 호출까지 00:08:41]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태현은 푸른 룬을 손끝에 모았다. 탑을 무너뜨린 힘에 비하면 티끌만 한 빛이었다. 그 빛을 신경 접속선 가장 깊은 곳에 박아 넣었다.
“열려라.”
어둠 속에서 금속이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