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3화: 성당에서 온 조사관
아침을 알리는 세 번째 종소리가 지하 복도의 돌벽을 울렸다.
임시 격리실의 좁은 창틀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엷게 스며들었다. 이안 베르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오른쪽 소매를 조용히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에 새겨진 검은 선은 희미해졌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피부 아래로 맥박이 뛸 때마다 묵직한 냉기가 손끝을 스쳤다.
‘네 번의 박동.’
처음 세 번은 파편에서 울렸고 마지막 한 번은 자신의 손목에서 터져 나왔다. 바르칸이라는 이름이 남긴 기록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사라질 선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를 내렸다.
“조용히 해라. 밖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산 자의 발걸음은 늘 분주하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바르칸의 목소리는 비웃음조차 섞이지 않아 더 서늘했다. 이안은 대답을 삼켰다. 머릿속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들키는 순간 연구실 격리가 아니라 지하 감옥행이었다.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봉인감독관 베른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든 채 들어섰다. 뒤를 따라 야간 경비 토른이 지팡이를 비스듬히 세우고 섰다.
“이안 베르크. 성당에 보낼 최종 보고서 초안이다.”
베른이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맨 위에는 붉은색 결재 직인이 찍혀 있었다.
“사고의 원인은 조작 미숙으로 인한 공명판 과부하. 검은 장벽은 대마법사 고유의 미등록 방어 술식으로 기재했다.”
이안은 서류의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지상 감지판의 외부 응답과 삭제된 봉인층 기준선에 대한 내용은 빠졌군요.”
“그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설이다.”
베른이 차갑게 잘라 말했다.
“마도탑의 명예를 걸고 외부 기관에 불필요한 혼란을 줄 이유는 없다. 성당 놈들은 작은 틈만 보여도 마도탑의 연구실 전체를 뒤집어 놓으려 들 테니까.”
“파편이 가리킨 실금은 외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과부하가 아닙니다.”
“그걸 판단하는 건 자네가 아니라 감독관인 나다. 자네는 서명만 하면 돼.”
이안은 깃펜을 들지 않았다. 혼자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진실을 왜곡해 더 큰 재앙을 부르는 것까지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기록 보조관 하르트가 숨을 헐떡이며 문간에 나타났다.
“감, 감독관님! 성당에서 조사관이 도착했습니다!”
베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벌써? 요청서를 보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정문에서 대기하던 조사단이 즉각 진입했습니다. 마도탑 상층부에서도 통행을 허가했다고 합니다.”
베른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도탑의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토록 빠르게 내려왔다는 것은 성당이 이미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누가 왔지?”
“성당 이단심문 및 유물감정부 소속…… 세라 로웬 사제입니다.”
베른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로웬 가문인가. 귀찮은 자가 왔군.”
이안은 묵묵히 일어섰다. 로웬이라는 성은 마도탑의 역사서에서도 몇 번 스친 적이 있었다. 영웅전쟁 시절 성녀의 방계 혈통으로 전위에서 결계를 다루는 엄격한 치유사 가문이었다.
“현장으로 간다. 이안, 자네는 내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
베른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옷깃을 여미며 소매 안쪽의 봉인선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제3 봉인 연구실의 문이 열렸을 때 차가운 공기가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무너진 천장석과 뒤틀린 은선 사이로 하얀 망토를 두른 여성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금발 아래로 비치는 녹색 눈동자는 돌바닥에 박힌 봉인못을 하나씩 훑고 있었다. 경갑 위에 성당의 성표가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한 손에는 은빛으로 도금된 정화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성당 조사관 세라 로웬입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간결하게 목례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베른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마도탑 봉인감독관 베른입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현장은 보시다시피 내부 수식 충돌로 인한 경미한 파손입니다.”
세라는 베른의 손을 잡는 대신 바닥에 그어진 붉은 격리선을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경미한 파손치고는 마도탑의 비상 격리식이 세 겹이나 둘러쳐져 있군요.”
“유물 파편의 안전을 위한 통상적인 조치입니다.”
“통상적인 조치라기엔 방 안의 마나 찌꺼기가 너무 차갑습니다.”
세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군화가 깨진 돌조각을 밟을 때마다 바닥에서 맑은 은빛 파문이 번졌다.
세라는 검은 장벽이 세워졌던 자리 앞에 멈춰 섰다. 지팡이를 가볍게 내리치자 바닥의 돌 틈에서 검은 가루가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이건 원소 마법의 잔향이 아니에요.”
세라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불이나 번개로 인한 그을림이 아니라 마나 자체가 얼어붙어 굳어진 흔적입니다. 게다가 공간의 결을 억지로 붙들어 맨 흔적이 남아 있어요.”
베른이 기침을 하며 말을 가로막았다.
“연구원 이안 베르크가 위급 상황에서 펼친 응급 방어 결계입니다. 미등록 식이라 잔류 파동이 특이할 뿐입니다.”
“미등록 술식이 공간 균열을 통째로 닫았다는 뜻인가요?”
세라의 시선이 베른을 지나쳐 뒤에 서 있던 이안에게 닿았다.
차갑고 투명한 녹색 눈동자였다. 사적인 감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사실만을 확인하려는 조사관의 눈이었다.
“당신이 이안 베르크 마법사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안이 짧게 답했다.
“이 술식을 본인이 직접 전개했습니까?”
“연구실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가 시전했습니다.”
“어느 계통의 술식이죠? 마도탑의 비전서 어디에도 이런 형태의 암흑 결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위급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엮은 복합식입니다. 구조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안의 대답에 세라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설명할 수 없는 술식으로 봉인실의 균열을 막았다라.”
세라는 더 묻지 않고 이안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마도탑의 보고서만으로는 진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현장 당사자의 마나 회로를 직접 검정하겠습니다.”
베른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사제의 권한을 넘어서는 요구입니다. 마법사의 마나 회로는 개인의 비전입니다.”
“성당 헌장 제4조에 의거합니다. 미확인 고대 유물과의 접촉으로 오염이 의심되는 자는 성당 조사관의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세라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부하신다면 마도탑 전체를 오염 격리 구역으로 지정하고 본당에 기사단 파견을 요청하겠습니다.”
베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사단이 개입하는 순간 마도탑의 모든 봉인 연구는 전면 중단될 터였다.
베른은 이를 악물며 물러섰다.
“……좋습니다. 하지만 마나 핵을 손상시키는 과도한 정화식은 불허합니다.”
“원칙대로 진행합니다.”
세라는 이안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백합 향과 서늘한 쇳내가 섞여 풍겼다.
“이안 베르크 님. 오른손을 내미십시오.”
이안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오른손 손목 안쪽에는 지금도 검은 봉인선이 숨겨져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는 순간 표식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왼손으로는 안 됩니까?”
“주문 영창과 술식 방출을 담당하는 주 손을 검정해야 합니다. 오른손잡이시잖습니까.”
세라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안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되 소매가 손목 안쪽을 살짝 덮도록 손가락을 굳혔다.
세라가 가죽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이안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서늘하면서도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었다.
“성스러운 빛의 규율 아래 부정한 잔재를 밝힙니다.”
세라의 손끝에서 맑고 순수한 백색 마나가 피어올랐다.
빛은 이안의 피부를 타고 순식간에 팔꿈치를 거쳐 어깨와 가슴의 마나 핵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었지만 이안에게는 살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 순간 이안의 체내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크윽……!’
이안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삼켰다.
세라의 신성 마력이 들어오는 순간 소매 속 검은 봉인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단순한 거부 반응이 아니었다. 마치 수백 년 전부터 서로를 겨누던 숙적이 살을 맞댄 것처럼 극심한 반발력이 혈관을 찢을 듯 날뛰었다.
[경고: 외부 신성 파동이 봉인 기록을 자극합니다.]
[기록명: 마왕 바르칸의 잔향이 반응합니다.]
눈앞에 붉은 경고창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치워라.
바르칸의 거친 목소리가 이안의 귓전을 때렸다.
―그 계집의 손을 쳐내라! 저 빛은 껍데기만 남은 거짓이다!
‘닥쳐, 바르칸!’
이안은 온몸의 마력을 쥐어짜 검은 봉인선에서 터져 나오려는 냉기를 억눌렀다.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만약 여기서 마왕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세라는 물론이고 봉인실 안의 모든 사람이 즉각 적대자로 돌아설 터였다.
“……큭!”
이안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대마법사의 통제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세라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안의 손목을 잡은 채 굳어 있었다.
세라의 감각 속으로 들어온 것은 단순한 마나 고갈이나 내상이 아니었다. 이안의 마나 회로 깊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하고 차가운 암흑의 심연이었다.
그것은 악마의 피나 저주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단단한 규율로 직조된 고대의 파괴적인 권능이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어둠이 세라 자신의 신성 마력과 부딪히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완벽하게 서로의 궤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같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거나 검을 겨누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당신, 대체…….”
세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손을 떼려던 찰나 이안이 세라의 손목을 반대로 강하게 부여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안의 잿빛 눈동자 속에 푸른 불꽃과 검은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조사가 끝났다면 손을 놓으십시오, 사제님.”
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세라는 숨을 삼키며 손을 거두었다. 백색 마나가 흩어지고 이안의 소매 속에서 타오르던 열기도 간신히 잦아들었다.
연구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른이 긴장한 표정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로웬 사제. 결과는 어떻습니까? 오염입니까?”
세라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안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오염이 아니야.’
세라는 직감했다. 오염된 자는 이성을 잃고 마나를 폭주시킨다. 하지만 이 남자는 방금 그 무시무시한 어둠을 자신의 의지만으로 억눌렀다. 그것도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단 오염의 징후는 없습니다.”
베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보십시오. 단순한 피로 누적과 수식 반동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보고서대로—”
“하지만 정상적인 상태도 아닙니다.”
세라가 베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이안 베르크 마법사의 체내 마나는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외부의 특정 고대 파동과 강하게 결속되어 있어요. 이 상태에서 마도탑에 단독 구금하거나 징계 처분을 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사고는 연구실 내부의 과실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때 뒤편에서 조수 레미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의 품에는 어젯밤 작성한 유리판 사본이 안겨 있었다.
“조사관님. 이것도 확인해 주세요.”
베른이 노려보았지만 레미는 물러서지 않고 사본을 세라에게 내밀었다.
“선배가 계산판에 쓴 공식 사본이에요. 그리고 토른 경위님이 기록한 시간별 감지 반응도 적혀 있어요.”
토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기록지를 세라에게 건넸다.
“새벽에 감지된 보조 바늘의 반응 시각과 지하층 공명 간격이 일치합니다.”
세라는 유리판과 기록지를 받아 들고 빠르게 대조했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삭제된 180년 전 봉인층 기준선…… 그리고 세 번의 박동 뒤에 이어진 외부 신호라.”
세라가 바닥에 놓인 검은 파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지팡이 끝을 파편 표면의 지워진 왕관 문장에 가져다 댔다. 백색 빛이 문장을 비추자 어젯밤 이안이 확인했던 실금이 다시금 희미하게 떠올랐다.
실금은 북쪽 벽을 넘어 더 깊은 지하를 향해 뻗어 있었다.
“이 선의 방향을 보십시오.”
세라가 지팡이로 벽을 가리켰다.
“이 신호는 마도탑 지하에서 맴도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 아르덴의 옛 지하 배수로…… 영웅전쟁 시절 폐쇄된 지하 구역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지판에 잡힌 파동의 종착점도 그 부근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세라가 뒤를 돌아보며 선언했다.
“성당은 이 사건을 ‘고대 봉인 연쇄 반응’으로 규정합니다. 파편과 공명한 당사자인 이안 베르크 마법사는 제가 직접 동행하여 현장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베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안은 마도탑 소속입니다! 외부 조사를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즉시 본당의 정화 기사단을 불러 마도탑 지하 전체를 압수수색할까요?”
세라의 서늘한 반문에 베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도탑의 치부를 드러내느니 조사관 한 명에게 마법사를 딸려 보내는 편이 상층부를 설득하기 쉬웠다.
세라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안 베르크 님. 제 감시 아래에서 저 실금의 끝을 확인하러 가시겠습니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자신 안에 웅크린 어둠을 숨기기 위해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확인할 것인가.
이안은 잉크 묻은 장갑을 고쳐 쥐었다. 소매 속 손목의 검은 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당의 감시를 받는 것은 목에 칼을 대고 걷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하 격리실에 갇혀 진실을 묻어두는 것보다는 칼날 위를 걷는 편이 나았다.
“가겠습니다.”
이안의 대답에 세라의 눈매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준비하십시오. 수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녀가 망토를 펄럭이며 연구실을 나섰다.
이안은 파편을 응시했다. 왕관 문장 아래에서 가느다랗게 뛰는 실금이 마치 새로운 길을 가리키는 듯했다.
머릿속의 바르칸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러나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성당의 눈이 닿는 곳으로 향하는 순간 자신이 품은 비밀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안은 묵묵히 지팡이를 챙겨 세라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