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1화: 봉인실에 뜬 마왕
봉인석 파편이 세 번째로 맥박을 쳤다.
이안 베르크는 계산판 위의 수식을 지웠다. 마력량은 허용 범위 안이었다. 유리 덮개 속 검은 파편만은 심장처럼 빛을 토해 냈다.
“레미. 외곽 고정못부터 빼.”
“지금요? 공명식은 아직 절반도 안 끝났어요.”
“그래서 지금이다.”
조수 레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닥의 은선이 위로 들렸다. 은선은 고정식이 아니라 얇은 칼날처럼 휘어 있었다.
봉인실의 돌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이안은 손을 뻗어 공중에 다섯 겹의 마력막을 세웠다. 푸른 막이 파편을 둘러쌌지만 첫 충격에 두 겹이 찢겼다.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검은 파편의 마력은 결계에 부딪히지 않고 바닥의 균열을 타고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가받지 않은 층위까지 공명식을 밀어 넣은 건 자신이었다. 파편 안에 남은 기록을 조금만 더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계산이 틀렸다.
이안은 분석대를 발로 밀어 파편에서 멀리 보냈다. 기록을 읽기 위해 그어 둔 보조 원들이 차례로 꺼졌다. 보통이라면 이 정도 조치면 공명은 약해져야 했다.
그러나 파편은 꺼진 원의 빈자리를 더듬었다. 마치 처음부터 연구실의 술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안은 봉인판 중앙의 붉은 수정이 금 가는 모습을 보았다. 저것이 부서지면 지하층 전체를 봉하는 비상문이 닫힌다.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해질지 몰라도 그 안에 갇힌 채 마력이 바닥날 수 있었다.
그는 비상 봉인을 선택하지 않았다.
“출구로 가.”
“선배는요?”
“난 봉인판을 끈다.”
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등이 하나씩 꺼지며 연구실 전체가 검게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파편이 한 번 더 뛰었다.
이번에는 천장이 내려앉았다.
이안은 역위상 고정식을 펼쳤다. 무너지는 돌이 공중에서 멎었다. 손끝으로 수십 개의 마력선을 붙들었지만 파편에서 밀려 나오는 압력은 계속 균열을 넓혔다.
그것은 폭발이 아니었다.
공간의 결을 더듬으며 봉인실 밖의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레미, 지금!”
레미가 이를 깨물고 고정못으로 달렸다. 그때 복도에서 경보 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출입문이 열리며 야간 경비 마법사 토른이 뛰어들었다.
“공명 경보가 왜 지하에서 울립니까!”
“문 닫아! 안으로 들어오지 마!”
경고는 늦었다. 파편에서 뻗은 검은 실이 토른의 발목을 감았다. 토른이 빛의 칼날을 날렸지만 술식은 실을 스치고 흩어졌다.
검은 실은 실체가 아니었다. 균열 너머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였다.
이안의 결계가 세 번째로 깨졌다.
그 순간 시야 한복판에 낯선 글자가 떠올랐다.
[전직 상태창이 공명합니다.]
[기록명: 마왕 바르칸]
[동기화 가능 기술: 흑벽의 잔향]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토른도 레미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둘의 시선은 오직 파편과 무너지는 천장에 꽂혀 있었다.
‘환각인가.’
환각을 따질 만큼 봉인실은 한가하지 않았다. 천장석 하나가 레미 쪽으로 떨어졌다. 이안은 손을 뻗었지만 손끝의 마력은 균열에 삼켜졌다.
[사용자의 허용이 필요합니다.]
“누구지?”
대답은 글자가 아니라 목소리로 돌아왔다.
낮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귓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렸다.
―네가 먼저 문을 건드렸다.
이안은 파편을 노려봤다. “열 생각은 없었다.”
―산 자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늘 그렇게 말한다.
돌이 떨어졌다.
이안은 망설일 시간을 재지 않았다. 레미까지 세 걸음. 남은 결계 한 겹. 자기 마력으로 균열을 막으려면 고정식을 버텨 낼 사람부터 위험해진다.
“허용하면 넌 뭘 가져가지?”
―지금의 너에게서 가져갈 것은 없다.
“그 대답은 믿기 어렵군.”
―믿지 마라. 선택만 해라.
바르칸의 목소리는 도움을 권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들렸다.
하지만 레미가 고정못 앞에서 발을 헛디뎠다. 토른은 검은 실에 붙잡힌 발목을 뺄 수 없었다.
이안은 타인의 목숨보다 자신의 의심을 앞세울 수 없었다.
“흑벽의 잔향. 한 번만 쓴다.”
검은 글자가 그의 손목을 스쳤다.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차가운 감각이 팔을 타고 올랐다. 고통은 없었다. 대신 아주 오래전 무너진 성벽 앞에 섰던 누군가의 감각이 손바닥에 얹혔다.
무엇을 막을지 정한다.
그 앞에 선다.
그것뿐이었다.
이안은 두 손을 맞댔다.
“흑벽.”
검은 장벽이 봉인실 한가운데에 솟았다.
장벽은 돌을 부수지 않았다. 떨어지는 천장석을 조용히 받아 냈다. 파편에서 터진 검은 실도 벽에 닿자 잉크처럼 번지다가 멈췄다.
균열은 장벽 앞으로 몰려들었다. 푸른 결계가 하지 못한 일이었다. 흑벽은 공간을 밀어내지 않았다. 빠져나갈 자리를 잃은 균열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닫아 버렸다.
이안은 술식의 흐름을 따라가려 했지만 손끝에서 잡히는 공식이 없었다. 흑벽은 그의 마력회로를 빌려 움직이면서도 어느 계통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래된 돌벽처럼 단순한데 그 단순함 안에 그가 알지 못하는 규칙이 숨어 있었다.
파편이 마지막으로 떨었다. 장벽 한쪽에 검은 파문이 번지며 바르칸의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벽을 얇게 만들지 마라.
이안은 반사적으로 마력을 밀어 넣으려던 손을 멈췄다. 말대로 장벽을 더 넓히는 대신 아래쪽을 단단히 고정했다. 직후 천장석이 떨어졌고 검은 벽은 흔들렸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내 판단이 아니라 저 목소리를 따른 셈인가.’
불쾌했지만 그 한마디가 레미가 있는 쪽의 공간을 지켰다.
토른의 발목을 감았던 실이 끊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레미, 고정못!”
“네!”
레미가 마지막 못에 지팡이를 꽂았다. 은선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파편 주위에 작은 원을 만들었다.
이안은 장벽을 유지한 채 숨을 들이켰다. 낯선 술식은 그의 마력을 먹지 않았다. 대신 손목 안쪽을 천천히 조여 왔다.
검은 선 하나가 피부 위에 그어졌다.
“선배. 방금 그건 무슨 술식이에요?”
레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모른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안은 이 술식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흑벽은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그의 지식 밖에 있었다.
토른이 지팡이를 세웠다. “마도탑에 등록되지 않은 술식입니다. 그 검은 벽도, 손목의 표식도 전부 보고하겠습니다.”
이안은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가렸다. “보고하십시오.”
“변명할 생각은 없군요.”
“오늘 사고는 제 실험에서 시작됐습니다. 책임도 제가 집니다.”
레미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에요. 고정못 교체를 미룬 것도 저예요.”
“그건 나중에 따지자.”
이안은 레미의 손목을 확인했다. 가벼운 긁힘 외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토른의 발목에도 검은 실이 남긴 냉기가 맴돌았지만 뼈가 상한 기색은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셋 모두 비상 봉인 안에 갇혔거나 균열에 휩쓸렸을 것이다.
토른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다만 무너진 천장과 레미를 한 번 보고 지팡이를 내렸다.
“봉인판은 당분간 경비대가 관리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파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 판단은 믿어도 됩니까?”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판단이 이 지경을 만들었다. 그 사실이 목을 눌렀다. 그는 대신 파편 쪽으로 다가가 남은 마력의 흐름을 살폈다.
“토른 경위님. 경보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당연히 남습니다.”
“처음 울린 시각과 지상 감지판 반응을 따로 보관해 주십시오. 파편이 다른 지점과 공명했다면 이 방의 기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토른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의 소매 속에 가려진 손목을 한 번 보고서야 말했다.
“당신이 증거를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손대지 않겠습니다.”
그 약속만은 지킬 수 있었다. 손대지 않고도 확인할 방법은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편을 더 자극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나온 흔적을 읽는 일이었다.
검은 장벽이 꺼진 자리에서 파편의 표면이 얇게 벗겨져 있었다.
먼지 아래로 왕관 문장이 드러났다.
왕관의 가운데는 칼날로 긁어 낸 듯 지워져 있었다. 이안이 손을 가까이 대자 문장 아래에 실금 하나가 빛났다.
실금은 봉인실 바깥을 향해 곧게 뻗었다.
그리고 끝에서 아주 약한 공명이 돌아왔다.
파편 하나의 잔재가 아니었다. 이곳과 연결된 다른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다는 신호였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선을 따라가지 마라.
“왜지?”
―아직 네가 감당할 문이 아니다.
“그 문이 뭔지는 알고 있나?”
잠시 대답이 없었다.
―네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봉인이다.
이안의 시선이 소매 속 손목으로 내려갔다. 검은 선이 맥박처럼 한 번 뛰었다.
바르칸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 봉인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방금 사람들을 살린 힘과 균열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파편 앞에 무릎을 꿇고 실금의 좌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문이 무엇이든 봉인실 바깥에 두지는 않겠다.
그 결심만은 낯선 목소리에게 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