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11화: 목을 치면 장부가 말을 못 합니다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지만 특별 행정 감찰단 사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탁자 위에는 지난밤 중앙 문서고에서 압수한 증거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로잘린이 만든 가짜 미끼 보고서.
이사벨이 진짜 장부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던 정정표.
그리고 재무부 예산조정국장의 직인이 찍힌 서류들이었다.
"단장님, 밤새 대조 작업을 끝낸 문서들입니다."
에드먼드가 눈가를 비비며 서류철 세 권을 내려놓았다. 비록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로잘린이 정해 둔 회복 시간 지침 덕분에 새벽 서너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온 덕분이었다.
"고생했어요, 에드먼드. 어디부터 확인했습니까?"
"이사벨 국장이 소매에 숨겼던 정정표의 지질과 잉크입니다."
이안이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정정표에 사용된 종이는 일반 재무부 규격이 아닙니다. 황실 중앙재무부 수석국장실과 군무부 보급국장실에만 극소량 지급되는 청록색 은박 압인용지입니다. 잉크 역시 북부 전선 직할 보급소에서만 쓰는 내수성 먹물이고요."
로잘린의 입가에 서늘한 호선이 걸렸다.
"즉, 이사벨 국장 개인이 독단으로 위조한 게 아니라 상층부의 결재 라인에서 흘러나온 문서라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베인 백작이나 케일 후작의 승인 없이 일개 국장이 구할 수 없는 물품들입니다."
에드먼드가 조심스럽게 다른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종이 울리자마자 베인 백작실에서 올린 긴급 공문입니다."
공문의 제목을 확인한 로잘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재무부 예산조정국장 이사벨 드 몬테르의 개인 비위 및 문서 무단 열람에 대한 감찰 의뢰서.
베인 백작은 벌써 꼬리를 자를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사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책임을 그녀의 개인적인 일탈로 몰아가려는 속셈이었다.
"정오에 폐하께서 직접 심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칼릭스 폐하의 성정상 이사벨 국장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삼으려 하실 텐데요."
에드먼드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황제의 광기와 폭력성은 황궁의 모든 문관들에게 살아있는 공포였다.
"목을 치면 모든 게 끝납니다. 베인 백작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로잘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거가 입을 열기 전에 사람이 먼저 죽으면 썩은 뿌리는 땅속에 그대로 남습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이사벨 국장을 먼저 만나 보죠."
감찰단 지하 조사 대기실은 어둡고 조용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이사벨 드 몬테르는 문이 열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제복의 깃은 구겨졌고 화려했던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오만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감찰단장님. 건국 공신 가문인 몬테르의 직계 귀족을 이런 누추한 곳에 가둬 두다니, 황실 법도를 잊으신 겁니까?"
"법도를 어기고 봉인된 보관함을 부순 건 국장님이셨을 텐데요."
로잘린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안이 그 뒤에 서서 기록용 깃펜을 들었다.
"흥, 가짜 숫자로 함정을 판 건 그쪽입니다. F-19니 1,847은화니 하는 조작된 정보로 관료를 기망한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재무부 수석국장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요."
"베인 백작을 믿고 계시는군요."
로잘린은 품에서 아침에 도착한 공문을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이걸 읽고도 같은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네요."
이사벨은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빠르게 활자를 훑어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베인 백작이 폐하께 올린 탄원서입니다. 이사벨 국장이 평소 과도한 공명심에 눈이 멀어 독단으로 문서를 조작하려 했으니, 황실의 기강을 위해 즉결 처분해 달라고 청원했더군요."
"거짓말! 백작님께서 그러실 리가……!"
"국장님이 쓰려 했던 정정표의 종이와 잉크, 전부 백작실 직속 보급품이었습니다. 백작은 국장님께 모든 지시를 구두로 내렸고 서류에는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죠. 국장님이 잡힌 이상 당신은 가문의 자랑이 아니라 버려야 할 꼬리일 뿐입니다."
로잘린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고 그 차분함이 이사벨의 심장을 더 깊게 죄어들었다.
"정오가 되면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십니다. 폐하가 어떤 분인지 국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그분이 반역과 횡령 혐의를 받는 죄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실 것 같습니까?"
이사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날…… 죽이실 건가요?"
"제가 아니라 폐하의 칼날이 국장님의 목을 겨눌 겁니다. 그리고 국장님이 침묵한 채 목이 잘리면 베인 백작과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라진 3년 치 예산을 영원히 덮어버리겠죠."
로잘린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선택하세요, 이사벨 국장님. 귀족 가문의 허울 좋은 명예를 지키며 혼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장부를 열어 스스로의 목숨을 구할 것인지."
이사벨은 핏기 없는 얼굴로 공문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정오를 알리는 황궁의 대종이 울려 퍼졌다.
감찰단 대회의실의 무거운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압도적인 마력과 함께 황제 칼릭스 에스토반 반 크로이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제복 위로 붉은 망토를 두른 그의 붉은 눈동자는 형형한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시종장 마르셀과 근위대,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겠다며 뻔뻔하게 따라붙은 베인 백작과 케일 후작이 따르고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잘린과 감찰단원들이 예를 갖추었지만 칼릭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곧장 탁자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사벨에게 꽂혔다.
"네년이 감히 짐의 황궁에서 장부를 빼돌리고 감찰을 방해했느냐."
서늘한 음성이 회의실을 울렸다.
칼릭스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대리석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는 듯 묵직한 압박감이 내려앉았다.
베인 백작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폐하! 이사벨 국장의 죄는 명백한 황권 도전이자 배임 행위입니다. 황실의 위엄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더 들을 것 없이 즉결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효수하심이 마땅합니다!"
케일 후작 역시 거들었다.
"군무부와 재무부의 명예를 더럽힌 죄인입니다. 즉시 목을 베어 기강을 잡으셔야 합니다!"
두 귀족 관료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함께 이사벨의 입을 서둘러 막으려는 잔인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칼릭스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기강이라. 좋은 말이지."
채앵!
칼릭스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칠흑 같은 마력이 칼날을 따라 번뜩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칼릭스는 그대로 검을 들어 이사벨의 가녀린 목덜미에 바짝 갖다 댔다.
"감히 짐의 눈을 속이려 든 대가는 오직 피뿐이다."
서슬 퍼런 칼날에 살갗이 살짝 베이며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이사벨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검을 거두십시오, 폐하."
단호하고 맑은 목소리가 살기 가득한 침묵을 찢었다.
로잘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나와 칼릭스의 검날 바로 앞을 가로막아 섰다.
"로잘린."
칼릭스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마력이 일렁이며 로잘린의 갈색 머리칼을 거칠게 흩날렸다.
"비켜라. 짐의 명령을 거스르는 죄인을 처단하는 것이다."
"지금 목을 치시면 안 됩니다."
로잘린은 칼릭스의 살기등등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목을 치면 장부가 말을 못 합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 굳어버렸다.
베인 백작의 낯빛이 파랗게 질려갔다.
"장부가 말을 못 한다고?"
칼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예, 폐하. 지금 이사벨 국장의 목을 베면 과연 누가 가장 기뻐하겠습니까? 황실 기강을 운운하며 즉결 처형을 재촉하는 바로 저분들입니다."
로잘린은 뒤편에 선 베인 백작과 케일 후작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사벨 국장이 숨기려 했던 정정표는 백작실과 보급국장의 전용 압인용지와 잉크로 작성되었습니다. 일개 국장이 혼자 벌인 일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여기서 국장의 목을 자르면 꼬리만 잘려 나가고 지난 3년 동안 제국의 혈세를 갉아먹은 몸통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숨어버릴 것입니다."
"감찰단장! 감히 무슨 해괴한 모함을……!"
베인 백작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지만 로잘린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안 부단장, 대조표를 올리세요."
"예."
이안이 신속하게 서류들을 칼릭스의 앞에 펼쳤다.
"북부 보급 장부의 누락액 1,847은화와 지난 3년간 재무부 수석국장실의 결재 지연 통계입니다. 이사벨 국장은 상부의 압박을 받아 미끼 숫자를 진짜 장부에 끼워 넣으려다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피를 흘려 공포로 다스리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라진 국고를 단 한 닢도 되찾지 못합니다."
로잘린은 칼릭스를 응시하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검날과 그녀의 가슴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제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확한 장부와 제도입니다. 숫자로 죄를 증명하고 법으로 환수해야만 진정한 황권이 바로 섭니다. 그러니 검을 거두시고 이사벨 국장의 입을 열게 하십시오."
정적 속에서 오직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칼릭스는 로잘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황제에 대한 두려움도, 귀족들에 대한 타협도 없었다. 오직 흐트러짐 없는 원칙과 자신이 짊어진 일에 대한 지독한 완벽주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의 마력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너는……."
칼릭스는 낮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짐의 칼을 멈추는군."
챠르륵.
칼릭스가 검을 거두어 칼집에 밀어 넣었다. 묵직한 쇠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지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문관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칼릭스는 차가운 눈으로 이사벨을 내려다보았다.
"감찰단장의 질문에 단 한 글자라도 거짓을 고한다면, 네년뿐만 아니라 몬테르 가문 전체의 목을 벨 것이다. 말해라. 누구의 지시였느냐."
황제의 서슬 퍼런 추궁에 이사벨은 마침내 바닥에 엎드리며 오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인 백작님이십니다……! 백작님께서 군무부 보급 창고와 결탁하여 비자금을 세탁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진짜 장부는 백작님의 저택 비밀 금고와 제3 문서고 지하 벽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이 망발을……! 저 요망한 계집이 살기 위해 거짓을 꾸며내는 것입니다, 폐하!"
베인 백작이 거품을 물며 소리쳤지만 이미 판세는 기울어 있었다.
"마르셀."
칼릭스의 짧은 부름에 시종장이 즉시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근위대를 보내 베인 백작의 저택과 제3 문서고 지하를 봉인해라. 단 하나의 먼지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근위병들이 베인 백작과 케일 후작의 앞을 가로막아서자 두 귀족 관료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로잘린은 이안과 에드먼드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지시했다.
"이사벨 국장의 모든 진술을 한 자도 빠짐없이 녹취하세요. 진짜 장부가 확보되는 대로 재무부 전면 재감찰과 개편안 작성에 착수합니다."
"예, 단장님!"
에드먼드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쳐흘렀다.
폭풍 같은 심문이 끝나고 소회의실에는 로잘린과 칼릭스 둘만이 남았다.
창밖에서는 근위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린은 피로가 몰려오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었다.
"오늘도 제 명을 줄이는 줄 알았습니다, 폐하."
칼릭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갈무리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짐의 칼날 앞에 선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다, 로잘린."
"다음에는 제발 검부터 뽑지 마십시오. 칼로 위협하면 겁을 먹어 진실을 말할 사람도 혀를 깨뭅니다."
"네가 막지 않았다면 짐은 저 계집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리고 썩은 관료들은 또다시 숨어들었겠지."
칼릭스는 로잘린의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몸을 낮췄다. 서늘한 마력 향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너는 언제나 옳다. 그래서…… 네가 더 두렵군."
"제가 왜 두려우십니까?"
"네가 만든 제국이 완벽해질수록, 짐의 곁에 네가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니까."
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고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국의 절대 권력자라 불리는 사내가 오직 한 사람의 부재를 두려워하며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잘린은 한숨을 작게 내쉬며 서류를 정리했다.
"폐하께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셔야 제가 안심하고 사표를 낼 수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폭군 밑에서 일하고 싶은 직원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사표라니. 짐은 아직 결재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결재하셔야 할 겁니다."
로잘린은 단정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반투명한 푸른빛 알림창이 떠올랐다.
[경고: 원작 멸망 루트 이탈률이 3.4% 상승했습니다.]
[알림: 주요 적대자 '이사벨 드 몬테르'의 생존 및 협력 전환 루트가 개방되었습니다.]
[주의: 남주인공 '칼릭스'의 집착 수치가 통제 불능 영역에 근접 중입니다.]
로잘린은 가볍게 눈을 깜빡여 시스템 창을 지워버렸다.
원작이 어떻게 비틀리든, 집착 수치가 얼마나 오르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고 제국의 거대한 부패 하나를 도려낼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잘린은 문을 열고 나가는 칼릭스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덧붙였다.
'조금씩 칼을 거두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살아서 퇴사하기 위한 길은 여전히 멀고 험했지만 적어도 제국도 상사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집어 들고 재무부 개편안의 첫 머릿글을 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