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12화 [잠긴 문]
F-Class 강의동의 낡은 복도는 아침부터 사람으로 막혀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청강생이 모였다. 누군가는 루나의 점화 스크롤을 보러 왔고 누군가는 카이드가 남긴 검로를 보러 왔다. 하리의 가문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알아본 귀족 학생들은 창가에까지 붙어서 수군거렸다.
복도 끝 계단에는 실습용 양피지를 든 마학과 학생들까지 줄을 섰다. 저마다 루나가 그렸다는 세 줄짜리 수식을 받아 적겠다며 창문 틈으로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켜 봐. 정말 마력이 안 드는지 보게."
"카이드는 목검으로 해 봐. 어제 그 검로 말이야."
"하리 양도 보호막을 보여 주시죠. 로젠가의 후계자가 F-Class에 남았다던데."
루나는 손바닥만 한 막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보지 않았다. 전날 점화 스크롤은 점화 등잔의 기름 결손과 실습대의 습도, 잉크의 번짐이 간신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같은 모양을 그린다고 다시 불이 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것을 설명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록의 빈칸이 아니라 눈앞에서 터지는 푸른 불꽃이었다.
"기록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재현할 수 없어요."
낮은 대답에 창밖에서 웃음이 흘렀다.
"성공한 건 맞아?"
"종이를 태운 걸 대단한 발견처럼 떠드는군."
하리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솟았다. 창문 쪽으로 작은 보호막을 세우려던 그는 곧 손을 멈췄다. 구경꾼을 막으려 마력을 쓰는 것은 자신이 연습하던 흐름 이전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손끝에 모였던 빛이 허공에서 가늘게 풀어졌다.
카이드도 목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가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의 굳은살 아래가 욱신거렸다. 문 밖의 목소리를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은 손목을 몰아붙이던 예전 습관과 닮아 있었다.
그때 긴 의자에 누워 있던 에신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밤새 이어진 소음 탓인지 얼굴빛이 창백했다. 그는 창문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헤르만은 어디 있지."
"본관에 보고서를 내러 갔습니다."
루나가 대답했다.
"마학부의 셀레네 바이스 교수님도 보고서를 읽으셨다고 했어요. 최소 작동식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싶다고요."
에신의 손가락이 관자놀이에서 멈췄다.
마학 교수까지 관심을 보인다는 말은 조금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질문을 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서류를 만든다. 서류는 결국 사람을 찾아온다.
'잠깐 종이를 태웠을 뿐인데 귀찮은 인간들이 줄을 서는군.'
강의동 문이 열리며 헤르만 보조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두꺼운 문서철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걸음에는 흥분이 묻어 있었다.
"루드윅 교수님. 좋은 소식입니다. 본관에서 최소 작동식의 공개 재현 가능성을 문의했습니다. 오늘 오후에만 마학과 학생들이..."
"안 된다."
에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동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헤르만이 당황해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F-Class의 성과를 공식적으로 알릴 기회입니다. 학생들도 그동안 받은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오늘의 시연은 기록으로 남겨야..."
"시끄럽다."
에신은 문을 닫았다. 낡은 문짝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문밖에서 놀란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에신은 허리춤 열쇠를 꺼내 한 번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빗장이 잠겼다.
"교수님? 안에 계십니까?"
"루나 학생에게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에신은 근처 책상에서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는 깃펜으로 짧게 적었다.
[청강 금지. 노크 금지. 질문 금지.]
종이를 문에 붙인 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은 아무도 안 받는다. 너희도 밖에서 보여 주려고 뭘 하지 마."
헤르만이 문서철을 든 손을 내렸다. 세 학생 역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에신은 그 침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긴 의자로 돌아가 옷자락을 얼굴 위에 덮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하리는 문에 붙은 종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본가에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도 사람들은 안전과 평판을 이유로 하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 주려 했다. 이제는 아카데미의 학생들까지 성공이라는 말을 앞세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수업을 누가 볼지까지 우리가 정하라는 뜻이군요."
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드는 잠긴 문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밖의 비웃음은 나무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들렸다. 문을 열고 검을 휘두른다면 그들은 다시 자신의 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오늘은 다섯 번만 하겠습니다."
카이드가 목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바닥도 아직 덜 나았고요.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보여 주려고 열 번을 채우면 또 검을 망칠 겁니다."
루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점화하지 않을래요. 종이가 어떤 때에 망가지는지부터 적겠습니다. 불꽃이 나온 조건만 적어 두면 다음엔 우연을 재현이라고 착각할 수 있어요."
하리도 창문에서 등을 돌렸다.
"저는 첫 막을 세웠다가 두 번째 막으로 넘기는 것만 하겠습니다. 오래 버티지는 않겠습니다."
헤르만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잠긴 문과 짧은 경고문이 그들에게 어떤 결심을 만들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구경꾼이 사라진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호흡이 전보다 고르게 가라앉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말없이 문서철을 닫았다.
강의실 안은 조금 전과 달리 조용했다.
하리는 실습대 앞에 서서 손바닥 위에 얇은 보호막을 세웠다. 첫 막은 한 호흡도 지나지 않아 가장자리부터 흔들렸다. 예전 같았다면 흔들리는 빛을 붙잡으려 마력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리는 손가락을 접었다. 첫 막을 스스로 껐다.
멈춘 자리에 남은 마력 줄기를 두 번째 고리로 옮기자 손바닥 위에 콩알만 한 빛이 다시 맺혔다. 두 번째 막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 호흡 뒤 빛은 얇게 갈라져 사라졌다.
"첫 막은 두 호흡. 두 번째는 한 호흡."
루나가 관찰 노트에 적었다.
하리는 숨을 고르며 손을 내렸다. 실패한 횟수만 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빛이 무너진 뒤 손끝이 저리거나 줄기가 뒤엉키지 않았다.
"다시 하겠어요. 세 번까지만요."
카이드는 창문에서 가장 먼 자리에 종이 조각 하나를 놓고 목검을 들었다.
첫 번째 검로는 너무 급했다. 목검 끝이 바닥을 스치며 먼지만 일으켰다. 종이 조각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에는 손목이 먼저 굳었다. 카이드는 검을 중간에 멈추고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 안쪽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무시하지 않았다.
세 번째에야 목검이 지나간 뒤 바닥의 먼지가 아주 조금 옆으로 밀렸다. 종이 조각의 한쪽 모서리가 떨리다가 멈췄다.
카이드는 곧장 검을 내렸다.
"세 번 했는데 왜 멈춰?"
하리가 물었다.
카이드는 문 쪽을 한번 보았다. 바깥에서 누군가 다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열 번을 보여 주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지금은 다섯 번을 채우면 안 될 것 같아."
"그것도 기록할까요?"
루나가 깃펜을 들며 물었다.
카이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로가 아니라 내 기분이잖아. 그건 내가 기억하면 돼."
루나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관찰된 현상과 카이드가 고른 중단을 같은 줄에 적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그녀는 실습대 위 막종이의 가장자리가 습기에 따라 미세하게 말리는 모습을 표시했다. 아침보다 공기가 건조해지자 얇은 잉크가 수식의 모서리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어제와 번짐이 달라요. 점화식은 같은 모양이어도 작동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면 다시 만들지 마."
옷자락 아래에서 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가지는 이유부터 찾아. 불 붙는 것만 보고 있으면 또 종이만 태우게 된다."
루나는 깃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네. 먼저 망가지는 조건을 기록하겠습니다."
그녀는 새 종이를 꺼내 수식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습도와 잉크 농도, 종이의 결이 바뀌는 순서만 적었다. 불꽃은 없었지만 노트 위의 줄은 전날보다 빠르게 늘어났다.
해가 기울 무렵 문밖의 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이어서 단정한 구두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루드윅 명예교수님. 셀레네 바이스입니다."
낮고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헤르만의 어깨가 굳었다. 그는 문서철을 품에 끌어안고 에신을 바라보았다. 에신은 옷자락을 내리지 않았다.
"돌아가라."
"문을 열 필요는 없습니다."
셀레네의 목소리는 문 너머에서도 또렷했다.
"다만 마학부는 최소 작동식의 재현 가능성과 원본 수식의 검토를 정식으로 요청할 생각입니다. 루나 학생의 기록이 개인적인 요행인지 검증할 절차가 필요하니까요."
루나는 실습대 위 양피지 조각을 손으로 덮었다. 하리는 자연스럽게 실습대 옆에 섰고 카이드는 목검을 바닥에 세웠다.
에신은 한참 뒤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와라. 오늘은 쉬는 날이다."
"그 답변도 기록해 두겠습니다."
셀레네의 대답은 짧았다. 잠시 후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잠긴 문 안에 남은 네 사람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창밖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누구도 창문 쪽을 보지 않았다.
에신은 옷자락을 다시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내일도 문부터 잠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