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11화: 지워진 배수 장부와 첫 공급 계약
아카데미 중앙 자료실의 문은 해가 뜨기 전에도 닫혀 있었다.
로완은 문앞 청동 봉인을 올려다보다가 품에서 은빛 등록판을 꺼냈다. 제국 공인 대식물학 연구실 책임자라는 글자가 새벽 등불 아래에서 옅게 빛났다.
문지기 마도사는 등록판을 확인하고도 문을 열지 않았다.
"수호 신목 정원의 배수 장부는 결계 관리 문서입니다. 연구실 책임자라고 해도 바로 열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누군가가 이 기록을 넘기라고 협박한 일도 결계 관리 문서로 묻어 두겠다는 겁니까?"
로완이 익명 요청서를 내밀었다. 은색 먹으로 찍힌 세 갈래 물길 문양이 등불빛을 받아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문지기 마도사의 눈이 종이에 붙었다. 그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실비아가 자료실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손에는 수정 감측판과 학장 인장이 찍힌 운영권 문서가 들려 있었다.
"신목의 배수선은 뿌리와 결계를 함께 지탱해요. 누군가가 기록을 노린다면 문을 잠그는 편이 더 위험하겠죠. 제 입회 아래 열겠습니다."
문지기 마도사는 마지못해 봉인 홈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청동 문이 열리자 오래된 밀랍과 젖은 종이 냄새가 흘러나왔다.
자료실 안쪽에는 결계석 수리 기록과 약초 반출 장부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로완은 신목 정원 칸으로 가서 배수 도관 점검일의 장부를 꺼냈다.
한 장을 넘긴 손끝이 멈췄다.
정화 도관에서 푸른 염료와 은색 가루가 발견되기 직전 밤의 출입 칸 한 줄이 칼날로 긁혀 있었다. 이름은 사라졌지만 종이 결 사이에 푸른 먹이 남아 있었다.
그 위에는 둥근 관리 인장이 반쯤 겹쳐 있었다. 온실 감독관이 시설 장부를 결재할 때 쓰는 인장이었다.
"감독관의 인장입니다."
문지기 마도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인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지웠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로완은 긁힌 부분을 창 쪽으로 기울였다.
"결재 뒤에 손댔을 수도 있고 누군가 인장을 빌렸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장부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거죠."
실비아가 수정 감측판을 종이에 가까이 댔다. 희미한 빛이 번지며 지워진 줄 아래에서 가느다란 은빛 알갱이가 떠올랐다.
"먹에 섞인 게 아닙니다. 기록 봉인에 쓰는 은분이에요."
로완은 협박장을 옆에 놓았다. 두 문양은 같은 방향으로 휘어진 물길을 세 갈래로 가르고 있었다.
"이 문양이 장부에 찍힌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누가 적었는지보다 먼저요. 누군가가 신목의 물길을 바꾸려 했다면 배수 기록은 설계도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때 자료실 문이 세게 열렸다. 펠릭스가 봉랍이 찍힌 두루마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들어왔다.
"로완. 온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였군. 황실 조달국에서 긴급 요청이 왔다."
펠릭스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붉은 인장이 찍힌 문장이 길게 드러났다. 북부 전선의 치료소에 보낼 엘릭서 릴리 삼백 촉을 열흘 안에 확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로완은 수량을 두 번 읽었다.
"열흘 안에 삼백 촉이라니. 지금 온실에서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건 백스무 촉 남짓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북부 치료소는 겨울 부상자가 밀렸대. 이 계약을 잡으면 시엘버그 상단이 운송을 맡을 수 있어. 우리도 황실 공급선에 들어가는 거고."
펠릭스의 목소리에는 기대를 감추지 못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곧 두루마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 봐. 제국 약초 상단은 이미 대체 공급을 제안했어. 우리가 거절하면 그들이 비약 재고를 보내겠지."
로완은 마지막 줄을 읽었다. 기존 공급처의 재고를 우선 배정할 수 있다는 문구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삼백 촉이라는 숫자는 긴급한 치료소를 돕기 위한 요청인 동시에 새 연구실이 무리하다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올가미처럼 보였다.
"지금 꽃대를 강제로 올리고 모주까지 나누면 삼백 촉은 만들 수 있습니다."
펠릭스의 눈빛이 잠시 밝아졌다.
로완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봄에 남는 뿌리가 없겠죠. 추위가 끝나기도 전에 모주가 주저앉으면 다음 치료소에 보낼 약초도 사라집니다. 치료소를 돕겠다고 약초를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료실이 조용해졌다. 펠릭스는 두루마리를 말아 쥔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럼 가능한 수량을 정해. 상단의 이름을 걸고 계약 문장을 바꾸게 하겠다."
로완은 장부 속 은분 문양을 다시 한 번 본 뒤 종이를 덮었다.
"먼저 증식상을 보죠. 오늘의 답은 온실 안에 있습니다."
유리 온실은 아침 해가 높아질수록 푸른 빛을 머금었다. 환기창 아래의 숯 필터는 새것처럼 마른 부분과 습기를 머금어 검어진 부분이 갈려 있었다. 은잎 민트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싸한 향을 내보냈다.
한스는 로완이 들어오자마자 습도 장부를 내밀었다.
"밤새 온도는 스무 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황실에서 정말 삼백 촉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열흘 안에."
한스의 표정이 굳었다.
"꽃을 더 피우게 하려고 마나수를 진하게 쓰자는 사람들도 나오겠군요."
"그래서 먼저 막을 겁니다."
로완은 엘릭서 릴리 재배대 사이를 걸었다. 꽃이 만개한 모주는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잎이 단단하고 포복경 마디마다 가는 흰 뿌리가 잡힌 개체들을 골랐다.
"모주 열두 개만 씁니다. 한 개에서 세 개를 얻겠다고 뿌리를 몽땅 떼어 내지 말고 포복경 세 마디씩 남겨요. 모주가 살아야 다음 차수도 있습니다."
한스가 룬 메스를 들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모주를 그대로 두면 열흘 뒤 수량이 더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모자라는 걸 감추려고 뿌리를 죽이는 순간부터 재배가 아니라 약탈입니다."
로완은 포복경을 자른 뒤 절단면이 마르도록 잠시 기다렸다. 한스는 마른 모래와 잘게 부순 숯을 얇게 깔아 새 증식상 세 칸을 만들었다.
첫 칸은 모주 회복용이었다. 둘째 칸에는 뿌리가 가장 안정된 납품 후보만 옮겼다. 셋째 칸에는 수분량을 조금 낮춘 비교 구획을 만들었다. 같은 묘를 나누어 심고도 무엇이 살아남게 하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다시 감으로 돌아가게 된다.
"둘째 칸에만 물을 더 주면 안 됩니까? 빨리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하잖아요."
"과하게 주면 새 뿌리부터 숨을 못 쉽니다. 납품할 아이가 급하다고 뿌리가 숨 쉬는 속도까지 앞당길 수는 없어요."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로완이 절단면 하나를 살피려던 순간 손끝에 미세한 가루가 묻었다. 검은 포자처럼 부서지는 가루가 아니었다. 햇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반짝이다가 금세 빛을 잃었다.
"한스, 이 포복경은 오늘 누가 만졌죠?"
"저와 로완님뿐입니다. 새벽에 필터를 확인하러 온 실비아 부교수님은 재배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요."
실비아는 가루를 유리판 위에 옮겨 감측했다. 은분은 약하게 반응했으나 잎을 태우거나 포자를 품은 기색은 없었다.
"자료실 장부에서 본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마나를 증폭하는 가루가 아니라 기록 봉인에 쓰는 은분에 가까워요."
"자료실에서 제 장갑에 묻어 왔을 수도 있습니다."
로완은 장갑을 벗어 유리병에 넣었다.
"그 가능성부터 기록합시다. 새 침입이라고 단정하면 놓치는 게 생겨요."
실비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연구실을 맡긴 모양이군요."
사흘 뒤 증식상 둘째 칸의 포복경 끝에서 새 뿌리들이 희게 뻗었다. 첫째 칸의 모주도 잎색을 잃지 않았다. 셋째 칸은 수분을 덜 준 탓에 뿌리가 늦었지만 무르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황실 조달국 사절이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창가에 놓인 증식상을 훑어보고는 제국 약초 상단의 계약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 안에 답을 주십시오. 삼백 촉을 맞추지 못하면 기존 공급처로 넘기겠습니다. 북부 치료소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펠릭스가 사절의 옆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로완은 재배 기록표와 병해 검사표를 차례로 펼쳤다.
"삼백 촉 즉시 납품은 못 합니다. 열흘 뒤 육십 촉을 먼저 보내겠습니다. 꽃과 뿌리 상태를 각각 검사한 개체입니다. 나머지는 삼 개월 증식 계약으로 바꾸죠."
사절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육십 촉으로 황실 요청을 받겠다고요?"
"죽지 않는 육십 촉입니다. 그리고 치료소에서 계속 키울 수 있는 재배 기록도 함께 보냅니다. 한 번 쓰고 끝나는 비약보다 다음 달에도 자랄 약초가 필요할 겁니다."
"기존 상단은 오늘 밤에도 삼백 촉을 낼 수 있습니다."
"그 약초가 어디서 자랐고 어떤 병해 검사를 거쳤는지 장부까지 붙여 준다면 그 계약을 택하십시오."
사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한스가 새 증식상에 표찰을 꽂고 있었다. 모주 회복, 납품 후보, 비교 구획이라는 글자가 차례로 흔들렸다.
펠릭스가 앞으로 나섰다.
"시엘버그 상단은 육십 촉을 우선 운송하고 이후 증식분의 운송비를 동결하겠습니다. 검사 장부가 붙은 공급은 저희도 처음입니다. 조달국이 원하는 게 안정된 약초라면 이 조건이 더 값집니다."
사절은 마침내 새 계약서에 붉은 인장을 눌렀다.
"열흘 뒤 검수 납품입니다. 그때 수량과 상태가 기록과 다르면 계약은 끝입니다."
"그게 맞습니다."
로완은 인장 마르기를 기다린 뒤 봉랍을 정리했다. 봉투를 뒤집는 순간 손끝이 굳었다.
밀랍 안쪽에 은분으로 찍힌 세 갈래 물길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자료실 장부와 협박장에 있던 표식이었다.
로완은 봉랍을 빛에 비춰 보았다. 사절은 이미 계약서 사본을 챙기고 있었고 펠릭스는 그 문양을 알아본 뒤 말없이 숨을 들이켰다.
"이 봉랍은 조달국에서 찍은 겁니까?"
"문장은 조달국에서 작성했습니다. 봉랍은 수도 기록국에서 받은 표준품이고요. 왜 그러십니까?"
로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문양이 쓰였다고 해서 수도 기록국이 신목의 배수 기록을 노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록을 다루는 길과 약초를 옮기는 길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는 봉랍과 장갑이 든 유리병을 나란히 놓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납품 장부는 사본까지 전부 남기죠. 온실을 드나드는 사람도 다시 적고요."
유리 온실 너머로 북쪽 정원의 검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새 뿌리는 흙속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로완은 첫 계약서 위에 손을 얹었다. 삼백 촉을 약속하지 않은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감추려는 물길을 따라가지 않고도 살아남는 공급을 만드는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