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튜토리얼 슬라임이 만렙을 숨김1화

튜토리얼 슬라임이 만렙을 숨김

튜토리얼 슬라임이 만렙을 숨김

1화. 접속하자마자 슬라임

프롤로그

정식 오픈 버튼을 누른 다음, 강현우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 풀잎의 뒷면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눈꺼풀을 뜬 감각은 없었다. 축축한 흙냄새와 차가운 물기가 몸 전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피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 전부가 흔들렸다.

현우는 손을 들어 보려 했다.

푸른 젤리 덩어리 한쪽이 불룩 솟았다가 힘없이 옆으로 흘렀다.

‘잠깐. 손이 아니라 몸 전체가 움직였는데?’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목소리도 없었다. 머릿속에서만 비명이 울렸다.

공중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물방울 슬라임]

레벨: 1

체력: 10/10

공격력: 0

개체 분류: 유일 개체

현우는 마지막 줄을 읽고 다시 읽었다.

아카디아 온라인의 물방울 슬라임은 튜토리얼 정원 곳곳에 널린 몬스터였다. 초보자에게 목검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경험치 몇 점을 내주는 연습용 표적. 죽으면 몇 분 뒤 같은 자리에 다시 나타나는 존재.

그런데 유일 개체라니.

상태창 아래에 붉은 글씨가 번졌다.

[소멸 이후의 귀환 지점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젤리 몸에 등골이 있을 리 없는데도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현우는 급히 메뉴를 불러냈다. 평소라면 시야 왼쪽을 두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열렸을 화면이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상태, 진화, 기록이라는 세 개의 탭뿐이었다.

로그아웃 버튼은 없었다.

친구 목록도 없었다.

‘장난이지? 오픈 이벤트 연출 같은 거겠지.’

그는 상태창을 닫고 다시 열었다. 손가락이 없으니 의식을 집중하는 식으로 해야 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공격력 0.

유일 개체.

귀환 지점 미확인.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말랑한 몸이 풀잎 사이를 미끄러지며 지나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작은 언덕 위 초보자 정원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알아봤다.

정원 끝에는 하얀 석조문이 있었다. 문 너머로 새로 접속한 유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누군가는 흥분해서 소리쳤고 누군가는 하늘을 찍겠다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정식 오픈의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현우에게 그 소리는 시작 신호가 아니라 사냥 개시를 알리는 종처럼 들렸다.

첫 사냥감

“여기가 튜토리얼 1구역인가 봐. 진짜 풀 냄새가 나네.”

하얀 사제복을 어색하게 걸친 여자가 꽃밭 앞에서 멈췄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아카네라는 이름과 레벨 1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아카네는 손바닥을 펴고 작은 빛구슬을 띄웠다. 빛구슬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힐은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설명을 너무 빨리 넘겼나 봐.”

그녀 곁의 남자가 나무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도윤. 초보 기사. 현우보다 커 보이는 건 당연했다. 지금의 현우는 사람 신발에도 눌릴 크기였다.

“일단 퀘스트부터 끝내자. 슬라임 다섯 마리 잡으면 초급 장비 준대.”

도윤은 정원 중앙의 표지판을 가리켰다.

[첫 번째 발걸음]

물방울 슬라임을 처치하십시오. 0/5

아카네가 표지판과 슬라임들을 번갈아 봤다.

“꼭 다 잡아야 해? 저쪽에 그냥 가만히 있는 애들도 있는데.”

“몬스터는 몬스터지. 금방 리스폰된대. 그리고 장비가 있어야 다음 구역 가잖아.”

말에 틀린 곳은 없었다. 현우도 평소라면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튜토리얼의 슬라임을 두고 죄책감을 느끼는 유저는 드물었다.

도윤의 목검이 옆 슬라임을 향해 내려갔다.

퍽.

푸른 덩어리가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슬라임은 한 번 크게 떨더니 작은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물방울 슬라임 처치 1/5]

아카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아프게 맞는 것 같았는데.”

“그래픽이 리얼해서 그렇겠지.”

도윤은 다음 슬라임 쪽으로 발을 옮겼다.

현우는 사라진 자리를 노려봤다. 저 슬라임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원래 시스템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럴까.

상태창의 유일 개체라는 글자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 빛가루가 된 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로그아웃 버튼을 찾게 되면 어떡하지. 아니면 현실의 몸도 함께 멈추면.

‘확인할 이유가 없지.’

남쪽 배수로가 떠올랐다.

튜토리얼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장식용 수로가 하나 있었다. 베타 테스트 영상에서 잠깐 보였던 지형이다. 북쪽 표지판을 따라가면 절대 갈 일이 없고 사람 몸으로는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배수구.

슬라임이라면 들어갈 수 있다.

현우는 도윤의 발과 아카네의 빛구슬 사이를 살폈다. 배수로까지는 대략 열 걸음. 지금의 몸으로는 열 번 굴러야 한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어? 저기 한 마리 더 있네.”

목검 끝이 현우를 가리켰다.

고인물의 도망법

현우는 몸을 굳혔다.

고인물이라면 여기서 뭘 해야 할까. 신규 유저에게 물방울 슬라임이 어그로를 끌면 일정 거리 밖으로 도망친다. 체력이 깎이면 도윤은 한 번 더 때릴 것이다. 사라지면 퀘스트 카운트가 오른다.

답은 뻔했다. 맞지 말고 배수로로 간다.

문제는 슬라임에게 달리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현우는 풀잎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푸른 표면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처음에는 한 뼘도 움직이지 못했다. 몸을 밀 힘이 없었다.

도윤이 웃었다.

“진짜 느리네.”

목검이 올라갔다.

현우는 잔디가 아니라 그 아래의 젖은 흙을 봤다. 배수로 쪽으로 이어진 낮은 땅은 밤새 내린 물 때문에 질척였다. 사람에게는 불편한 땅이다. 하지만 물로 된 몸에는 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납작하게 퍼뜨렸다.

표면에 흙과 물기가 달라붙었다. 투명했던 푸른 젤리가 갈색으로 흐려졌다. 보기 좋은 위장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었다. 그저 젖은 땅에 더 잘 붙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퍽!

목검이 그의 오른쪽을 찍었다.

충격이 파문처럼 몸 전체에 퍼졌다. 현우는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줄 알았다.

[체력: 10/10 → 8/10]

‘아프다.’

현우는 이를 악물려고 했지만 이가 없었다. 대신 찢어진 감각을 붙들며 더 낮게 퍼졌다.

“어? 안 죽었네.”

도윤이 목검을 다시 들었다.

아카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윤아. 너무 세게 친 거 아니야?”

“목검인데 뭐가 세. 한 번 더 치면 끝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현우는 몸 한 조각을 도윤의 발밑으로 흘려 보냈다.

전투 기술은 아니었다. 흙 위에 점액을 바른 것뿐이었다.

도윤의 앞발이 젖은 땅을 밟았다.

“어어?”

신발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도윤이 균형을 잃고 목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아카네가 놀라 그를 붙잡으려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 한 걸음이 현우에게는 수십 미터짜리 틈이었다.

현우는 배수로를 향해 몸을 굴렸다.

돌 가장자리가 가까워졌다. 입구는 생각보다 좁았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틈. 푸른 젤리인 자신도 망설일 만큼 얇았다.

뒤에서 도윤이 욕설을 삼켰다.

“뭐야. 미끄럽잖아.”

“괜찮아? 포션 줄까?”

“괜찮아. 저 슬라임부터 잡자.”

현우는 돌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단단한 모서리가 표면을 긁었다. 몸을 압축하자 중심 어딘가가 눌리는 감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몸 전체가 자기였다. 이제는 그 안에 절대 다치면 안 될 작은 알갱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체력: 8/10 → 7/10]

‘핵인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현우는 밀리고 또 밀렸다. 푸른 몸이 얇은 막처럼 늘어나 돌 반대편으로 새어 나갔다. 마지막 덩어리가 통과했을 때 그는 배수로 바닥에 축 늘어졌다.

바깥에서 아카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졌어?”

“아니. 저 틈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그렇게 작은 데로?”

도윤의 목검 끝이 돌틈을 툭 건드렸다. 현우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바짝 붙었다.

사람의 발이 들어오지 못하는 틈이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다.

먹을 수 있는 것

배수로 안은 낮고 어두웠다. 얕은 물이 돌 사이를 가르며 흘렀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몸은 흙투성이 푸른 덩어리였다.

현우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체력 7/10.

공격력 0.

로그아웃 불가.

정리하면 처참했다. 도망은 성공했지만 배수로 밖으로 나가면 다시 슬라임 사냥 퀘스트가 널려 있을 것이다. 튜토리얼 정원의 모든 유저가 도윤처럼 악의 없는 처형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뛰어든 건 아니야. 남쪽 배수로는 정원 끝까지 이어진다.’

아주 오래 전 공개된 맵 구조도에서 봤던 정보였다. 중간에 작은 관리용 공간이 있었고 거기에는 버려진 상자나 장식품이 생성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확실한 공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작은 가능성도 필요했다.

물줄기 너머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깨진 유리병이었다. 병목에는 붉은 액체가 한 방울 매달려 있었다. 아카네의 허리 주머니에 있던 초급 회복 포션과 같은 색.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푸른 표면이 붉은 방울 쪽으로 가늘게 솟았다. 배고픔과는 달랐다. 정확히는 저 안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맞는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섭취 가능한 마력 잔여물을 감지했습니다.]

현우는 멈칫했다.

‘이걸 먹으라고?’

슬라임이 물건을 먹는 설정은 흔했다. 그러나 초급 슬라임은 보통 유저가 던져 준 먹이 아이템에 반응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카디아 온라인의 공식 안내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다.

상태창의 진화 탭이 희미하게 빛났다.

아무 설명도 없었다. 수상할 정도로 불친절했다.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포션 하나가 없어졌어.”

아카네의 목소리였다.

“아까 넘어질 때 빠졌나 봐. 배수로에 들어갔으면 아깝네.”

“그럼 안쪽을 조금만 볼까?”

도윤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현우는 붉은 방울과 입구를 번갈아 봤다. 포션이 독일 가능성도 있었다. 시스템이 낚시를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가진 정보로는 확률을 따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체력 7. 다음 목검을 한 번 더 맞으면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배수로 끝까지 갈 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결국 다시 정원으로 나가야 한다.

반면 이 한 방울은 회복 포션의 잔여물이다.

현우는 몸을 뻗었다.

차가운 붉은 액체가 표면에 닿자마자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피가 없는 몸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열기가 번졌다. 돌 모서리에 긁힌 감각이 서서히 메워졌다.

[무한 포식의 조건 일부를 충족했습니다.]

[대상: 초급 회복 포션 잔여물]

[성분 분석을 시작합니다. 진행도 1%]

[체력: 7/10 → 9/10]

현우는 숨을 쉬지 못하면서도 깊게 숨을 들이킨 기분이 들었다.

무한 포식.

처음 보는 특성명이었다. 그리고 분석 진행도 1%라는 숫자는 당장 대단한 힘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포션 한 방울을 먹었다고 회복 마법을 쓰게 된 건 아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버려진 포션에도 자기 몸이 반응했다.

이 정원에는 슬라임을 잡으려는 유저만 있는 게 아니다. 유저들이 흘리고 버리는 물건도 있다. 전에는 배경 장식으로만 보이던 것들이다.

현우는 깨진 병을 몸 안쪽으로 감쌌다. 유리 조각은 불편했지만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배수로 입구가 어두워졌다.

도윤의 그림자가 돌틈 위를 가렸다.

“안에 뭐 있나?”

아카네가 그의 뒤에서 말했다.

“포션이면 그냥 두자. 슬라임도 더 안 보이고.”

“그래도 퀘스트 하나가 남았잖아.”

목검 끝이 틈 사이로 들어왔다. 현우는 몸을 더 낮췄다.

체력이 회복됐다고 해서 저 목검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무한 포식도 아직 이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단순히 도망치는 슬라임이 아니었다.

현우는 얕은 물길을 따라 배수로 깊은 곳으로 흘러갔다. 어둠 너머에는 희미한 빛 하나가 더 흔들리고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면, 둘도 있을 것이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